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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요망한 구원자 (44)화 (44/123)

44화

오늘 하루 종일 단것에 시달린 샤로니아는 황제의 태도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황후 내정자에 대한 것을 물었는데 계속 티라미수 얘기만 하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좋아요. 그렇게 권하시는데 제가 어떻게 거절하겠어요?”

뾰족하게 대꾸한 샤로니아가 티라미수 조각에 있는 힘껏 포크를 찔러 넣었다.

콰직, 이상한 소리가 났다.

티라미수는 디저트 중에서도 부드럽기가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다. 그러니 저토록 둔탁한 소리가 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응? 이상하네?”

샤로니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얼굴이 극도로 창백하게 질린 키언과 눈이 마주쳤다.

“표정이 왜 그러세요?”

샤로니아가 묻는 말에 키언은 애써 표정을 다잡았다. 콰직, 울렸던 소리로 봤을 때 굉장히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그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괜찮을 수도 있는 거잖아. 소리만 요란할 뿐 자신이 야심차게 준비한 ‘그것’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온갖 희망적인 생각들을 나열하며 샤로니아에게 말했다.

“짐이 왜 그런지는 티라미수 안을 살펴보면 알게 될 거야.”

“응? 이 안을요?”

샤로니아가 의뭉스럽게 물은 뒤 손에 든 포크로 티라미수 안을 헤집었다.

“어? 뭐가 있네요?”

불빛에 비친 무언가가 반짝하고 빛났다. 샤로니아가 포크를 사용해서 그것을 달랑 들어 올렸다.

“음, 이건…… 반지인가요?”

“멀쩡하다면 아마 그럴 거야.”

티라미수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던 탓에 아직 형체가 명확하게 보이지 않았다. 키언이 반지를 가져와 손수건으로 꼼꼼히 닦았다.

내가 미쳤지. 그냥 폼나게 케이스에 넣어서 줄걸. 반지를 닦는 내내 키언이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황후가 되어 달라고 말은 해 놓고 반지 하나 끼워 주지 못한 게 내내 마음에 걸렸었다. 그래서 야심차게 준비한 이벤트였는데 이렇게 될 줄이야.

“괜찮아요?”

샤로니아가 키언의 표정을 살폈다. 반지가 괜찮냐고 묻는 건지, 아니면 자신을 향해 괜찮냐고 묻는 건지 모르겠다.

“괜찮아, 다시 맞추면 되지…….”

키언이 쓰게 웃으며 길쭉하게 흠이 생긴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다시 맞출 필요 없어요. 그냥 이대로 낄게요.”

샤로니아가 고개를 흔들며 손을 내밀었다.

“아니야, 새로 맞추면 돼. 망가진 걸 줄 수는 없어.” 

키언이 단호하게 말했지만 샤로니아는 물러나지 않았다.

“제 손을 부끄럽게 하실 거예요?”

손을 내민 채 기다리는 샤로니아를 보고 키언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에게 완벽한 것을 주어도 모자란 기분인데, 이토록 흠집이 깊게 난 반지를 어떻게 끼워 줄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녀가 싱긋 웃으며 손을 흔들자 그도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곧 다른 반지를 추가로 주문하지.”

“아니요, 이걸로 충분해요.”

뭐가 좋은지 샤로니아가 반지 낀 손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웃었다.

“예뻐요. 이런 걸 준비하실 줄 몰랐는데, 감사해요.”

커다란 블루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는 누가 봐도 그녀를 생각해서 만든 것이었다. 제국 내에 블루 다이아몬드가 귀했기에 그 희소성을 생각한다면 엄청난 가치를 지닌 반지였다.

“네 눈동자 색을 닮아서 준비한 거야.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안 되겠어. 다시 만들어서 줄게.”

키언은 반지에 난 흠집이 마치 제 가슴에 생긴 것처럼 미간을 찡그렸다.

“정말 괜찮아요. 이걸 볼 때마다 두고두고 오늘 밤을 생각할게요. 폐하께서 저를 생각해 주셨던 마음을요.”

“너는 정말…….”

키언이 못 말리겠다는 듯이 한숨을 내쉰 뒤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제 탓도 있는걸요. 이걸 볼 때마다 웃음이 날 것 같아요.”

샤로니아가 정말로 행복한 미소를 지었기에 키언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이리 와.”

키언이 두 팔을 벌리자 샤로니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품에 안겼다.

“너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짐의 옆에서 행복하기만 했으면 좋겠어.”

키언이 진심이 담긴 목소리로 말하며 그녀의 등을 느리게 쓸었다.

“지금도 충분히 행복해요. 하지만 신전이 파멸하는 모습을 보면 더 행복할 거예요.”

그녀가 무시무시한 소리를 말갛게 웃으며 하는 것을 보고 키언이 피식 웃었다.

“그래, 그래서 샤론 네가 좋아.”

키언이 그녀의 뺨에 촉, 입을 맞추었다.

그녀는 항상 꾸미거나 숨기는 것 없이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키언은 그것이 너무 편했다.

겹겹이 암막을 치고 속을 감춘 채 접근하는 사람들을 수도 없이 대하다 보면 목적이 뚜렷한 것이 오히려 더 편하게 느껴지는 법이었다.

더군다나 그녀의 욕망은 정의롭기까지 하다. 그러니 좋아하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다.

“아참, 아까 하던 얘기를 안 끝냈잖아요. 황후 후보자들의 이름을 가르쳐 주셔야죠.”

“아, 그랬지. 에일린 바르칼라, 아르미네 릴리안, 클리오라 디센베르…… 일단은 그 정도가 되겠군. 디센베르 후작가는 신전 측에서 미는 쪽이니 특별히 주의하는 게 좋을 거야.”

샤로니아는 키언이 말하는 이름들을 새겨들었다. 모두 다 제국 내 영향력이 어마어마한 쟁쟁한 가문들이다. 그리고 외모 또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예쁘고 도도한 아가씨들이다.

그녀의 표정이 진지해진 것을 본 키언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분명히 밝혀 두는데, 난 그 영애들에게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어.”

키언의 단호한 태도에 샤로니아가 쿡,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을 안심시키려는 그의 배려가 기꺼워서 샤로니아는 짐짓 도도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말했다.

“네, 네, 믿어드릴게요.”

키언은 샤로니아에게 어떻게든 신뢰감을 심어 주고 싶어 안달 난 사람처럼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진짜라니까 그러네.”

“믿어 드린다니까요.”

몇 차례 말이 오가며 실랑이를 하다 보니 서로의 몸이 지나치게 가까워져 있었다.

“정말이야. 짐은 너밖에 안 보이거든.”

키언이 그녀의 입술을 깊게 베어 물었다.

샤로니아는 알고 있다고 답하고 싶었지만 키언이 지나치게 깊이 파고드는 바람에 더 이상 대답을 할 수 없었다.

* * *

의원이 다녀간 뒤에도 아르미네의 병세가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릴리안 백작 부인의 마음은 타들어 갔다.

‘뭐 좋은 방법이 없을까?’

시간이 약이었지만 그녀에겐 시간이 부족한 것이 문제였다. 아르미네가 제대로 먹지 못하자 맞춰놓은 드레스가 헐렁해졌다.

데뷔탕트에 헐렁한 드레스를 입고 나갔다간 비웃음을 살 것이 뻔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당장 디자이너를 불러들여 드레스를 수선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사교 시즌을 맞은 수도의 유명 디자이너들은 여기저기 고용되어 있어서 부른다고 올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안 되면 민간요법이라도…….’

그녀는 제국 내에 전해져 내려오는 민간요법들을 머릿속으로 나열해 보았다. 그 정도로 조급했다. 그러다 문득 어떤 기억 하나가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아!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그녀는 혼잣말을 내뱉은 뒤 급하게 방으로 들어가 서랍을 열었다.

“찾았다!”

릴리안 백작 부인이 서랍 안에서 꺼낸 것은 바르칼라 공작저에서 열린 무도회 때 샤로니아에게 받은 성수였다.

다른 부인들이 효험이 있다며 호들갑을 떨 때에도 그녀는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서랍 속에 던져 놓았던 물건이었다.

‘이걸 마시면 나을지도 몰라…….’

릴리안 백작 부인은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아르미네의 침실로 향했다.

“좀 어떠냐?”

“어제와 별반 다르지 않으십니다.”

아르미네를 간호하고 있던 하녀가 침울하게 답했다.

“아르미네, 일어나 보렴.”

기력이 없어서 누워 있는 아르미네를 릴리안 백작 부인이 일으켜 앉혔다.

“이걸 먹으면 괜찮아질 거야.”

“그게 뭔데요?”

아르미네는 이제 약이라면 지긋지긋했다. 쓰디쓴 약을 삼키는 것도 힘들었거니와, 먹은 것이 거의 없는 속은 무언가 들어가는 즉시 반응을 나타냈다. 그게 비록 약일지라도 말이다. 잔뜩 구겨진 그녀의 미간을 보고 릴리안 백작 부인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네 처지가 뭘 가릴 때인 줄 아니?”

“하지만…….”

“일단 마셔 보거라.”

거의 강제로 릴리안 백작 부인이 아르미네에게 성수를 마시게 했다.

그래도 향긋한 민트 향이 풍겼던 까닭에 거부감이 덜했던지 아르미네가 순순히 그것을 받아 마셨다.

“어떠니?”

릴리안 백작 부인은 자신이 성급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래도 질문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음, 글쎄요……. 좋아지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아르미네가 제 상태를 파악하려는 듯이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일단 부글부글 끓던 배 속이 차츰 진정되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배 속이 좀 편안해진 것 같아요.”

“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릴리안 백작 부인이 감격에 차 외쳤다. 정말로 아르미네의 혈색이 몰라보게 좋아져 있었다.

이렇게 극적으로 낫게 된 것을 보면 신께서도 아르미네가 황후가 되길 원하고 계신 게 틀림없었다.

“너는 서둘러 성녀 측에 기별을 넣어 성수를 보내 달라고 해. 돈은 얼마든지 줄 수 있으니 구할 수 있는 수량은 다 달라고 하고.”

“예, 마님.”

릴리안 백작 부인의 지시를 받은 하녀가 빠르게 방을 빠져나갔다.

* * *

소문이란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사람들의 흥미를 자극할수록 쉽게 퍼지는 법이다.

특히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의 소문은 더욱 빠르게 번진다.

신전의 수장 마구스는 꽤 여러 가지 소문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 대한 소문들은 죄다 질이 좋지 않은 것들이었는데, 숨겨 놓은 사생아만 열 명이 넘는다든가, 취향이 변태 같다든가 하는 뭐 그런 종류의 소문들이 대부분이었다.

실제로 그가 벌인 악행을 보면 소문이 아니라 사실에 가까운 말들이었지만 누구도 거기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그랬던 신전에 이상한 소문 하나가 떠돌기 시작했다. 그것은 엘런이 샤로니아가 귓속말로 전한 말을 몇 사람에게 흘린 것이 발단이 되어 퍼져 나간 소문이었다.

사람들이 수군거릴수록 소문을 퍼트린 사람의 존재는 묘연해지고 소문만 더욱 극대화되어 떠돌게 된다.

“너 그 얘기 들었어?”

“카티르에 관련된 소문 말이야?”

“나도 들었어. 아후, 망측해라.”

“어떻게 보면 당연한 거 아니야? 밤마다 지명하는 신녀가 다른데.”

신녀들은 모이기만 하면 그 얘기로 열을 올렸다. 그리고 자신이 그의 밤 시중을 들게 될까 두려워했다.

그렇게 떠돌던 소문이 조금 늦게 신녀장 리비어의 귀에 들어갔다.

“뭐라고? 무슨 병?”

리비어가 자신의 애완동물로 삼은 마물 하데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소식을 전한 신녀가 민망해하며 목소리를 죽인 채 대답했다.

“신전 내에 이미 파다하게 깔린 소문입니다. 카티르께서 ‘거시기가 거시기한 병’에 걸리셨다고요.”

무엇을 상상했는지 그 말을 하는 신녀가 인상을 찌푸리며 어깨를 떨었다.

“무슨, 그런 해괴한…….”

리비어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멍하게 입을 벌렸다.

특별한 신체 부위에 대한 언급도 없고, 무슨 병인지 정확한 병명도 알려지지 않은 이상한 소문이었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그 말을 들으면 희한하게도 신체의 어느 한 부위에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는 상상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리비어가 얼빠진 사람처럼 멍하게 있자 하데스가 그녀의 옷자락을 물고 잡아당겼다.

“아, 미안.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느라 널 신경 쓰지 못했구나.”

리비어가 하데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며 고기 조각을 먹였다.

그것을 본 신녀가 몸을 떨며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새카만 강아지인 줄 알았던 동물이 하루가 다르게 덩치가 커지고 있었다. 동물의 번들거리는 붉은 눈을 바라볼 때면 마치 지옥을 보는 듯 오싹해지곤 했다.

그런데도 리비어는 아주 사랑스럽게 동물을 대했다. 그 동물도 리비어만 따랐기 때문에 누구도 근처에 가까이 갈 수 없었다.

그때, 다른 신녀 하나가 큰일이 난 것처럼 허둥지둥 들어와 말했다.

“신녀장님, 카, 카티르께서…….”

쉽사리 말을 잇지 못하는 신녀를 보고 리비어가 눈살을 찌푸렸다.

“카티르가 왜?”

우물쭈물하던 신녀가 언짢은 기색이 가득한 리비어의 표정을 살피며 더듬더듬 말했다.

“오늘 밤 시중을 들 자로 신녀장님을 지목하셨습니다.” 

헉, 주위의 신녀들이 입을 가리며 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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