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샤로니아는 살짝 아쉬웠지만 그래도 오늘 파티에 참석한 대부분의 사람에게 성수를 전달한 것 같아서 그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뭐, 처음치고는 나름 성공적인 홍보였다.
“델라크 경은 어쩌고요?”
“짐이 먼저 널 데려가겠다고 얘기해 뒀으니, 지금쯤 어느 구석에서 진탕 마셔대고 있을 거야.”
언제나 음주에 진심인 헤이든의 모습을 떠올린 두 사람이 피식 웃었다.
헤이든 대신 에스코트를 하겠다고 자청했기에 키언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넘치게 수행했다.
하트론 궁 앞에 마차가 도착하자 키언이 먼저 내려 샤로니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발밑을 조심하시지요.”
마치 주인을 대하는 충직한 기사처럼 그가 허리를 숙였다.
“폐하, 사람들이 봐요.”
샤로니아가 당황해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는 일개 기사도 아니고, 명망 있는 귀족도 아닌, 무려 제국의 황제였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그런 그들의 모습을 정면으로 목격한 이가 있었다.
마구스가 내린 벌을 수행하느라 노동자들을 위한 제사를 드리고 돌아가던 리비어가 제 눈을 의심하며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지금 이게 무슨…….”
그녀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음침하게 중얼거렸다.
억센 노동자들을 받아주느라 온몸에 욱신거리는 통증이 몰려오는 자신과는 달리 샤로니아는 만개한 꽃처럼 아름다움을 과시하고 있었다.
푸석해진 피부와 만신창이가 된 자신의 모습과는 대조되게 그녀는 한껏 차려입고 황제의 에스코트를 받고 있었다.
분노로 몸이 덜덜 떨렸다. 리비어는 꼭지가 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방금 절절히 깨달았다. 정말 눈에 뵈는 게 하나도 없어졌으니까.
리비어는 저도 모르게 씩씩거리며 마차 쪽으로 다가갔다.
살기를 느낀 키언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야밤에 웬 미친년이…….’
제사 때 입는 새하얀 신녀복에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하지도 않고 눈을 부릅뜬 채 다가오는 리비어를 보고 키언은 제일 먼저 그런 생각을 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샤로니아를 제 등 뒤로 숨기며 경계의 눈빛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지?”
날 선 황제의 목소리에 리비어의 정신이 돌아왔다. 이성을 잃었던 탓에 여기까지 어떻게 걸어왔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당황한 리비어가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 그저 지나던 길에 인사나 드릴까 하고…….”
리비어는 일단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아무 말이나 지껄였다. 아무리 꼭지가 돌 정도로 화가 난다고는 하나, 많은 이들이 보는 앞에서 무모하게 덤벼들 만큼 정신을 놓지는 않았다.
“알았으니, 그만 물러가도 좋아.”
키언이 미심쩍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조금 전 느낀 살기는 분명 거짓이 아니었는데……. 수상쩍은 행동 하나하나가 눈에 거슬린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신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
멀어져가는 리비어의 뒷모습에서 키언이 한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어째서! 어째서!’
리비어는 몸이 아픈 것도 잊고 분노에 휩싸여 발을 쿵쿵 구르며 걸었다.
어째서 저따위 저주받은 성녀가 황제의 사랑을 독차지한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납득이 되지 않았다.
‘내가 만일 성녀였다면…….’
그랬다면 저 자리에서 웃고 있을 사람은 그 천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었을 텐데.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인해 이가 아드득 갈렸다.
분을 삭이지 못하고 정신없이 걷던 리비어가 낯선 풍경에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여기가 어디지?’
신전 내부에 이런 곳이 있었나? 그녀는 두 눈을 좁게 뜨고 주위를 살폈다. 분명 하트론 궁에서 신전으로 이어지는 아치형 복도를 걷던 중이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이 선 곳은 처음 보는 길이었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좁다란 복도가 어딘지 모를 곳을 향해 쭉 뻗어 있었다.
아무래도 제사에 쓴 환각 성분이 든 향초의 향을 너무 오래 맡은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수천 번을 오가던 길을 잘못 들어설 리가 없을 테니까.
그녀는 어두워서 거의 보이지 않는 통로를 더듬으며 천천히 나아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불쾌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그건 마치 짐승의 배설물과 몸에서 나는 것처럼 아주 고약한 냄새였다.
“뭐야, 도대체?”
그녀가 손가락으로 코를 누르며 인상을 찡그렸을 때였다. 무언가 발끝에 걸리는 느낌에 그녀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새카만 털을 가진 짐승이 발밑에서 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언뜻 보기엔 늑대를 닮은 것 같지만 전신이 새카만 털에 뒤덮여 있는 짐승은 리비어의 방문 목적을 파악하려는 듯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마물?”
리비어가 깜짝 놀라며 어깨를 떨었다.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자 공간 전체가 눈에 들어왔다. 여러 개의 우리에 마물들이 갇혀 있었다. 그냥 눈으로 훑어보아도 마물의 개체수가 수십 마리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여긴 도대체…….”
우리에 갇힌 마물들의 덩치가 훨씬 큰 것을 보니 지금 제 발 앞에 있는 것은 새끼인 것 같았다. 몸집이 작아서 우리에서 빠져나온 건지, 아니면 새끼라서 풀어놓은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리비어는 왠지 신께서 제 발걸음을 인도해 주신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신께서 내게 기회를 주신 게 틀림없어.”
리비어가 비릿하게 웃으며 새끼 마물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받은 마물의 눈에 붉은빛이 반짝 스쳐 갔다. 마치 제 안에 깃든 욕망을 그대로 빨아들인 것 같은 붉은 눈이 퍽 마음에 들었다.
“너, 나랑 같이 갈래?”
리비어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 새끼 마물은 그저 고개를 갸웃거리며 붉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리비어가 마물을 꾀어내고 있을 때였다.
“여긴 어떻게 들어온 거지?”
그녀의 뒤에서 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비어는 전혀 당황한 티를 내지 않고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미카엘.’
마구스가 수족으로 부리는 자였다. 리비어는 마구스의 곁을 맴돌던 미카엘의 얼굴을 떠올리고 미소 지었다.
그는 돈이면 뭐든 하는 자로 유명했다. 탐욕이 짙은 자일수록 부리는 것이 쉬운 법이다.
“길을 잃어서 우연히 오게 되었어요. 이것도 다 신의 뜻이 아니겠어요? 형제님?”
리비어가 매끄럽게 혀를 놀리며 미소 지었다.
“이해가 안 되는군. 여긴 입구가 감춰져 있는데.”
미카엘이 여전히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채 리비어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신의 뜻이라고 말하는 것 아니겠어요. 신께서 저를 형제님이 있는 곳으로 이끌어 주신 것이지요.”
리비어가 유혹이 명백한 눈짓을 하며 그의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그녀는 남자란 족속을 잘 알았다.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뭘 하고 싶어 하는지를 말이다.
“그러니 이제부터 우린 한배를 탄 거나 마찬가지예요. 그렇지 않나요?”
리비어가 마치 주술을 거는 것처럼 미카엘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의 눈에 번뜩이는 욕망의 빛이 스쳐 갔다.
“뭐, 이미 다 봤으니 되돌릴 순 없겠지.”
그가 입맛을 다시며 리비어의 허리를 훅 휘어잡았다. 그는 사제라기보다는 시정잡배라는 이름이 더 잘 어울리는 자였다.
그런 그가 제 발로 굴러들어온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형제님은 말이 참 잘 통하네요.”
리비어가 싱긋 웃으며 그의 품에 안겼다. 제가 가진 몸뚱어리를 이용해서 다양한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것은 어쨌든 행운이었다.
* * *
“황제가 드디어 정신이 나갔나 보군.”
키언이 바르칼라 공작저에 나타났다는 보고를 들은 마구스가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가 황제가 된 후에 단 한 번도 사적인 무도회에 참석한 적이 없던 만큼, 이번 행차는 많은 추측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성녀가 황제의 에스코트를 받아 환궁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소식인지는 전하는 사제의 목소리만 들어보아도 알 수 있었다. 절대 소리를 높이는 법이 없던 사제의 목소리 톤이 격양되어 있었다.
“돌아가는 모양새가 참 재밌군.”
마구스가 크크큭, 웃음을 토해 내며 글라스에 따른 독한 럼히쉬를 단숨에 들이켰다.
저주받은 외형의 성녀가 나타났을 때만 해도 일이 이렇게 재밌게 돌아갈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었다.
“황제의 취향이 그런 쪽이라니…….”
백번 그 취향을 맞춰 줘야겠지. 잔을 빙글빙글 돌리던 마구스가 사제를 향해 말했다.
“그 아이는 잘 있겠지?”
마구스가 지칭하는 아이가 누군지 곧바로 눈치챈 사제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카티르. 흑발에 녹색 눈동자를 가진 클리오라를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그래, 그런 이름이었군.”
마구스는 마치 소풍을 앞둔 아이처럼 들뜬 눈빛으로 사제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 아이를 데려와. 곧 시작될 사교 시즌에 맞춰서 준비를 시켜야지. 황제도 이제 결혼할 때가 되었으니까.”
“설마, 황후 자리에 그 아이를 앉히시려는 것입니까?”
놀란 사제가 저도 모르게 질문을 던지다가 서늘한 마구스의 눈빛을 보고 흠칫 어깨를 떨었다.
주제넘었다. 아무리 궁금하다 해도 그것이 목숨보다 먼저는 아닐 테니까.
“죄, 죄송합니다!”
사제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입꼬리를 말아 올린 마구스가 인자한 모습을 연기하며 말했다.
“내가 못 할 것 같나?”
“아, 아닙니다! 카티르께서 못 하실 일은 없으십니다!”
사제는 혹여나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서둘러 답변했다.
“그래, 신의 대리자인 내가 못 할 일은 없지.”
마구스가 여유로운 모습으로 의자 깊숙이 등을 기댔다. 신전의 높은 보좌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자신이 마치 신이 된 것 같았다.
못 할 일이 없는, 전지전능한 신.
자신의 꼭두각시를 황후 자리에 앉히는 것쯤이야 쉬운 일이었다. 차가운 신전 바닥에 이마를 대고 있는 저 사제의 목을 꺾는 일처럼 말이다.
마구스는 보좌 팔걸이에 올려놓은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멀리 떨어져 있는 사제의 몸이 원근법에 의해 그의 손가락만 해 보였다. 그는 벌레 죽이듯 손가락으로 사제의 몸을 누르는 상상을 했다.
버러지 같은 것들이 살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것을 보는 것만큼 즐거운 것은 없다.
얼마든지 죽일 수 있지만 살려두는 것은 긍휼을 베푸는 마음을 통해 정말 신이 된 것 같은 기분을 즐기기 위해서이다.
“차질 없이 준비시키도록 해.”
“예, 카티르.”
멀어지는 사제를 보며 마구스는 다시 손가락을 까딱였다. 피식, 입가에 막을 수 없는 조소가 떠올랐다.
* * *
“저기……. 오늘, 많이 피곤한가?”
하트론 궁 안으로 들어가려는 샤로니아를 붙잡으며 키언이 질문했다.
그답지 않게 질문이 굉장히 소극적이었던 터라 샤로니아가 쿡, 웃으며 반문했다.
“제 컨디션에 따라서 뒷말이 바뀔 예정인가 보네요.”
정곡을 찔린 키언이 잠깐 움찔거렸다. 쳇, 한번을 그냥 넘어가 주지 않는다니까.
키언의 표정이 불퉁해지자 샤로니아가 방긋 웃으며 그에게 다가섰다.
“하나도 안 피곤해요.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건데요?”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샤로니아를 보고 키언이 한차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렇게 쳐다보면 이 몹쓸 몸뚱어리에 발동이 걸린단 말이야.
“어떻게 되긴? 짐의 침실로 와야지.”
키언이 샤로니아의 볼을 한 손으로 꾹 눌렀다. 괜한 분풀이였다. 요망한 그녀에게 휘둘리는 것이 가끔 억울할 때가 있었으니까. 바로 지금처럼.
“침시르요?”
볼이 눌려서 제대로 발음이 안 되었던 탓에 샤로니아가 되묻는 말이 뭉그러졌다.
흠, 이대로 입술을 답삭 삼켜 버리면 안 되겠지? 키언이 그녀의 입술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곧 그녀에게서 손을 떼었다.
“그래, 하나도 피곤하지 않다니 그것참 다행이군.”
키언이 악마 같은 미소를 지으며 씨익 웃었다.
헉, 불길한 미소를 본 샤로니아가 본능적으로 숨을 들이켰다.
“그럼, 이따 보지.”
키언이 그녀의 귀에다 속살거린 후, 하하하, 웃으며 하트론 궁을 떠났다.
‘뭐야? 뭘 잘못 먹었나?’
오늘따라 황제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샤로니아는 궁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