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아르미네 릴리안. 그녀는 릴리안 백작가에서 금지옥엽으로 자라난 외동딸이었다.
“아르미네! 이게 무슨 일이니?”
외출했던 딸이 창백한 안색으로 돌아오자 릴리안 백작 부인이 목소리를 높였다.
“디저트 가게에 가셨는데, 갑자기 이러십니다.”
그녀와 함께 외출했던 하녀가 일단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릴리안 백작 부인은 하녀들에게 서둘러 약과 물을 가져오게 했다. 하녀 하나가 재바르게 다가와 물컵을 내밀자 그녀는 그것을 받아 들고 곧장 아르미네의 입가에 대 주었다.
“오, 아가. 일단 물부터 좀 마셔 보련.”
하지만 물을 한 모금 삼킨 아르미네의 표정이 괴롭게 일그러졌다.
“윽, 안 되겠어요.”
아르미네가 치맛자락을 부여잡고 화장실로 급하게 뛰어가는 것을 본 백작 부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며칠 후면 사교 시즌의 시작을 알리는 황실 무도회가 열린다. 데뷔탕트를 앞둔 영애가 배탈이 나다니!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특히 남다른 야심을 갖고 있던 릴리안 백작 부인에겐 대단히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서둘러 의원을 부르도록 해! 빨리 움직이지 못하겠니?”
신경질적인 릴리안 백작 부인의 목소리에 하녀들이 허리도 제대로 펴지 못하고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후로 아르미네는 몇 번이나 화장실을 들락날락했다. 릴리안 백작 부인은 그때마다 불안한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했고, 아르미네가 탈진한 표정으로 의자에 털썩 기대앉자 호출을 받은 의원이 부랴부랴 안으로 들어왔다.
“어서, 내 딸을 진찰해 주게.”
릴리안 백작 부인의 성정을 잘 알았던 의원은 재빨리 아르미네의 상태를 살폈다.
“완쾌되려면 얼마나 걸리겠나? 사흘 뒤가 황실 무도회인데, 그전까지는 무조건 나아야 하네.”
릴리안 백작 부인의 말에 의원은 곤란한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자신이 무슨 치유 마법사도 아니고 어떻게 배탈을 단박에 낫게 할 수 있느냔 말이다.
“최선을 다해 보겠지만 사흘 뒤까지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의원의 말에 릴리안 백작 부인이 벼락 맞은 표정을 지었다.
“어려울 수도 있다니? 절대 안 되네.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 그때까지 무조건 낫게 하게.”
명령조의 말에 의원이 헛숨을 내쉬었다. 이런 식이면 무덤 속에 장사된 사람도 살려 내라고 하겠군.
“일단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은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밖엔 없습니다.”
의원이 약을 지어 주며 부드러운 음식을 먹고 잘 쉴 것을 말하고는 돌아갔다.
의원이 가고 난 뒤에도 아르미네의 상태는 호전되기는커녕 더욱 나빠졌다. 도대체 시간마다 몇 번이나 화장실을 가는지 셀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보는 사람까지 절로 아픈 느낌이 들어 인상이 찌푸려졌다.
“윽!”
“또?”
화장실로 달려가는 딸의 모습을 보고 릴리안 백작 부인이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었다.
이번 사교 시즌을 통해 황후를 선발하겠다는 비공식적인 연락을 받았다. 지금을 놓치면 그동안 꿈꿔 왔던 모든 것들이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것이다.
“어떻게든 조치를 취해야 해…….”
릴리안 백작 부인은 애가 타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게 얼마나 좋은 기회인데, 놓칠 수는 없지.
아무것도 먹지 못해 퀭해진 아르미네를 보면서도 릴리안 백작 부인은 계속 그런 생각만 반복했다.
* * *
“넌 물의 능력을 타고난 게 틀림없어.”
루카스가 샤로니아를 바라보며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물의 능력?”
“응. 마즈다크 왕족들은 대대로 한 가지 이상의 능력을 타고나거든.”
“그러면 오빠는 무슨 능력을 타고났는데?”
“바람.”
아아, 샤로니아가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루카스가 붉은 거탑에서 바람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능력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
“나도 몰라.”
“뭐?”
샤로니아가 눈살을 찌푸리는 것을 보고 루카스가 움찔하며 손사래를 쳤다.
“개개인의 능력이 다르기 때문에 뭐라고 딱 꼬집어서 말해 줄 수가 없어.”
“흠, 그러면 오빠한테 배울 게 아무것도 없단 거네?”
샤로니아가 마치 앞으로 볼 일이 없을 것처럼 말하자 루카스가 허둥지둥 뒷말을 덧붙였다.
“능력은 스스로가 방법을 터득하는 수밖에 없지만, 마법은 가르쳐줄 수 있지.”
어떻게든 샤로니아와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루카스는 간도 쓸개도 다 빼줄 것처럼 말했다.
“그래, 그럼. 일단 마법을 사용하는 방법을 오빠에게 배워야겠어.”
샤로니아가 그렇게 대답한 뒤 창밖을 내다보았다. 요즘 황실 무도회를 준비하느라 황궁 전체가 분주했다.
하트론 궁에서도 바쁘게 왔다 갔다 하는 시종들의 모습이 아주 잘 보였다. 그것을 지켜보는 샤로니아의 마음이 복잡해졌다.
“황실 무도회 준비로 다들 바쁘구나.”
루카스가 샤로니아의 시선이 닿는 곳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러게, 며칠 있으면 황실 무도회가 열리네.”
“왜? 너도 참석하고 싶어?”
루카스는 샤로니아의 또래 여자아이들이 데뷔탕트를 생명처럼 여긴다는 것을 떠올렸다. 아마 마즈다크 왕국이 멸망하지 않았더라면 샤로니아는 누구보다 성대하게 데뷔탕트를 치렀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성대하며 행복한 데뷔탕트였을 것이라고 루카스는 장담할 수 있었다. 자신이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 주었을 테니까.
하지만 샤로니아는 데뷔탕트 따위야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그런 거 아니거든.”
샤로니아가 딱 잡아떼는 것이 더 수상쩍었다. 루카스는 동생이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다고 말하지 못하고 참기만 해 왔다는 것이 안쓰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너는 이 오빠만 믿어.”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루카스가 어색하게 웃으며 얼버무렸다.
샤로니아는 ‘나의 황후가 되어 줘’라고 말하던 키언의 음성을 떠올리느라 루카스의 말을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 * *
“찾아냈나?”
키언이 자신의 앞에 부복한 사제 데니얼을 향해 물었다.
“말씀하신 대로 신전 지하로 통하는 비밀 통로가 있었습니다.”
“정말 마물이 사육되고 있던가?”
키언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데니얼의 얼굴을 응시하며 물었다. 그는 얼마 전 만났던 신녀장 리비어의 살기 어린 시선을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그는 전장을 누비며 그런 시선을 수도 없이 봐왔다. 그런 눈빛은 그냥 두면 항상 뒤탈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는 수하를 보내 리비어의 뒤를 미행하게 했다. 그랬는데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신전 지하에 마물이 사육되고 있다는 믿을 수 없는 보고였다.
키언은 즉시 이중 첩자로 신전에 둔 사제 데니얼을 호출해서 그 진위 여부를 알아보게 했다.
“그렇습니다, 폐하. 정말로 신전 지하에 마물이 사육되고 있었습니다.”
데니얼은 지하에서 본 끔찍한 광경을 떠올리며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마물은 생명체라기보다 신전의 병기로서 사육되고 있었다.
많은 개체를 얻어 내기 위해 인위적으로 짝짓기를 시키는 등 사람의 탈을 쓰고 어떻게 저런 일을 저지를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의 일들이 그곳에선 버젓이 자행되고 있었다.
데니얼은 인간의 악함이 과연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두려웠다.
“수고했네. 지시가 있을 때까지는 지켜보기만 해.”
“예, 폐하. 명을 따르겠습니다.”
데니얼이 나가자 키언은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서 생각에 잠겼다.
신의 뜻을 전하는 신전이 공식적으로 ‘악’으로 규정한 마물을 몰래 사육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어떻게 될까.
마구스가 아무리 간교하고 수완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키언은 그것을 이용해서 신전이 내세운 이를 황후 자리에 앉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이를 황후로 만들 작정이었다.
“반드시 그렇게 만들고 말겠어.”
마구스를 생각하는 키언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 * *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목욕을 하고 나온 샤로니아의 머리를 만져 주며 엘런이 물었다. 오늘따라 그녀는 말수가 적고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는 시간이 잦았다.
걱정이 한가득 묻어나는 엘런의 얼굴을 보며 샤로니아가 싱긋 웃었다.
“그냥 이것저것 생각할 게 많아서. 다 된 거야?”
“네, 오늘은 다른 날보다 좀 더 편한 스타일로 묶어 봤어요.”
샤로니아는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엘런이 만져 준 스타일은 뭐든 괜찮아.”
한쪽으로 헐렁하게 땋아 내린 머리 모양은 오늘따라 가녀린 이미지를 더욱 돋보이게 해 주었다.
“바로 가시겠어요?”
일어서는 샤로니아를 보고 엘런이 급하게 로브를 꺼내 들었다.
“응, 아무래도 오늘은 폐하와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아서.”
로브에 팔을 끼워 넣은 샤로니아가 갑자기 엘런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왜, 왜 그러세요?”
당황한 엘런이 얼굴에 뭐가 묻었나 하며 더듬더듬 제 얼굴을 매만졌다.
“부탁할 게 있어, 엘런.”
샤로니아가 이토록 진지하게 부탁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엘런은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든지요.”
“어려운 건 아니니까, 괜찮을 거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샤로니아가 비밀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엘런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네?”
귓속말을 들은 엘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른 말은 덧붙이지 않아도 돼. 그렇게만 전하렴. 어렵겠니?”
“아, 아니요. 어렵진 않은데…….”
엘런이 말끝을 흐렸다. 도무지 샤로니아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으니까.
“그럼, 부탁할게.”
샤로니아가 싱긋 웃으며 방을 나가는 것을 엘런은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 * *
샤로니아는 로브를 뒤집어쓴 채 남들의 이목을 피해 조용히 황궁 복도를 걸었다. 경비병들은 이제 눈치가 생겨 그녀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 덕분에 아무런 제재 없이 황제의 침실 앞에 도착한 샤로니아는 조용히 방문을 노크했다.
‘응? 안 계신 건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그녀는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떤 일에 집중하느라 노크 소리를 듣지 못한 키언이 도둑질을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흠칫 놀랐다.
“안 계신 줄 알았는데 일찍 오셨네요.”
샤로니아가 그에게 다가서다 말고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늦은 저녁인데도 불구하고 탁자 위에 음식들이 그득했기 때문이다.
각종 타르트와 거대한 티라미수, 애플파이 등이 그녀의 손길을 기다리며 먹기 좋게 놓여 있었다.
“왔어?”
키언이 눈을 곱게 휘며 웃는 것이 샤로니아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 루카스의 성화에 못 이겨 각종 디저트를 배가 터지도록 먹었던 탓이었다.
“이게…… 뭘까요?”
샤로니아가 어색하게 웃으며 물었다. 디저트 종류를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었다. 먹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 저도 모르게 나온 질문이었다.
“네가 좋아하는 것들로 준비해 봤어.”
샤로니아가 듣고 싶었던 대답은 당연히 나오지 않았다. 얼떨떨하게 서 있는 그녀를 키언이 손수 의자에 앉혀 주었다.
과하게 친절한 미소를 입가에 드리운 키언이 그녀의 손에 친히 포크를 쥐여 주었다.
“자, 맛있을 거야. 한번 먹어 봐.”
이 남자는 헨델과 그레텔에 등장하는 마녀처럼 자신을 살찌워서 잡아먹을 생각인 걸까? 샤로니아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그것보다 여쭤볼 게 있어요.”
샤로니아가 슬쩍 포크를 내려놓았다.
저걸 꼭 먹어야 하는데. 키언의 시선이 그녀가 내려놓은 포크에 못 박힌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 뭐가 궁금하지?”
키언은 태연하게 대답했지만, 시선은 여전히 그녀의 손과 포크 사이에 고정되어 있었다.
“황후 후보가 내정되어 있나요?”
“응,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그다지 성의가 느껴지지 않는 대답에 샤로니아가 슬쩍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설마 했는데 내정되어 있다고? 그런데 어떻게 그 말을 저토록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지? 샤로니아는 울컥하는 속내를 누르며 서늘하게 말했다.
“어느 가문의 영애인지 알려 주셔야 저도 주의를 하죠.”
“아아, 그렇겠군.”
키언이 건성으로 대답하며 다시 포크를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
“일단 먹고 얘기하면 안 될까?”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오늘따라 굉장히 이상한 황제를 샤로니아는 뚱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얘기부터 하고 먹으면 안 될까요?”
샤로니아가 포크를 무기처럼 쥐고 말했다.
그제야 이상한 느낌을 받은 키언이 눈을 깜박였다.
“그러면 일단 이 티라미수만 먼저 먹고 말하지.”
키언은 그녀가 언짢아하는 것을 눈치챘기에 백번 양보해서 티라미수가 담긴 접시만 내밀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꼭, 반드시, 먹어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