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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요망한 구원자 (38)화 (38/123)

38화

빡빡한 스케줄을 읊으며 좋은 시간을 방해할 테오르를 떼어내어 기분이 좋았던 키언은 곧장 하트론 궁으로 향했다.

걷던 도중 그는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마주 오는 여자를 보고 미소 지었다.

‘하루쯤 쉬지 않고…….’

어젯밤 일을 떠올린 키언은 샤로니아가 쉬지 않고 밖에 다니는 것이 괜히 안쓰러웠다. 하트론 궁에 도착하기 전에 만나게 되어 반가웠지만, 그녀의 몸이 걱정되었던 탓에 저절로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런데 웬일인지 여자와 가까워질수록 키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자는 샤로니아와 거의 흡사한 외모를 갖고 있었으나, 그녀 본인이 아니었다. 불길한 느낌에 저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살면서 이렇게 기분 나쁜 느낌을 주는 여자는 또 처음이다.

“누구냐, 넌?”

말이 곱게 나갈 리가 없었다. 서늘한 키언의 음성에도 불구하고 여유롭게 미소 지은 여자가 자기를 소개했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클리오라 디센베르입니다. 여기서 만나 뵙게 될 줄은 몰랐는데 아무래도 폐하와 제가 심상치 않은 인연인가 봅니다.”

소개를 듣고 난 키언의 표정은 풀리기는커녕 더욱 차갑게 얼어붙었다.

클리오라는 샤로니아처럼 제국에서 보기 드문 흑발을 갖고 있었다. 눈동자 색깔이 녹색으로 서로 달랐지만 마치 샤로니아의 외형을 그대로 베낀 것처럼 차림새와 분위기가 거의 비슷했다. 키언이 멀리서 보고 샤로니아와 착각할 정도로 말이다.

신전의 음모인 건가? 샤로니아와 비슷한 외모의 여인을 데려와서 자신을 꾀려는? 하다 하다 이런 짓까지 일삼다니 신전도 갈 데까지 간 모양이다.

“하? 제정신으로 이런 짓을 벌인 건가?”

키언이 살벌한 기운을 풍기자 클리오라 뒤에 서 있던 남자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제 여식이 어찌하여 폐하를 이렇게 노엽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단지 인사밖에 한 것이 없는데 말이지요.”

“디센베르 후작…….”

키언이 짓씹듯이 낮게 이름을 뱉어냈다. 그가 싫은 기색을 보일수록 디센베르 후작의 미소가 진해졌다.

“예, 폐하. 저는 행여나 폐하께서 디센베르라는 이름을 잊으신 줄 알고 걱정했지 뭡니까?”

그가 허허, 웃는 것을 바라본 키언이 슬며시 눈살을 찌푸렸다.

디센베르는 대표적인 신전파 귀족이었다. 교활하고 파렴치한 마구스와 너무도 닮아서 상종도 하고 싶지 않은 부류가 바로 그들이었다.

“후작의 여식이라 했나?”

“그렇습니다, 폐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제 딸이지요.”

디센베르 후작이 뱀같이 눈을 빛내며 보란 듯이 클리오라를 자랑했다.

비쩍 마른 데다 주황색 머리에 회색 눈동자를 가진 디센베르 후작과 클리오라는 단 한 군데도 닮은 곳이 없었다. 후작 부인의 외모를 떠올려 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후작 부인은 디센베르 후작의 취향을 온전히 반영한 백금발이었으니까.

‘보나 마나 마구스 놈의 짓일 테지.’

속으로 욕설을 퍼부으며 키언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어째서 짐은 디센베르 가문에 여식이 있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을까?”

“그건 제가 이 아이를 너무도 아낀 나머지 아무 데도 선뵈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저의 보배이지만 그래도 이제 데뷔탕트를 치를 때가 되었으니 저 혼자 독점하는 것은 그만두어야지요.”

대놓고 데뷔탕트를 운운하는 행태에 키언이 한쪽 눈썹을 쓱 들어 올렸다.

그 말은 이번 사교 시즌의 최고 거물인 황제를 노리겠다는 선전포고처럼 들렸으니까.

하지만 그들의 뜻대로 순순히 움직여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어디 마음껏 작당해 보라지. 그 결과는 바뀌지 않을 테니.

“그런가? 아무튼 성공적인 데뷔탕트가 되길 바라겠네.”

키언이 형식적으로 딱딱하게 인사하자 클리오라가 자연스럽게 그의 말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폐하.”

그녀를 마주하면 어쩐지 속이 메스꺼웠다. 어떻게 저렇게 낯짝이 두꺼울 수 있지? 샤로니아를 흉내 내서라도 관심을 끌어 보겠다는 저의가 속을 메스껍게 했다.

“그럼, 짐은 바빠서 이만.”

키언은 더 이상 시간을 빼앗기기 싫어서 곧장 자리를 떠났다.

멀어지는 황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클리오라가 픽 웃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꽤 미남이네요.”

“저래 봬도 전쟁귀라 불리는 사내야. 만만치 않은 상대이니 정신을 바짝 차리도록 해. 카티르께서 네게 베푸신 은총에 반드시 보답할 수 있도록 말이야. 카티르가 아니었으면 넌 결코 디센베르라는 이름을 가질 수 없었을 테니까.”

“그건, 저도 알고 있어요. 후작님. 아니, 아버지.”

클리오라가 매끄럽게 되받아치는 말에 디센베르 후작이 입매를 비틀며 탐욕스럽게 웃었다.

출신 성분도 모르는 천박한 계집을 데려와 가문에 입적시키라고 마구스가 말했을 때만 해도 그는 불만이 많았다.

아무리 신의 대리자이자, 신전의 수장인 카티르의 명이라고 해도 그건 귀족의 입장에서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디센베르 후작은 뼛속까지 계산적인 사람이었다. 자신이 양녀로 입적시킨 클리오라가 황후가 되었을 경우, 디센베르 가문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계산하니 그깟 천박한 핏줄쯤 섞이는 게 대수인가, 하는 결론이 내려졌다.

반드시 황후 자리에 디센베르를 앉힐 것이다. 그리고 그 디센베르가 낳은 아이가 차기 황제가 되게 만들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결국 세상은 디센베르의 차지가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테니까.

* * *

엘런이 샤로니아 앞에 마정석을 내려놓으며 다시 염려를 쏟아놓았다.

“정말 괜찮을까요?”

“걱정 마. 인원이 많지 않으면 실패할 일은 없을 거야.”

“많지 않은 인원이 도대체 몇 명인데요?”

“2명.”

“그러면 성녀님의 안전은 어떻게 보장해요?”

그 무섭다는 붉은 거탑의 마녀를 만나러 가는데 호위를 한 사람밖에 데려갈 수 없다니요? 엘런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하지만 샤로니아는 대수롭지 않게 마법 서적만 뚫어져라 쳐다볼 뿐이었다.

“정신을 집중하고 이동하고자 하는 곳을 떠올린다. 그리고 기운을 운용하는 느낌으로 주문을 외운다. 주문은 ‘에르칼리스 이데오파’!”

그냥 책을 따라 읽었을 뿐인데 허공에 강한 빛이 나타나더니 마법진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책에서 보던 그림과는 달리 빛을 내뿜는 마법진은 굉장히 생생한 느낌이라서 샤로니아는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며 한동안 멍하니 마법진을 응시했다.

“이, 이걸 어떡해요!”

헉, 엘런이 숨을 멈추며 입을 틀어막았다.

“어라? 이렇게 바로 되는 거였어?”

샤로니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리고 키언이 들어왔다.

“샤론, 몸은 좀 어때? 짐과 함께 티타임을……!”

미소를 지으며 들어서던 키언의 표정이 일순 와락 굳었다. 빛나는 마법진에 샤로니아의 몸이 점점 삼켜지고 있었으니까.

“기다려!”

반쯤 투명해진 샤로니아를 본 키언이 앞뒤 가릴 것 없이 마법진으로 뛰어들었다.

그오오오오! 팟!

빛이 번쩍하더니 황제와 성녀가 다 사라져 버렸다. 너무 찰나에 벌어진 일이라 엘런이 어떻게 대처할 수도 없었다.

“으악! 신이시여!”

엘런이 괴성을 지르며 머리를 움켜쥐었다. 이 일을 어떡하지? 황제 폐하까지 사라져 버렸는데 이 일을 어떡한단 말인가.

그들이 감쪽같이 사라진 빈 공간을 바라보며 다리에 힘이 풀린 엘런이 털썩 주저앉았다.

* * *

“아윽, 허리야.”

키언이 신음을 내뱉으며 눈을 떴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방금 본 건 분명히 이동 마법진이었는데? 그는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기사답게 본능적으로 주위를 살폈다.

뿌옇게 일어난 흙먼지와 안개처럼 일렁이던 기운이 점차 수그러들며 주변 풍경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여기가 어디지?”

키언은 높다란 절벽과 험준한 산맥들을 둘러보며 샤로니아에게 물었다.

“폐하께서 어떻게 저랑 같이 오셨어요?”

키언의 몸에 올라탄 샤로니아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물었다.

“그건 짐이 묻고 싶은 말인데. 넌 어쩔 작정으로 이런 짓을 벌인 거지?”

키언은 엄한 표정으로 말하다가 그녀가 제 위에서 바르작거리는 바람에 자꾸 표정이 무너지는 것을 눈치채고 크흠, 헛기침을 내뱉었다.

“마력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붉은 거탑의 마녀를 만나러 왔어요.”

“붉은 거탑의 마녀? 그러면 여기가 제국의 끝이란 말이야?”

“네. 제대로 도착했다면요.”

샤로니아의 말을 들은 키언이 끙, 앓는 소리를 내며 이마를 짚었다. 자신은 그녀와 차를 마시려고 하트론 궁에 갔을 뿐인데 제국 끝으로 날아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그제야 자신이 그의 몸을 올라타고 있다는 것을 안 샤로니아가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꼬물꼬물 움직였다.

“지금…… 뭐 하는 거지?”

키언이 황당한 얼굴로 그녀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아, 힘드실 것 같아서 내려가려고요.”

그녀가 제 위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다고 해서 힘들 것은 없었다. 원체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문제는 전혀 다른 데 있었다.

“윽, 그 방향은 아닌 것 같은데?”

그녀의 움직임이 돕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몸에 자극을 주자 키언이 놀라며 만류했다.

“그냥, 가만히 있도록 해.”

“아…….”

뒤늦게 그의 말뜻을 알아들은 샤로니아가 정지 상태가 되었다.

그녀를 달랑 들어 올려 옆에 내려놓은 키언이 그제야 상체를 일으켰다.

“티타임을…… 제국 끝에서 갖게 될 줄이야.”

마실 차나 있으려나? 키언이 중얼거리면서 멀찍이 떨어진 붉은 탑을 바라보았다.

마녀가 죽인 사람들의 피로 인해 탑이 붉게 물든 것이라는 소문과는 달리 탑은 붉은 벽돌로 이루어져 있었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탑은 가파른 절벽 위에 하늘을 찌를 듯이 우뚝 솟아 있었다.

벽면을 타고 오른 덩굴들이 을씨년스러운 느낌을 주긴 했지만, 소문처럼 흉물스럽거나 괴기스럽진 않은 모습이었다.

“이런 데 정말로 도움 되는 게 있긴 한 건가?”

키언이 두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진지하게 물었다.

낡아 빠진 탑에 사는 마녀가 도움이 돼 봤자 얼마나 되겠나, 의심이 가득한 눈초리였다.

“그래도 제국 내에서 마법을 다룰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걸요.”

“그거야 직접 보고 판단할 문제고.”

고개를 삐딱하게 꺾은 키언이 샤로니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단 여기까지 온 김에 가 보지.” 

그의 말투를 들으면 탑에 가 보겠다고 결정 내린 것에 대해 감사를 해야 할 것 같다. 샤로니아가 피식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마녀에 대한 소문이 꽤 살벌한 걸로 기억하는데, 맞나?”

“음, 일단 소문은 그래요.”

“넌 걱정하지 마. 내가 있잖아.”

“전 걱정한 적 없는데요.”

“…….”

샤로니아의 확고한 대답에 키언은 말문이 막혔다. 그렇게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가파른 길을 오르다 보니 어느덧 탑의 입구에 다다랐다.

드래곤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문고리를 두드리려고 샤로니아가 손을 뻗었을 때였다.

끼이익, 저절로 문이 열렸다.

“뭐야? 문이 왜 저절로 열려?”

키언이 미심쩍은 얼굴로 문을 노려보았다. 자신은 모든 위험으로부터 그녀를 지킬 의무가 있었으니 뭐든 허투루 보아 넘길 수가 없었다.

“열려 있으니 더 잘된 거 아닌가요?”

키언이 말릴 틈도 없이 샤로니아가 문을 열고 성큼 들어갔다.

겁도 없이 정말! 키언이 놀라며 그녀의 뒤를 바짝 쫓아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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