48화
“제대로 확인한 것이 틀림없나?”
키언이 다시 한번 기사들을 향해 물었다.
“네, 유감스럽게도 그렇습니다, 폐하.”
기사단장인 코넬르가 침통한 목소리로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럴 리가…….”
키언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루카스는 클리오라를 노려보았다.
분명히 아까 강한 기운이 운용되는 것을 느꼈다. 급격히 창백해진 클리오라의 안색만 보아도 그녀가 무슨 농간을 부린 게 확실했다.
루카스의 시선을 느낀 클리오라가 입꼬리를 들어 올려 픽, 웃었다.
눈치를 챘나? 그러면 뭐 어때.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을 텐데. 클리오라는 오랜만에 강한 힘을 사용해서 머리가 좀 어지럽긴 했지만 황실은 물론이거니와 저 ‘마즈다크’를 물 먹일 수 있다는 것이 꽤 기분 좋았다.
그녀가 도발하듯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얼굴 만면에 걸린 비웃음이 속을 메스껍게 할 정도였다. 울컥한 루카스가 참지 못하고 한 발짝 앞으로 내디뎠을 때였다.
“폐하! 찾았습니다!”
누군가 연회장 문을 급하게 열고 들어와 보고했다.
무도회는 이미 거의 중단된 상태였다. 음악이 그친 홀 안에는 사람들의 웅성거림만 더욱 커지고 있었다. 모든 이의 시선이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문 쪽을 향했다.
“이거 놔! 내가 뭘 어쨌다고!”
연회장 문을 박차고 들어온 기사들 손에 신녀장 리비어가 끌려오고 있었다. 리비어는 어떻게든 기사들의 손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었지만 그녀가 건장한 기사들에게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흡사 발악하는 것과 같은 리비어의 모습에 샤로니아는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것은 샤로니아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는지 연회장에 모인 이들 모두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무슨 일인가?”
이제껏 여유로운 얼굴을 하고 있던 마구스의 미간에 처음으로 주름이 생겼다. 리비어가 기사들의 손에 붙들려오는 것은 그의 각본에 없던 일이었기에 그는 무언가 잘못되고 있음을 직감했다.
“신녀장이 마물을 기르고 있었습니다.”
기사의 보고가 끝나자 사람들의 시선이 기사 뒤에 있던 마물에게로 향했다.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을 가진 붉은 눈의 생물을 본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비명을 내질렀다.
“꺅! 저게 뭐야!”
“크르르르르!”
리비어가 키우던 마물 하데스가 목줄이 채워지고 재갈이 물려진 채 끌려 나왔다.
“하? 리비어, 어떻게 네가…….”
한겨울의 눈 폭풍보다 더 차갑게 내려앉은 마구스의 음성은 마치 지옥의 사자라도 되는 듯 섬뜩했다. 하지만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지 리비어가 무릎으로 기어와 마구스에게 애원했다.
“카티르, 하데스는 안 됩니다. 저 애는 착한 애예요. 부디, 은총을 베풀어 주세요. 살려 주세요.”
두서없이 늘어놓는 그녀의 말에는 마물 하데스를 살리고자 하는 마음이 가득했다.
“신녀장이 마물을 기르다니요?”
“그렇다면 황제 폐하의 말이 사실인 걸까요?”
“어떻게 신전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죠?”
사람들이 한마디씩 던지는 말들이 마구스의 귓가로 흘러 들어갔다.
다른 이도 아닌, 신녀장에게 이렇게 뒤통수를 맞게 될 줄은 몰랐다. 이런 날을 대비하여 클리오라의 마법을 사용해 지하에 있던 마물들을 이동시켰다. 완벽한 각본이었는데 일을 이렇게 망쳐 놓을 줄이야.
“신녀장은 지금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알고 간청하는 것인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 마구스가 무표정하게 물었다.
수십, 아니 수백 개의 싸늘한 눈동자가 제게 향해 있는 것을 보면서도 리비어는 하데스의 붉은 눈동자를 찾기에 급급했다.
처음엔 마물을 키워 샤로니아에게 복수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마물을 키우다 보니 점점 정이 들고 말았다.
복수고 뭐고 집어치울 테니, 하데스만은 제발 살려 줘! 어린 나이에 신전에 흘러들어와 온갖 고초를 겪으며 사람을 짓밟고 신녀장 자리까지 오른 그녀였다.
사람을 대할 때 진심으로 마음을 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저 이용 가치에 따라 태도를 정하고 필요에 따라 관계를 맺으면 그뿐이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마음을 준 마물이 미치도록 눈에 밟힌다.
이렇게 발각되었으니 죽이겠지? 당연히 죽일 거야. 그녀는 지금 자신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도 잊고 마물을 살려야겠다는 생각만 했다.
“카티르께서는 이 일에 대해서 설명을 해 보시지요.”
키언이 마구스를 차갑게 응시하며 말했다.
그도 신녀장이 마물 하나를 빼돌렸다는 것을 모르는 눈치였다. 비록 지하에 있던 마물의 본거지를 밝히지 못한 것이 아쉬웠으나 어쨌든 그로 인해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
그것은 정말 천운이었다. 신은 제 이름을 더럽힌 신전이 멸망하길 원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뭐라고 답할 테냐.’
키언은 마구스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하며 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비록 신녀장 하나의 독단적인 행동일 뿐이지만, 어쨌든 신전에서 일어난 일이니 책임을 져야겠지요.”
독단적인 행동? 마구스가 모든 것을 리비어의 책임으로 돌리기로 작정한 듯 말하자 키언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무슨 책임을 어떻게 지실 겁니까?”
“신녀장을 파직시키겠소. 그리고 이 마물은 황제께 맡길 테니 알아서 처분하시오.”
“카티르! 안 됩니다!”
리비어의 절망적인 목소리가 홀 안에 메아리치듯 울려 퍼졌다.
그 자리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날카로운 여자의 음성에 눈살을 찌푸렸다.
키언은 리비어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도마뱀처럼 꼬리를 자르려는 마구스를 보며 실소했다. 그가 의도한 대로 움직일 줄 알고? 자신을 그렇게 만만하게 보았다간 큰 코를 다치게 되리라.
“그리고 한 가지 더.”
키언이 마구스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황후를 선출하는 데 있어서 신전의 간섭은 일절 받지 않겠습니다.”
날 선 눈빛이 서로 부딪쳤다.
작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물고 늘어지는 황제를 바라보며 마구스의 표정에도 슬쩍 금이 갔다.
‘애송이가 많이 컸군.’
마구스는 속으로 그런 평을 내리며 쓰게 웃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황제의 말을 무리하게 거절했다간 상황이 더 나빠질 수도 있었다.
“그러, 시지요.”
이로써 모든 결론이 나자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과 사제들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리비어는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가 ‘카티르, 제발!’이라고 계속해서 절규했지만 마구스는 리비어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데려가거라.”
마구스의 말에 사제들이 리비어의 양팔을 하나씩 움켜쥐고 끌고 나가기 시작했다.
“카티르! 제발, 부디……!”
애처로운 목소리는 연회장 문이 닫히고 나서야 사라졌다.
“황실 지하 감옥에 가두고 잘 감시하도록.”
키언의 지시를 받은 기사들이 마물 하데스를 끌고 갔다.
마구스까지 고개를 숙인 뒤 물러가자 비로소 연회장 안이 정리된 느낌이었다.
“약간의 소란이 있었으나, 무도회는 계속될 것이니 부디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길 바라오.”
키언이 손짓을 하자 악단이 다시 연주를 시작했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향후 돌아갈 정세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신사와 숙녀들의 춤이 다시 시작되었다.
일단 표면적으로는 무도회가 정상화되었다. 하지만 오늘 있었던 일은 곧 사람들의 입을 타고 수도 전 지역으로 퍼져 나갈 것이다. 황제와 대사제장의 대립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봤던 이들은 오늘의 결정이 차후 황후 선출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지를 점치며 기민하게 눈을 빛냈다.
샤로니아는 폭풍이 한바탕 지나갔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폭풍 가운데 서 있는 것 같은 남자가 안쓰러웠다. 황제라는 그의 위치가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건 진즉에 알았다.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그를 안줏거리로 삼는 사람들도, 그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그도, 오늘따라 다 못마땅하기만 하다.
그녀는 복잡한 속내를 숨기지 못하고 그를 불렀다.
“폐하…….”
샤로니아의 표정에 수심이 가득해 보였기에 키언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뭐, 완벽하진 않지만 그래도 소득은 있었으니 그런 표정을 지을 것까진 없는데.”
샤로니아는 자신의 기분이 가라앉은 것을 알고 일부러 더 쾌활하게 말하는 남자를 보고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샤로니아가 가만히 있자 키언이 그녀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우리는 다른 데 가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을 것 같군.”
샤로니아가 무슨 반응을 나타내기도 전, 키언이 무도회장을 빠져나가기 위해 그녀의 손을 잡고 조용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가장 이목이 집중되는 위치에 있다 보니 들키지 않고 빠져나오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들을 목격한 이들이 뒤에서 수군거리며 곧 연회장 전체에 이 사실이 알려질 게 뻔했지만 상관없었다.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진이 빠지는 무도회보다는 단둘이 보내는 시간이 훨씬 더 의미 있을 테니까.
하지만 샤로니아는 무도회의 주최자인 황제가 이래도 되나 하는 걱정을 지울 수 없었다.
“이렇게 나오셔도 되는 거예요?”
그의 입장을 생각해서 건넨 말이었건만.
“있을 만큼 있었어.”
너무도 쉬운 대답이 돌아왔다. 고민하는 자신이 일순 우습게 느껴질 만큼 아주 쉬운 대답이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황제가 좋은 점이 하나 있다면 이 정도 일로 남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는 거니까.”
그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다른 말을 하기도 뭣해서 샤로니아는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웃네.”
키언이 샤로니아의 얼굴을 흘끔 바라보며 말했다. 자신의 표정이 내내 굳어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샤로니아의 눈동자가 한차례 흔들렸다.
“대사제장 때문인가?”
한 번쯤 모른 척 넘어가 주면 좋으련만. 샤로니아는 제 속내를 낱낱이 파고드는 질문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으나 순순히 대답했다.
“뭐, 아니라고는 못하겠네요.”
마구스가 생각 이상으로 주도면밀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 건 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를 무너뜨리려면 웬만한 지략과 능력으로는 소용없다는 방증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다. 황실 무도회에 참석해 보니 제 옆의 이 남자가 황제라는 것이 다시 한번 실감났다. 그의 옆에 황후로 서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말이다.
쟁쟁한 귀족들 사이에서 주눅이 든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막중한 무게감을 또렷이 느꼈을 뿐이었다.
그때, 한낮과는 확연히 차이나는 서늘한 바람이 그들을 한바탕 흔들고 지나갔다. 대화를 나누며 걷다 보니 어느덧 정원 끝 쪽의 호수에 다다라 있었다.
척박한 루하르의 수도 내에서 유일하게 많은 양의 물을 볼 수 있는 곳이 황궁 내의 호수였다. 이 호수가 있었기에 황궁은 푸른 정원을 가꾸고 오랜 세월 동안 쇠하지 않는 번영을 이룰 수 있었다.
황궁의 모든 인력이 황실 무도회 쪽으로 집중되었던 탓에 유독 사위가 고요했다.
보름달이 되기 직전의 상현달이 요요하게 사방을 비추고 있었다.
바람을 따라 호수 위에 잔물결이 일어났다. 그 물결을 따라 달빛이 일렁이는 모습이 무척 아름다웠다. 눈앞에 나타난 아름다운 호수를 바라보느라 저절로 대화가 끊어졌다.
그러다 잠시 후, 키언이 불쑥 말했다.
“널 포기하는 일은 없을 거야.”
이 남자는 도대체 뭘 알고 이런 말을 하는 걸까. 마치 제 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말하는 키언 때문에 샤로니아의 가슴이 술렁거렸다.
까만 밤하늘을 밝히는 달빛보다 더 존재감이 뚜렷한 금빛 눈동자가 그녀를 향해 조용히 타올랐다.
“앞으로 힘든 일이 없을 거라곤 장담 못 하겠어. 어쩌면 마구스의 계략에 빠져 위험한 상황에 처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짐은 널 포기하지 않을 거야.”
도저히 외면할 수 없게 만드는 올곧은 눈동자가 가슴 한편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리고 쐐기를 박듯 그가 이어 말했다.
“그러니 너도 약속해. 짐을 포기하지 않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