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어두침침한 내부는 생각보단 아늑했다. 예스러운 느낌의 벽지와 커튼, 가구들은 꽤 고가의 것으로 보였다.
“이러니까 음침한 소문이 붙을 수밖에.”
샤로니아가 혀를 쯧쯧 차며 두꺼운 커튼을 걷었다. 그러자 밝은 햇살이 안으로 비치며 내부의 모습이 더욱 또렷이 눈에 들어왔다.
“윽, 사는 꼬락서니하고는.”
키언이 탁자 위에 뽀얗게 내려앉은 먼지를 손가락으로 슥 훑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탑 안의 모든 것은 정지된 것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사람이 살긴 하는 건가?”
키언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곳은 한눈에 보기에도 꽤 오랫동안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일단 위로 더 올라가 봐요.”
샤로니아가 위로 연결된 층계를 가리키며 말했다.
계단이 무척 좁고 가팔랐다. 앞서 계단을 오르던 샤로니아가 치맛자락 때문에 잠시 걸음을 삐끗했다.
“조심, 해!”
키언은 본능적으로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손을 뻗었다가 멈칫거리며 굳었다. 샤로니아를 뒤따라 계단을 오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손을 뻗은 자리는 공교롭게도 그녀의 엉덩이 부근이었으니까.
잡았다간 아마 아주 이상한 꼴이 되고 말았을 거다. 비록 불순한 의도가 전혀 없이 도와주려던 것뿐이었어도 말이다.
키언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설계를 이따위로 하다니…….”
그는 애꿎은 계단을 탓하며 슬며시 손을 내렸다.
“옛날에 지은 탑은 다 이런 구조일걸요?”
방금 어떤 일이 일어날 뻔했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샤로니아가 말갛게 웃으며 대꾸했다.
“탑이 문제가 아니라, 결국은 네가 문제인 거야.”
키언이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 소리를 용케 알아들은 샤로니아가 뒤로 고개를 홱 돌리며 말했다.
“제가 왜요?”
“윽, 너는 정말!”
샤로니아가 넘어지는 줄 알았던 키언은 깜짝 놀라며 그녀의 허리를 탁, 붙잡았다. 정작 그녀는 흔들림 없이 꽤 안정적으로 서 있는데 말이다.
“폐하, 잊으셨을까 봐 말씀드리는데, 여기서 굴러떨어질 만큼 저는 약하지 않아요.”
“그래, 그래.”
키언이 건성으로 답하며 그녀의 몸을 살폈다.
“제 마력이 아무리 불안정해도 여기서 추하게 넘어질 정도는 아니라고요.”
그를 설득시키려는 듯이 샤로니아가 반복적으로 말했다. 그런 그녀를 보는 키언의 시선이 일순 진지하게 바뀌었다.
“네가 세상에서 제일 강하다 해도, 짐에겐 연약한 존재야.”
키언이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어둠 속에서도 밝게 빛나는 금빛 눈동자는 마력이 깃든 것처럼 정신을 아득하게 만든다.
“세상을 멸망시킬 힘이 네게 있어도, 넌 짐에게 약한 존재일 거라고.”
그렇게 말하며 키언이 두어 계단을 천천히 올라섰다. 그러자 둘의 키가 거의 엇비슷해졌다.
항상 올려다보던 얼굴이었는데 눈높이가 같아지자 샤로니아는 기분이 꽤 이상했다.
자신의 허리를 붙잡고 있던 그의 손에서 열감이 피어올라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것 같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그러니 짐의 보호를 기꺼이 받도록.”
명령조로 말한 그가 씨익 웃으며 그녀의 입술을 진득하게 베어 물었다.
“폐, 하…….”
이런 짓을 할 만한 상황과 장소가 되지 못한다는 그런 소리는 그의 입술에 모조리 먹히고 말았다.
“하, 흣…….”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깊게 파고든 그로 인해 샤로니아의 호흡이 점점 가빠왔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을 때마다 나는 질척한 소리가 좁은 공간을 울리며 야릇한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균형을 잡기 위해 샤로니아는 그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그가 그녀의 허리를 더욱 단단히 붙잡아 자신의 몸 쪽으로 당겼다.
빈틈없이 맞닿은 몸에서 서로를 향한 열망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이곳이 어디인지 잊어버렸다. 악명 높은 마녀의 거처인 것도,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라는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만약 그들의 귀에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았더라면 언제까지고 멈추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끼이이익, 쿵.
어디선가 육중한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
그들은 헉,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그제야 비로소 제정신이 돌아왔다.
“위쪽에서 난 소리 같은데.”
키언이 경계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첨탑 쪽에서 난 소리 같아요.”
샤로니아도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짐이 먼저 가지.”
키언이 그녀와 위치를 바꾼 뒤. 검을 빼 들고 천천히 위로 향했다.
소문만 무성할 뿐 진짜로 마녀를 본 적이 없었기에 긴장감은 배가되었다. 마녀가 아니라 흉측한 마물이 도사리고 있을지, 아니면 그 이상의 위험한 것이 나타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자박자박, 걸음을 내딛는 소리가 귓전을 크게 울렸다. 이 망할 놈의 탑은 울림이 커서 기척을 숨기는 데 아주 부적합했다.
“샤론? 샤로온?”
굉장히 다급하고 애절한 목소리가 탑 전체에 웅웅거리며 울려 퍼졌다.
“응? 지금 저 소리, 짐의 귀에만 들리는 거 아니지?”
걸음을 멈춘 키언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샤로니아에게 물었다.
“네, 제 귀에도 똑똑히 들려요.”
그녀도 의아한 기색이 역력했다. 메아리치며 들리는 이름은 어쩐지 그녀를 지칭하는 것 같았으니까.
키언은 기분이 나빴다. 왜냐하면 자신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던 그녀의 애칭이 다른 이에 의해 불리고 있다는 것이 기분 나빴고, 또 그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남자의 것이라는 게 기분을 팍 상하게 했다.
만일 저 목소리가 애타게 부르고 있는 것이 진짜 샤로니아라면 가만두지 않을 테다. 키언은 그런 생각을 하며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타다다닥, 쿵쾅쿵쾅. 급하게 걸음을 내딛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져 왔다. 둘은 첨탑으로 나가는 문 앞의 넓은 계단참에 서서 미스터리의 인물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분명해! 분명히 샤론이 여기에 온 게 틀림없어!”
정신없는 목소리와 함께 벌컥, 문이 열렸다. 키언은 문이 열림과 동시에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지만, 나타난 사내에게서 살기가 느껴지지 않았던 탓에 흉흉한 눈빛으로 노려보기만 했다.
“으악! 누, 누구야?”
하지만 상대편은 키언의 눈빛에 놀란 기색이 다분했다. 붉은빛이 맴도는 마법구를 손에 든 남자가 키언을 보고 꽥, 소리를 질렀다.
“그러는 넌 누구냐?”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침착함을 잃지 않은 키언이 서늘한 눈빛으로 검을 들이밀며 물었다.
“나, 남의 집에 쳐들어온 주제에 뭐, 뭐가 그렇게 당당해?”
“남의 집? 여기에 산다고?”
키언이 예리한 눈빛으로 남자를 훑었다. 헝클어진 흑발에 보랏빛 눈동자를 가진 남자는 어쩐지 묘하게 샤로니아와 분위기가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그래. 내가 여기 주인이야. 그러니 그 무례한 태도는 좀 삼가 주지 않겠어?”
그때, 남자가 들고 있는 마법구가 웅웅 울리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게 왜 이러지? 고장인가?”
남자가 머리를 쓸어 올리고는 마법구를 탁탁, 때렸다.
“저런 덩치가 우리 샤론일 리가 없잖아.”
침울하게 가라앉은 남자의 목소리를 들은 샤로니아가 키언의 뒤에서 고개를 내밀어 남자의 모습을 관찰했다. 남자의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익숙했다. 설마, 그럴 리가 없는데. 샤로니아는 몇 번이나 고개를 가로젓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루카스……?”
“샤론? 으아, 맙소사! 정말 샤로니아, 너 맞아?”
남자가 하도 크게 소리 지르는 바람에 키언은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아는 자야?”
키언이 확인하듯 샤로니아를 향해 물었다.
“아마도요.”
샤로니아가 모호하게 말하며 두 눈을 좁게 뜨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흑발에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남자를 알고 있다. 항상 제게만 상냥하게 웃어 주고, 저만 졸졸 쫓아다니던 남자를.
하지만 저렇게 헝클어진 모습이 아니라 항상 단정한 모습이었는데…….
“나야, 나. 하나밖에 없는 네 오빠, 루카스라고!”
그가 샤로니아를 껴안을 것처럼 달려들자 키언이 슬쩍 그들 사이에 끼어들며 그를 제지했다.
“내 기억에 가족들은 모두 죽은 걸로 아는데?”
샤로니아가 여전히 경계가 가득한 눈빛으로 묻자 루카스의 귀가 축 처지는 것처럼 보였다.
“살아남은 사람은 나와 너뿐이야. 내가 이제껏 널 찾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어째서 마법구가 이제 반응하는지 모르겠지만, 진짜야!”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루카스가 중얼거리면서 애처로운 눈빛으로 샤로니아를 바라보았다.
“그건 당연해. 난 이제껏 신전에 머물렀으니까.”
샤로니아가 표정 없이 담담하게 하는 말에 루카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신전은 결계에 의해 마법으로는 그 안의 어떤 기운도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신전이 어떤 일을 하는 곳인지 제국 내에서 모르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신전? 신전에 있었다고? 신전 놈들이 혹시 네게 무슨 짓을 한 거야?”
루카스의 몸에서 분노의 기운이 뻗어 나오자 탑 전체가 드드드득, 진동하며 떨렸다. 그의 손에 든 마법구에서 곧 폭발할 것 같은 푸른 기운이 넘실거렸다.
졸지에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신전 놈이 되어 루카스의 분노의 시선을 고스란히 받은 키언은 헛숨을 내뱉었다.
지금 감히 누구를 노려보고 있는 줄 알기나 하는 건지.
“그만해. 그분은 황제 폐하시니까.”
“뭐……?”
샤로니아의 말에 루카스가 멍한 표정이 되었다. 사납게 날뛰던 기운도 그를 따라 잠잠해졌다. 루카스는 사실 여부를 확인하듯이 키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가 친절하게 맞다고 설명해 주지 않았던 탓에 둘의 시선은 한동안 묶여 있었다.
“바보 같아.”
쿠궁, 샤로니아의 말이 커다란 바위가 되어 루카스의 머리를 때렸다.
“난 오빠가 죽은 줄로만 알았어. 그런데 오빠가 붉은 거탑의 마녀였다니……. 도대체 왜 마녀라고 불리는 거야?”
“마남은 이상하니까?”
“마법사라고 하면 되잖아.”
“아…….”
“역시 바보 같아.”
푸푹, 이번에 샤로니아의 말이 비수가 되어 루카스의 가슴에 꽂혔다.
비틀거리던 루카스가 곧 정신을 차리고 활짝 웃었다. 얼마나 애타게 찾던 동생인데 그냥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샤로온, 이게 얼마 만인데 한 번만 안아 보자.”
루카스는 어릴 때부터 제 동생밖에 모르는 동생 바보였다. 샤로니아가 무심한 얼굴로 팩트 폭력을 가해도 그는 해바라기처럼 오매불망 그녀의 사랑을 갈구했다.
두 팔을 벌리고 샤로니아를 향해 돌진하던 루카스는 불현듯 무언가에 제 뺨이 꾹꾹 밀리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까부터 자신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던 황제가 마치 그녀의 보호자라도 되는 것처럼 그를 밀어내며 오만하게 말했다.
“불허한다.”
10년 만에 만난 내 동생을 내가 안아 보겠다는데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허락을 안 해?
루카스가 키언의 손길을 밀어내고 샤로니아에게 가려고 아등바등했다.
하지만 뛰어난 검술 실력과 근력으로 다져진 키언의 힘을 이겨내기는 역부족이었다.
“당신 뭐야? 나한테 왜 그래?”
“아까 들었지 않나? 황제라고. 알았으면 예를 좀 갖추지 그래?”
욱해서 다시 반말로 따지고 들려던 루카스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예를 갖춰서 존칭을 쓰기엔 뭔가 많이 억울했으니까.
그렇다고 고분고분하게 존칭을 쓰기는 싫으니 자동적으로 입술이 다물어질 수밖에 없었다.
두 남자의 유치한 기 싸움을 지켜보던 샤로니아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계속 여기 서 있을 수는 없잖아. 일단 응접실로 내려가서 얘기해. 설마 10년 만에 만난 동생에게 차도 한 잔 안 내주는 건 아니겠지?”
“다, 당연히 아니지!”
루카스가 깜짝 놀라며 어깨를 파드득 떨었다.
샤로니아가 가파른 계단을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루카스가 기함하며 만류했다.
“가지 않아도 돼! 내가 할게.”
그의 말뜻을 파악하려는 듯이 샤로니아가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루카스가 한 팔을 들어 책장을 넘기듯 허공을 휘젓자 공간이 스윽, 뒤바뀌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탑의 초입에 있던 응접실로 장소가 옮겨졌기에 샤로니아와 키언의 눈이 커다래졌다.
“이런 마법도 있었어?”
“응, 공간을 바꾸는 주문이야.”
샤로니아가 궁금해하는 것은 무엇이든 성실하게 답할 준비가 되어있는 루카스가 과장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일단 이 먼지부터 치워 보아라.”
그래야 차를 마시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니냐. 키언이 불쑥 끼어들어 손가락으로 더러운 실내를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