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20년 만에 선택받은 성녀는 뭐가 달라도 다르군요.”
“후광이 비치는 성녀를 내 눈으로 보게 될 줄이야!”
사람들의 반응을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더랜이 픽, 웃었다.
‘이러니 내가 관심을 끊을 수가 없지.’
사람은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법이었다. 황제가 그의 손목을 꺾으면서까지 접근 금지를 시켰는데도 샤로니아를 바라보는 더랜의 눈동자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황제는 성녀와 뭘 어쩌고 싶은 걸까. 더랜이 기민하게 눈을 반짝이며 주변 상황을 살폈다.
마침 그때, 성녀를 맞으러 나가는 황제 뒤를 에일린이 졸졸 쫓아가는 게 보였다.
‘저 맹추!’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갈 것인데, 에일린은 기어코 제 무덤을 파고 그 안에 들어가려는 것이 틀림없었다.
“폐하!”
에일린이 다급하게 키언을 불러 세웠다. 그녀에게 가로막혀 샤로니아와 아직 인사조차 나누지 못한 키언이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한쪽 눈썹을 쓱 들어 올렸다.
“무슨 일이지?”
그 질문 속에 ‘귀중한 시간을 빼앗지 말고 용건만 간단히’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줄 꿈에도 모르는 에일린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저와 춤추셔야죠.”
마치 정해 놓은 일정을 말하듯 당당한 태도에 키언이 헛숨을 내뱉었다.
“누가 그걸 결정했지?”
눈치가 없는 에일린도 알아차릴 만큼 키언의 목소리에 흉흉한 기운이 가득했다.
“그, 그거야 당연히, 제가 공녀니까 저와 먼저 춤추시는 것이…….”
에일린이 황당한 이유를 대며 버벅거렸다. 키언이 폭발하기 직전의 인내심을 그러모아 한 마디 쏘아붙이려는데 더랜이 에일린의 어깨를 감싸며 뒤로 그녀를 빼냈다.
“대화 중에 끼어들어 죄송합니다만, 곧 춤이 시작될 것 같아서요.”
그녀와 춤추기 위해 실례를 무릅쓰고 데려가겠다는 완곡한 표현이었다.
“뭐? 내가 왜 오빠랑 춤을 춰?”
하지만 더랜이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알아차리지 못한 에일린은 질색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도 너랑 춤추고 싶은 줄 알아? 목숨을 구해 준 줄도 모르고. 더랜이 속으로 불평을 쏟아 놓으며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눈치 없는 동생아, 제발 입 좀 다물어 주렴.
“그렇다면 얼른 데려가는 게 좋겠군.”
더랜은 꺼지라는 말을 고상하게 하는 황제를 바라보며 헛숨을 내뱉었다.
“감사합니다, 폐하.”
그는 에일린을 거의 질질 끌다시피 데리고 나와 자리를 옮겼다.
그들이 비켜서자마자 성녀에게 시선이 닿은 황제의 표정이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바뀌었다. 극명한 온도 차이를 목격한 에일린이 발작하듯 버둥거렸다.
“놔! 이거 못 놔!”
“이런, 미친!”
더랜이 에일린을 말리느라 진땀을 흘리며 욕설을 중얼거렸다.
“내 데뷔탕트 첫 춤은 반드시……!”
“정신 차려!”
더랜이 에일린의 어깨를 붙잡고 세차게 흔들었다.
“똑똑히 봐. 저기에 네 자리가 있는지.”
에일린이 흔들리는 눈빛으로 황제와 성녀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황제가 원래 저토록 다정한 사람이었나? 눈을 의심할 정도로 믿기지 않는 모습이었다.
“여긴 바르칼라 공작저가 아니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없다고.”
더랜의 말에 에일린이 피가 나도록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멀리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아르미네가 코웃음을 치며 샴페인을 홀짝 마셨다.
‘흥, 멍청하기는.’
남자들은 들이대는 여자를 질색한다. 그것도 모르고 가문 이름만 믿고 날뛰는 꼴이 우스웠다. 자고로 남자들이란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가녀린 여자에게 끌리는 법이다
아르미네는 기다란 속눈썹을 내리깔고 우수에 젖은 표정을 꾸몄다. 백금발에 창백할 정도로 흰 피부를 가진 그녀는 병석에 누웠다가 완쾌되었던 탓에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처럼 여리여리한 느낌이 더욱 강해졌다.
한참 상황을 지켜보던 그녀는 키언의 위치를 확인한 뒤 의도적으로 그 앞에서 현기증이 난 것처럼 비틀거렸다.
황제가 아무리 흉흉한 소문을 많이 갖고 있다 해도, 일단은 귀족교육을 받은 신사이다. 연약한 여자가 비틀거리는데도 무시할 만큼 무례하고 형편없는 인간은 아닐 것이다.
아르미네는 그 사실에 제 운을 걸어보기로 했다. 만일 황제가 몸에 밴 신사도로 그녀를 붙잡아 준다면 그걸 기회 삼아 곁에 선 성녀에게 비웃음을 날려 주어도 좋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이 가장 완벽한 타이밍이라고 그녀는 자부할 수 있었다.
탁, 누군가 자신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러면 그렇지.’
아르미네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때가 아주 중요했다. 첫눈에 반할 정도로 세심한 표정이 필요하다.
“아, 감사합……!”
“몸이 안 좋으십니까?”
잘 꾸며 놓았던 아르미네의 표정이 무너져 내렸다. 자신을 붙잡아준 것은 황제가 아니라 그 옆에 서 있던 그의 보좌관이었으니까.
“아니요, 괘, 괜찮습니다.”
아르미네는 허둥지둥 허리를 곧추세웠다. 너, 미쳤구나! 다른 사람을 반하게 만들면 어쩌자는 거야! 그녀는 속으로 자기 자신을 질책했다.
정작 그녀를 붙잡아 준 테오르는 아르미네의 창백한 안색을 보고 마차를 불러 집으로 돌려보내야 하나 고민할 뿐이었는데 말이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다른 이들이 보이는 호의를 관심과 착각할 때가 많았다. 그 결과 혼자 추측하고 혼자 설레발을 치는 일이 잦았다.
“안색이 창백하신데, 무리하지 않으시는 게…….”
“저한테 관심 갖지 마세요. 저는 따로 마음에 품은 사람이 있어요.”
“네에?”
테오르가 제 귀를 의심하며 입을 쩍 벌렸다. 이 무슨 자다가 남의 다리 긁는 소리란 말인가. 아무래도 최근에 야근을 너무 자주 해서 청각에 이상이 생긴 게 틀림없었다.
“아무튼, 죄송해요.”
아르미네가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허허, 이것 참, 무슨 이런 괴이한 일이……. 테오르가 어이가 없어 계속 헛숨을 토해 내었다.
그 시각, 샤로니아에게 인사를 하려고 다가왔던 루카스는 묘한 기시감을 느끼고 눈에 힘을 주었다. 그의 모든 감각이 기이하게도 위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것은 마력과도 관련이 있었는데, 자신과 샤로니아 외에도 마력을 가진 사람이 이 자리에 있다는 강렬한 느낌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뵙네요, 왕세자 저하.”
“너는……?”
뒤에서 들리는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던 루카스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마즈다크인의 상징인 흑발에 저주받은 헤르티스 가문을 뜻하는 초록색 눈동자. 잊은 줄로만 알았던 배신감과 살벌한 기운이 그에게서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루카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클리오라가 마치 그를 도발할 작정인 것처럼 미소 지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네가 나타나?”
당장이라도 마력을 폭발시킬 것처럼 루카스가 으르렁거렸다.
이 자리에서 곧바로 그녀의 목을 꺾으면 부모님의 억울함이 조금이나마 해소될까. 그런 생각을 하는 루카스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탁해졌다.
“이런, 진정하세요, 저하. 저는 이제 ‘디센베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었어요. 만일 저를 해한다면 저하께서 끔찍이 아끼는 동생에게 아주 불리한 일이 일어날 거예요.”
아주 평온한 얼굴로 남의 불행을 조목조목 일러주는 클리오라와 잔뜩 날을 세운 루카스의 표정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감히, 네 주제도 모르고!”
루카스가 까득 이를 갈았다.
그녀의 이전 이름은 클리오라 헤르티스. 마즈다크 왕국의 공신 가문이자, 내분의 핵심 인물이며, 마즈다크 왕국을 멸망시키고 부모님을 돌아가시게 만든 장본인인 헤르티스 가문의 여식이 바로 그녀의 정체였다.
“제가 제 발로 못 다닐 곳이 있나요?”
클리오라가 한껏 이죽거렸다.
선왕과 왕비가 죽기 직전 마력을 다 끌어모아 내린 저주 덕분에 왕국이 멸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 부모님도 돌아가시고 말았다.
저주가 얼마나 강력했던지 살아남은 클리오라 또한 그 저주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 덕분에 신전의 개가 된 줄도 모르고.’
마구스 덕분에 간신히 저주의 기운이 폭주하는 것을 막고 있는 클리오라 입장에선 루카스와 샤로니아의 존재가 눈엣가시일 뿐이었다.
클리오라에게서도 차마 갈무리하지 못한 감정이 마력이 되어 흘러나왔다.
당장이라도 충돌할 것처럼 둘의 기운이 흉흉하게 맞부딪쳤을 때였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시기에 분위기가 이렇게 화기애애한지요?”
클리오라의 어깨를 지그시 눌러 마력을 제어한 마구스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카티르……!”
마구스가 황실 무도회에 등장할 줄 몰랐던 클리오라가 잠시 놀란 얼굴을 했다.
근처에 서 있던 키언이 마구스를 발견하곤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가 신권의 상징이자 고귀하고 성결한 신의 성품을 나타내는 새하얀 신관복을 차려입고 나타났던 탓이었다.
신관복은 신전의 수장인 카티르의 권위를 나타내는 것으로 그가 공식적인 입장을 취할 때 입는 예복이었다. 복장만 보더라도 그에게 무슨 꿍꿍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벅저벅, 걸음을 내디딘 키언이 마구스 앞에 섰다. 그는 살벌한 시선을 감출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마구스를 내리깔아 보았다.
“카티르께서 무도회에 관심이 있으신 줄은 몰랐습니다.”
농담조의 말에 가시가 잔뜩 박혀 있음을 느끼면서도 마구스의 얼굴은 평온할 뿐이었다.
“신의 대리자는 신께서 원하시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야 하지요.”
신전의 대사제장의 등장에 곳곳에서 수런거리는 소리가 심해졌다.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 황제와 카티르의 대립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는 귀부인들과 아예 대놓고 어느 한쪽의 편을 드는 귀족 남성들로 홀 안이 점차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향락을 즐길 줄 아는 신은 뭐가 달라도 다르군요.”
부도덕한 제사의 행태를 안 좋게 비틀어 한 말을 듣고도 마구스는 그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을 뿐이었다.
“신께서 황제 폐하께 관심이 많으신가 봅니다. 친히 절 보내어 폐하의 배필을 찾게끔 하시니 말입니다.”
그저 사교 시즌의 시작이라고 생각하고 황실 무도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놀라며 웅성거렸다. 배필? 배필이라니? 신께서 그런 계시를 내리셨다고? 귀족들은 호기심으로 눈을 빛냈고, 혼기가 찬 딸을 둔 귀부인들은 노골적으로 기대심을 드러냈다.
“이럴 수가!”
“이번 사교 시즌에 황후를 택한다고?”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신전에서 신의 이름으로 무언가를 말할 때는 그 진위 여부를 떠나 권위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마구스가 무도회에 나타나 공식적으로 신의 뜻을 운운할 줄 몰랐던 키언은 잡아먹을 듯이 그를 노려보았다.
여론을 이렇게 몰아가다니. 이렇게 된다면 기회를 봐서 터트리려던 신전의 비리를 지금 밝힐 수밖에 없었다.
“과연 불법적인 일을 버젓이 행하는 신전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을까요?”
키언이 내뱉은 의미심장한 말에 웅성거림은 더욱 심해졌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이런 상황에서도 마구스의 표정은 얄미울 정도로 태연하기만 했다.
흥, 언제까지 그 태연한 표정이 유지될지 지켜보지. 키언은 비릿한 미소를 머금고 자신의 수하 기사들을 향해 턱짓을 했다. 그러자 신호를 받은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신전 내에서 마물을 사육하던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어머!”
“세상에나!”
여기저기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악마의 자식으로 규정한 마물을 신전 내에서 사육하고 있다는 것은 꽤 큰 파장이 되어 장내에 퍼져나갔다.
여론이 신전 측에 불리하게 흐르는 가운데서도 마구스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반박했다.
“폐하께서 뭘 잘못 알고 계신 게 틀림없습니다.”
키언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상할 정도로 태연한 그의 태도에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
‘도대체 뭘 믿고…….’
키언은 눈도 깜박하지 않고 마구스의 얼굴을 주시했다.
뱀처럼 교활한 얼굴엔 자신만만한 승리자의 미소만이 맴돌 뿐이다.
그저 괜찮은 척하는 것이리라. 덩치 큰 마물들을 이제 와서 숨길 수도 없을 테니.
키언은 무도회가 열리기 직전, 사제 데니얼을 통해 마물과 신전의 동태를 미리 파악해 두었었다. 그러니 그사이에 뭔가 다른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희박했다.
키언이 불붙는 눈으로 마구스를 노려보고 있던 때, 커다란 연회장 문이 열리고 아까 보냈던 기사들이 돌아왔다.
“폐, 폐하, 아, 아무것도 없습니다!”
“뭐라고?”
키언이 제 귀를 의심하며 외쳤다. 아무것도 없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구겨진 키언의 미간을 바라보며 마구스가 피식, 입가에 조소를 매단 채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