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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요망한 구원자 (46)화 (46/123)

46화

“저게 뭐예요?”

샤로니아의 눈이 동그래진 것을 본 키언이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샤론, 널 위해 준비했어. 네가 무도회에 참석한다는 사실을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더 많이 준비할 수 있었을 텐데.”

더 준비할 수 있었을 거라고요? 한눈에 개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상자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뭐가 이렇게 많아요?”

샤로니아의 말을 들은 키언은 그게 무슨 말이냐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많긴, 턱없이 부족하지.”

그의 숫자 개념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샤로니아가 반박할 기운도 잃은 채 그의 손에 이끌려 상자를 열어 보았다.

“자, 맘에 드는 걸로 골라 봐.”

그가 상자를 열 때마다 티아라, 부채, 신발, 손수건 따위가 종류별로 끝도 없이 나왔다.

“왜? 마음에 드는 게 없어?”

“없긴요!”

샤로니아가 화들짝 놀라며 손이 가는 대로 물건을 집어 들었다. 안 그러면 수도 내의 모든 가게가 텅텅 빌 때까지 물건을 사들일 기세였으니까.

“이건 하나밖에 없는 거라서 고르라고 못 하겠네.”

그러면서 그가 그녀의 목에 목걸이 하나를 채워 주었다.

목덜미에 닿는 그의 숨결에 샤로니아는 잠시 숨 쉬는 방법을 잊은 사람처럼 호흡을 멈췄다.

“반지를 새로 맞추는 대신 주문한 거야.”

큼지막한 블루 다이아몬드가 박힌 목걸이였다. 반지와 세트로 제작된 목걸이가 샤로니아의 가녀린 목 위에서 영롱한 빛을 발했다.

“폐하, 이건 너무…….”

샤로니아가 말을 다 맺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이건 너무 과분했다. 화려한 세공과 문양을 따라 자잘하게 박힌 다이아몬드 개수만 보더라도 얼마나 귀하고 값진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이건 너무, 구식인가?”

좀 더 화려했어야 했나? 키언이 턱을 쓰다듬으며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을 본 샤로니아가 파드득 어깨를 떨었다.

“아니에요! 너무 과분하다고요.”

“그럴 리가.”

키언이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겨 거울 앞에 세웠다.

“이것 봐. 이렇게 잘 어울리는데 과분하다고? 이건 널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누가 뭐래도 네 것이야.”

키언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모아 한쪽 어깨 너머로 넘겼다. 그리고 훤히 드러난 목덜미에 깊게 입을 맞췄다.

발끝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전율에 샤로니아의 표정이 흔들렸다. 불덩이 같은 입술은 지워지지 않는 감각을 남긴다.

“기껍게 받아 줘.”

그가 속살거리듯 말하며 다시 그녀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목걸이를 기껍게 받아달라는 것인지, 그를 기껍게 받아달라는 것인지, 아니면 둘 다를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의 접촉에 잠시 머리가 멍해진 샤로니아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거부할 어떤 마음도 들지 않게 그의 접촉이 점점 더 짙어졌다.

“좋아, 다행이군.”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속눈썹을 파르르 떠는 샤로니아의 모습을 거울을 통해 바라본 키언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덧그렸다.

* * *

“좀 더, 좀 더 당기지 못해?”

클리오라의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하녀가 식은땀을 흘리며 코르셋 끈을 잡아당겼다.

저렇게 허리를 옥죄면 몸에 무리가 갈 것인데. 그런 생각이 강하게 들었지만, 하녀는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저녁에 있을 황실 무도회 준비로 지금 디센베르 후작가는 거의 비상사태였다.

얼마 전에 양녀로 들어와 당당히 저택 한 편을 차지한 클리오라는 원래 후작가의 주인이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하녀들도 제대로 교육을 받아야 한다며 교육을 빙자한 가혹한 업무와 징벌이 반복되었던 터라 아무도 그녀 앞에서 반박하지 못했다.

“몇 번이나 말했잖아. 피부 톤이 화사하게 보여야 한다고. 이따위로 할 거야?”

화장을 하던 하녀가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또 어떤 벌을 받게 될지 모르니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긴장감이 팽팽하게 맴돌 때였다.

“아가씨, 신전의 카티르께서 찾아오셨습니다.”

하녀 하나가 전하는 말에 클리오라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여기까지 직접 오실 줄은 몰랐는데. 응접실로 모시도록 해.”

클리오라가 서둘러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방을 나섰다.

응접실에 들어서자 마치 자기 집인 양 여유롭게 앉아 있는 마구스가 보였다. 클리오라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입술을 비죽 올리고는 대뜸 물었다.

“여기까진 어쩐 일이세요?”

꽤 당돌하게 질문하는 클리오라를 마구스가 빤히 바라보았다.

“성질 좀 죽이라고 했지?”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브론즈색 눈동자에는 아무런 감정이 보이지 않았다.

“제 성질이 어때서요?”

클리오라가 오만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는 그녀의 성정을 잘 알았던 마구스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조금만 더 진중했더라면 진즉에 불러들였을 것이다. 뼛속까지 오만한 태도는 잘 포장하면 자신감이 될 수도 있었지만, 자칫 잘못하면 어리석은 치기가 되어 일을 그르칠 수도 있다.

클리오라가 가진 능력을 이제껏 묵혀 두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는데, 사람은 변하지 않는 건가. 뭐 어찌 되었든 마구스는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일을 성사시키면 그만이었기에 잔소리는 이쯤에서 그만두기로 했다.

“마력은 전부 회복이 된 건가?”

“흐응, 그게 알고 싶어서 온 거였구나. 어디, 보여 드려요?”

클리오라가 씨익 웃으며 손바닥에 마력을 응축시켜 작은 구를 만들어 보였다.

“확인했으니 됐다. 힘을 아끼도록 해. 이런 조잡한 기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한 힘이 필요하니까.”

“쳇, 재미없기는.”

마구스가 싸늘하게 일갈하자 클리오라가 입을 비쭉거리며 마력을 흩어 버렸다.

“명심해. 내가 네 목숨 줄을 쥐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야.”

“…….”

 클리오라가 입을 굳게 다문 채 그를 노려보았다. 그래, 그 목숨 줄이 개 목사리처럼 네 손에 쥐여 있지. 분노로 인해 속이 들끓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제 신세가 더 미칠 것 같았다.

“이제야 머리가 좀 돌아가는 것 같구나.”

자리에서 일어선 마구스가 클리오라의 뺨을 느리게 쓸었다. 마치 벌레가 기어가는 것처럼 소름 돋는 느낌이었다.

“주제 파악을 하는 것은 언제나 현명한 일이란다.”

제 할 일을 다 끝냈다는 듯이 그 말을 남겨 놓고 나가는 마구스를 보며 클리오라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황후가 되면 내가 가만히 있을 줄 알아?’

무슨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것이다. 독기가 맺힌 클리오라의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 * *

“이게 다 뭐예요?”

키언이 시종들을 시켜 옮겨 놓은 상자들을 바라보면서 엘런이 멍하게 물었다.

“이렇게 자리를 많이 차지하는데 어떻게 준비를 해요?”

이멜다가 상자에 치여 도무지 뭘 할 수가 없다며 투덜거렸다.

“좀 많긴 하지…….”

샤로니아가 어색하게 웃었다. 황제의 침실은 드넓기 때문에 공간이 부족하지 않아 몰랐었는데, 자신의 침실로 상자들을 옮겨 놓자 공간이 눈에 띄게 협소해졌다.

“괜찮아요. 어떤 조건에서도 최상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어요. 우린 프로니까요!”

이멜다가 손뼉을 짝짝 치며 기합을 넣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엘런까지 덩달아 기운을 받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까지 애쓸 필요는 없어.”

샤로니아가 부담스러운 눈빛을 보내자 이멜다가 콧김을 내뿜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다른 무도회도 아니고, 황실 무도회예요! 최고로 돋보이는 게 당연하잖아요!”

그게 왜 당연한 거냐고 차마 묻지 못한 샤로니아가 끙,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런 의미에서, 짜잔! 이런 날을 위해서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이에요!”

이멜다가 눈이 번쩍 뜨일 만큼 화려한 드레스를 꺼내놓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걸 언제 또…….”

샤로니아가 놀라서 눈을 껌벅였다.

“이 드레스는 최초로 빚지지 않고 만든 거랍니다!”

이멜다와 엘런이 서로 꺅꺅거리며 손을 마주 잡았다. 황제에게 진 빚을 다 갚은 것이 꽤 감격스러웠나 보다.

“황제 폐하께서 보내 주신 것 중에 그래도 쓸 만한 것들이 꽤 있어서 다행이지 뭐예요.”

언제 상자 안을 다 들여다본 것인지, 이멜다와 엘런이 필요한 것들을 쏙쏙 뽑아내어 앞에 진열하기 시작했다.

“자, 저희만 믿으세요.”

지나치게 기합이 들어간 그녀들을 보며 샤로니아가 입꼬리를 떨며 어색하게 웃었다.

해가 지자 본궁의 커다란 홀로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기 시작했다.

대낮처럼 환하게 불을 밝힌 황궁은 그 어느 때보다 눈부신 자태를 과시했다. 커다란 샹들리에에서는 빛이 쏟아져 내렸고, 무도회를 위해 새로 단 커튼과 테이블을 장식한 꽃과 식기까지 빛나지 않는 게 없었다.

그리고 그 빛나는 홀의 가장 상석에는 그 모든 것보다 더욱 빛나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

반짝거리는 은발과 사람을 매혹시키는 금빛 찬란한 눈동자에 수려한 이목구비를 가진 남자는 이 세상에서 황제라는 칭호가 가장 잘 어울릴 법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아쉬운 것은 딱 한 가지, 그에게서 풍기는 살벌한 기운만 아니었다면 모든 것이 완벽했다.

“저분이 황제 폐하시구나.”

홀에 들어선 영애 중에 그를 흘끔거리지 않은 이는 없었다. 여기저기서 보내오는 시선에 얼굴이 따끔거릴 정도였지만 키언은 팔걸이에 몸을 기댄 채 무심한 표정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폐하, 이번 시즌의 데뷔탕트들입니다.”

테오르가 귀띔하는 말에 그제야 키언의 시선이 제 앞에 나란히 선 영애들을 향했다.

“바르칼라 공작의 따님이신 에일린 바르칼라 영애이십니다.”

테오르의 소개를 받은 에일린이 한 발짝 앞으로 나와 무릎을 굽혀 예를 표했다.

“디센베르 후작의 따님이신 클리오라 디센베르 영애이십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클리오라도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렸다.

“릴리안 백작의 따님이신 아르미네 릴리안 영애이십니다.”

아르미네도 격식을 따라 인사를 했다. 그 후로 두 명의 영애가 더 소개되었다.

공교롭게도 황후 후보자들 모두가 이번 시즌의 데뷔탕트들이었다. 각 가문에서 지켜보는 시선들이 아주 잘 느껴져서 키언은 슬쩍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래봤자 아무 소득도 없을 텐데. 속마음을 감춘 키언이 데뷔탕트들의 인사에 화답하듯 입을 열었다.

“그렇군. 다들 축하하네. 준비된 연회를 마음껏 즐기도록 하게.”

말투는 정중했으나 그게 다였다. 지나치게 짤막한 인사에 다들 어이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설마, 그게 다야?’

교차되는 눈빛들이 모두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나한테 제일 먼저 춤을 청하실 거야.’

에일린은 기대감에 부푼 얼굴로 키언을 바라보았다. 작위가 가장 높은 자신이 황제와 첫 번째 춤을 추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키언은 지나치게 강렬한 눈빛을 보내는 에일린을 보며 피곤한 듯 얼굴을 쓸어 올렸다. 보랏빛 머리에 붉은 눈동자를 지닌 그녀는 자신의 외모만큼이나 현란한 색상의 붉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아마 자신의 눈동자 색과 잘 어울린다는 판단하에 의상을 결정한 것일 테지만 데뷔탕트가 입기엔 굉장히 노후한 느낌이었다.

“아직인가?”

키언이 중얼거렸다. 사실 그의 신경은 데뷔탕트들에게가 아니라 온통 입구 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 오매불망 샤로니아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의 바람이 통했는지 시종이 큰 목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샤로니아 파르비즈 성녀께서 드십니다!”

키언이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선 것을 본 사람들의 시선이 샤로니아에게 집중되었다.

베이지색 바탕에 금실로 문양이 수놓아진 드레스는 루비와 비취, 진주 같은 장식들을 덧달아 화려하면서도 단아한 느낌을 주었다.

거기에 큼지막한 블루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더하자 고급스러우면서도 신비한 느낌이 생생했다.

처음에는 블루 다이아몬드 목걸이에 시선을 빼앗겼다가 나중에는 다이아몬드보다 더 빛나는 그녀의 눈동자에 빠져 버리는 듯한 착각이 일어났다.

먼저 연회장에 와 있던 루카스는 그 모습을 아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제가 봐도 제 동생은 너무 예뻤다.

하지만 단지 예쁜 걸로 끝나서는 안 된다. 절대로 오늘의 데뷔탕트들에게 밀리지 않게 할 거다.

루카스는 그것이 데뷔탕트를 치르지 못한 샤로니아를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마력을 조금 동원했다. 그가 손을 살짝 흔들자 반짝거리는 빛무리가 샤로니아의 뒤를 따랐다.

“내 눈이 이상한 건가요? 성녀의 몸에서 빛이 나는 것 같은데요?”

“나만 보이는 줄 알았더니 아니었나 보네요.”

사람들의 수런거리는 소리가 점점 심해질 때였다.

“저런 걸 후광이라고 하는 거야.”

누군가 한 말에 홀이 이전보다 더 시끄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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