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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요망한 구원자 (45)화 (45/123)

45화

“하필이면…….”

리비어가 입술을 잘근 깨물며 얼굴을 감싸 쥐었다.

‘거시기가 거시기한 병’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그런 병에 걸린 남자와 밤을 보내고 싶진 않았다. 그것이 아무리 최고 권력을 가진 카티르라고 해도 말이다.

“오늘은 응할 수 없다고 전해.”

리비어가 대범하게 말했다. 신녀들이 걱정스러운 눈빛을 서로 주고받았다.

“하지만 신녀장님, 카티르의 명을 거역했다간…….”

신녀 하나가 꺼낸 말에 리비어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멍청하긴. 그냥 거절하라는 게 아니야. 달거리 중이라고 핑계를 대면 되잖아.”

“아, 예, 신녀장님.”

“그렇지 않니? 하데스?”

신녀에게 매섭게 쏘아붙인 리비어가 언제 그랬냐는 듯 살갑게 웃으며 마물 하데스의 목을 쓰다듬었다.

그 괴리감에 지켜보던 신녀들 모두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 * *

헤이든 델라크 백작의 카리스마는 거의 의상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녀는 평상시에 바지를 입고 검을 찼다. 상의에 붙은 수많은 훈장은 그녀가 세운 공이 크다는 것을 알려 줌과 동시에 그녀의 검술이 뛰어나다는 방증이었다.

그녀가 붉은색 머리카락을 늘어트리고 정복을 입은 채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뒤따랐다. 그녀는 성별을 뛰어넘어 남녀 모두에게서 멋있다는 말을 자주 듣곤 했다.

그녀는 가주로서의 업무와 기사로서 해야 할 일에 치여 사교 활동은 거의 하지 않고 있었지만 사실 그건 핑계에 가까웠다. 그녀는 사교계 특유의 말로 힘겨루기보단, 몸으로 힘겨루기를 하는 것을 훨씬 더 좋아했으니까.

한마디로 사교계란 그녀에게 피곤 그 자체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델라크 가문의 원로들이 그녀가 이번 황실 무도회에 꼭 참석해야 한다고 난리를 부린 것이다.

내용의 골자는 뻔했다. 언제까지 결혼도 안 하고 살 것이냐, 그러고 다니면 늙어 죽을 때까지 평생 독신일 거다, 후계자가 있어야 한다……. 뭐 그런 종류의 잔소리가 대부분이었다.

‘망할 놈의 영감탱이들…….’

헤이든은 씩씩거리며 하트론 궁으로 들어섰다. 오랜 실랑이 끝에 말싸움에서 결국 패하고 말았다.

‘검술 싸움이었으면 내가 분명히 이겼을 텐데.’

노련하고 경험이 많은 원로들을 말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원래부터 결론이 정해진 싸움이었지만 헤이든은 그래도 화가 가라앉지 않는지 발을 쿵쾅거리며 걸었다.

‘좋아요, 그깟 황실 무도회 참석하면 될 거 아니에요!’

‘설마 그런 차림으로 가겠다는 건 아니겠지요?’

‘이게 뭐 어때서요?’

‘델라크 가문의 수치입니다!’

원로들이 얼마나 노발대발했는지 아직도 귀가 왕왕거리는 것 같다.

그녀 입장에선 무도회에 참석하는 것만 해도 큰일인데, 누가 봐도 여자라는 것을 알 수 있게끔 드레스를 입고 치장을 해야 한다는 조건이 따라붙었다.

‘그럴 거면 미리 얘기해서 준비할 시간이라도 넉넉하게 주든가.’

황실 무도회가 당장 내일 앞으로 다가왔기에 준비할 시간이 부족했다. 그래서 헤이든은 이멜다에게 부탁해서 드레스를 수선해 입으려고 하트론 궁에 들른 것이었다.

“어서 오세요.”

기별을 받은 샤로니아와 이멜다가 웃으며 그녀를 맞아 주었다.

“드레스를 입었던 때가 기억나지 않아요.”

헤이든이 툴툴거리며 털썩 소리가 나게 의자에 앉았다. 그 모습이 기품 있는 귀족 여성과는 아주 거리가 멀었기에 샤로니아와 이멜다는 서로 마주 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아, 무도회장에서 치마를 밟고 꼴사납게 넘어지면 어떡하죠?”

헤이든은 자기 자신을 너무 잘 알았다. 평상시 걸음걸이대로 드레스를 입고 다닌다면 분명히 사달이 나고 말 것이다.

한숨을 푹 내쉬는 헤이든을 보고 샤로니아도 이멜다도 차마 그런 일은 없을 거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걱정되시면 연습 삼아 산책이라도 다녀오시는 게 어떨까요?”

이멜다가 갑자기 묘안이 떠오른 것처럼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것도 괜찮은 방법 같네요.”

샤로니아가 옆에서 거들자 헤이든이 심각하게 눈썹을 꿈틀거렸다. 드레스 따위 입고 싶지 않은 마음과 그래도 창피를 당하지 않으려면 입어야 한다는 내적 갈등이 강하게 충돌했던 탓이었다.

“어휴, 이게 도대체 뭐 하는 짓인지……. 알겠어요. 그렇게 할게요.”

헤이든이 체념한 듯 한숨을 길게 내쉬며 답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걸까. 자신의 신세가 한없이 기구하게 느껴졌다.

“자, 그럼 금방 준비시켜 드릴게요.”

어느새 나타난 엘런까지 합세해서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몸매가 볼륨이 있으시네요.”

“머릿결도 좋으시고요.”

이멜다와 엘런이 재잘거리며 환복을 돕고 머리 모양을 만져 주었다. 샤로니아가 자신의 액세서리를 기꺼이 빌려주겠다고 하자, 헤이든이 질색하며 말했다.

“나 좀 살려 줘요.”

“이런 걸로 엄살을 떠시다니 의외네요.”

결국 헤이든은 액세서리까지 착용한, 완벽한 모습으로 준비를 마쳤다.

“완전 딴 사람 같아요.”

샤로니아마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고 헤이든까지 놀랐으니 변신 수준을 짐작할 만했다.

“저희는 내일 입으실 드레스를 손보고 있을 테니, 두 분은 오붓하게 산책 다녀오세요.”

이멜다가 방긋 웃으며 하는 말에 헤이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궁 정원을 향해 나선 샤로니아와 헤이든은 풍경을 감상하며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루하르 제국은 겨울을 제외하고는 거의 날씨가 일정했다.

항상 후텁지근한 날씨였지만 그래도 오전에는 선선한 바람이 불곤 했는데 지금이 딱 그런 때였다.

“델라크 경과 함께 산책하는 것도 참 좋네요.”

샤로니아가 ‘경’이라는 호칭에 맞지 않는 헤이든의 복장을 보며 입매를 가리고 웃었다.

하지만 헤이든은 걸음걸이를 신경 쓰느라 샤로니아가 웃는 것을 보고 뭐라 할 처지가 못 되었다.

“여자들은 정말 대단한 존재예요. 어떻게 이런 걸 입고 빠르게 걸을 수 있는 거죠?”

다리에 척척 감기는 치맛자락을 부여잡은 헤이든이 인상을 찡그렸다.

“익숙해지면 괜찮아요. 그리고 드레스를 입은 채 뛸 일은 거의 없으니까요.”

샤로니아가 하는 말을 들은 헤이든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여자들이 검술을 못 하는 이유는 다 이런 의상 탓이라는 이상한 결론을 내리면서 말이다.

헤이든이 그나마 제대로 된 걸음을 내딛게 되었을 때였다.

“샤로온!”

맞은편에서 루카스가 손을 붕붕 흔들며 다가왔다. 마치 그의 등 뒤로 꼬리가 살랑거리는 느낌이 들었기에 샤로니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여기서 만나다니 너무 반갑네.”

“어제도 봤잖아.”

오랜만에 만난 사람처럼 반가워하는 그의 모습에 샤로니아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답했다.

“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처음 보는 거잖아.”

오늘 처음 보는 거라고 해도 아직 오전일 뿐이었다. 루카스의 못 말리는 태도에 샤로니아는 조금 창피해졌다.

“인사해, 여기는 헤이든 델라크 백작님이셔. 제 오빠예요.”

샤로니아는 루카스가 더 이상 푼수 같은 말을 못 하게 하려고 서둘러 인사를 시켰다.

“응? 오빠가 있었어요?”

루카스를 바라보는 헤이든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러고 보니 둘은 눈동자 색이 다를 뿐, 머리 색이나 분위기가 많이 닮아 있었다.

“루카스…… 파르비즈입니다.”

그가 또 이름을 얘기하며 실수할까 봐 샤로니아의 눈꼬리가 뾰족해졌다. 다행히 이번엔 실수하지 않았다.

루카스가 의기양양하게 싱긋 웃자 짙은 보랏빛 눈동자가 예쁘게 휘어졌다.

자신을 바라보며 이렇게 눈웃음치는 남자를 처음 만난 헤이든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녀는 자신을 동료나 상사로 바라보는 시선은 많이 받아봤으나, 이렇게 사사로운 느낌의 시선은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숙녀분들이 산책하시는데 제가 좀 끼어도 되겠습니까?”

말투는 정중했지만 이 말은 그냥 돌아갈 생각이 전혀 없다는 뜻이었다.

“네, 뭐, 괜찮아요.”

헤이든이 괜찮다고 하는데 쫓아 보낼 수 없어서 샤로니아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보통은 이럴 때 빠져 주는 게 예의이건만. 하지만 눈치를 저 멀리 던져 버린 루카스는 지금 이 순간 그냥 동생 껌딱지일 뿐이었다.

썩 조화롭지 못한 산책이 시작되었다.

“내일 열리는 황실 무도회에 참석하는 거지?”

루카스가 샤로니아를 향해 물었다.

“글쎄, 나야 뭐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이니까.”

그녀가 모호하게 대답하자 루카스가 목소리를 높였다.

“어째서?”

“어째서라니? 내일은 데뷔탕트를 하는 영애들이 주인공이지, 성녀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텐데.”

샤로니아의 대답을 들은 헤이든이 끼어들었다.

“나도 가는데, 성녀님이 안 가다니 말이 돼요?”

그 말을 다시 풀어서 해석하면 남자 같은 나도 이렇게 차려입고 가는데 어떻게 안 갈 수가 있냐는 말이었다.

두 쌍의 초롱초롱한 눈동자에 샤로니아가 끙, 앓는 소리를 냈다.

사실은 키언의 옆에 설 황후 후보자들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은 이유가 컸다. 질투심으로 눈이 어두워지는 것은 그녀가 바라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하루속히 세력을 키워 그녀들을 하나씩 쳐내는 것이 낫지, 아무것도 못 하고 보고만 있는 것은 성미에 맞지 않았다.

“황제가 초청하지 않았어?”

루카스가 열을 올리며 묻는 말에 샤로니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왜 불똥이 그쪽으로 튀는 건지 모르겠다.

“아냐, 황제 폐하께서는 몇 번이나 오라고 하셨어.”

몇 번만 되겠는가. 꼭 와야 한다며 거의 애원을 했었는데.

“그럼, 황제 폐하의 초청을 거부하겠다는 건가요?”

헤이든이 합세해서 질문을 보탰다. 이 둘, 보기보다 죽이 잘 맞네. 샤로니아가 미간을 찡그리며 순식간에 한편이 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알겠어요, 참석할게요.”

샤로니아가 더 이상 거절할 명분을 찾지 못하고 대답했다. 아마 여기서 반대 의견을 더 말했다간 엄청나게 피곤해질 것이 뻔했다.

원하는 대답을 얻은 두 사람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쿡, 웃음을 터트렸다.

하아, 이건 뭐지……. 샤로니아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왠지 자신이 산책에 끼어든 방해물이 된 기분이다.

설상가상으로 드레스가 익숙하지 않은 헤이든이 발을 삐끗했다.

“조심하세요.”

“아, 감사해요.”

루카스가 아주 멋진 신사처럼 헤이든을 붙잡아 주었다. 헤이든이 생전 처음 보는 표정으로 쑥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허어어, 안 본 눈 삽니다. 샤로니아가 못 볼 꼴을 본 사람처럼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아침 산책이 원래 이렇게 불편한 것이었나. 샤로니아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해가 지고 나자 샤로니아는 황제의 침실로 향했다. 티라미수에 반지를 숨기느라 깜짝 놀라던 전날과는 달리 오늘은 그가 아주 밝게 웃으며 그녀를 맞았다.

“무슨 일 있어요?”

샤로니아가 한족 눈썹을 치켜세우며 키언의 얼굴을 살폈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닌 이상 저토록 해사하게 웃으며 자신을 맞을 리가 없는데.

“무도회에 참석하기로 했다면서?”

그의 말에 샤로니아가 헉, 숨을 들이마셨다. 누가 그사이에 황제에게 사실을 고해바친 것일까.

샤로니아가 용의자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에게 알리지 않고 얼굴만 잠깐 비추고 가려던 것이었는데 뭔가 일이 점점 틀어지고 있었다.

“아주 현명한 결정이야. 네가 안 오면 짐도 불참하려고 했거든.”

“주최자가 참석하지 않으면 어떡해요!”

샤로니아가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한번 마음을 먹으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다.

“네가 없는데 무슨 재미로 무도회를 가.”

재미있으라고 여는 무도회가 아니었다. 황제의 역할은 사교 시즌을 알리고 데뷔탕트를 치르는 귀족 영애들을 만나 격언을 해 주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이번 사교 시즌은 황후 자리를 놓고 치열한 접전이 예상되는 만큼 정말 재미와는 무관할 예정이었다.

“제가 없어도 가셔야 할 자리예요.”

“매정하기는.”

샤로니아가 단호하게 말하건 말건 키언의 얼굴에는 미소가 끊어지지 않았다.

자신이 무도회에 참석하는 것이 저 정도로 기쁘다고? 샤로니아가 미심쩍은 듯이 두 눈을 좁혔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건지 말씀해 보세요.”

샤로니아가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했다. 그가 무슨 생각인 건지 확실히 알아야겠다.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를 보고 키언이 쿡, 웃음을 터트렸다.

“무슨 생각이긴. 지금 내 머릿속엔 너를 제국 최고의 여자로 만들 생각밖엔 없거든.”

키언이 샤로니아의 손목을 잡고 침실 한편으로 갔다. 거기에는 수많은 상자가 높이 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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