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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요망한 구원자 (34)화 (34/123)

34화

“폐하는 춤 잘 추세요?”

샤로니아가 미심쩍은 얼굴로 질문했다. 황제라서 자신보다 파티에 익숙할 것이 틀림없지만, 그를 둘러싼 흉흉한 소문들을 생각하면 그가 춤추는 모습이 도저히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는다.

“아니, 잘 못 춰.”

아니나 다를까. 춤을 잘 못 춘단다. 그런데 그게 이토록 당당하게 할 말인가? 샤로니아가 헛숨을 내뱉었다.

더랜은 손버릇은 최악이었지만 그래도 춤 실력은 뛰어나서 그녀를 잘 리드해 줬다. 샤로니아가 끝까지 안정적으로 춤을 출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중심을 잘 잡아 주었기 때문이었다.

“둘 다 못 추는데 어쩌시려고요?”

“황제의 춤 실력이 형편없다고 면전에서 비웃을 간 큰 자가 과연 있을까?”

그랬다간 마치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처럼 키언의 말이 무시무시하게 들렸다.

“그, 그런가요?”

샤로니아는 거절할 명분이 마땅치 않아서 일단 그의 춤 신청을 수락했다.

“걱정하지 마. 뭐 어떻게든 되겠지.”

그가 샤로니아의 손을 잡고 홀 중앙으로 걸어 나가며 속삭였다.

아무튼 자신감 하나는 끝내준다니까. 샤로니아가 못 말리겠다는 듯이 픽, 웃었다.

마주 보고 웃는 선남선녀의 모습에 사람들은 흥분해서 갖가지 추측들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에일린이 입술을 짓씹었다. 어째서 황제는 자길 보러오지 않는 거지? 그녀는 납득할 수 없다는 듯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출신 성분도 불분명한 하찮은 성녀 따위가 아니라, 제국과 역사를 같이 해 온 바르칼라 가문의 딸인 자신에게 먼저 춤을 신청하는 게 마땅하지 않은가!

그녀가 분노로 바들바들 떨고 있는데 어느새 다가온 더랜이 불쑥 말했다.

“에일린, 오빠로서 진심으로 충고하는데 잘 생각해. 저 황제는 완전 또라이야.”

“그게 무슨 말이야?”

에일린의 눈초리가 사나워지자 더랜이 중얼거렸다.

아, 너도 또라이였지.

같은 또라이들끼리 다 해 먹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자기만 믿으라더니 이게 뭐야?”

에일린이 더랜을 탓하며 투덜거렸다. 그러든지 말든지 더랜의 시선은 홀 중앙에 서 있는 샤로니아의 얼굴에 꽂혀 있었다.

참으로 이상한 여자…….

쉽게 꺾을 수 있는 꽃으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손안에 넣고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오판이었다.

그녀는 뭔가 달랐다. 묘하게 사람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는 데다 어쩐지 신비로워 보였다.

‘황제를 저 정도로 홀렸다고?’

더랜이 시큰거리는 손목을 주무르며 비릿하게 웃었다. 자신의 손목을 비틀며 살벌하게 치뜨던 황제의 눈빛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아예 내 손목을 자르고 싶은 눈치였어.’

그 눈빛만 생각하면 소름이 돋았다. 전쟁귀에 미친 황제는 그러고도 남을 것이다.

황제는 지금 저 여자에게 완전히 미쳐 있는 게 틀림없었다. 안타깝게도 제 누이가 비집고 들어갈 틈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재밌네. 참 재밌어.’

그는 잔뜩 뒤틀린 미소를 지으며 황제와 성녀가 춤을 추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사랑하는 사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에 애정이 넘쳐흐른다.

“아, 뭐라고 말 좀 해 봐! 미친 거야? 이 상황에 웃음이 나와?”

에일린이 귀에 피가 날 정도로 옆에서 떽떽거렸다. 아, 질린다, 질려.

“그래, 나 미쳤으니까 네가 알아서 잘해 봐.”

더랜은 별 감흥 없는 얼굴로 손을 휘휘 흔들며 에일린에게서 멀어졌다.

“내가 그냥 있을 것 같아? 가만히 안 둬!”

그녀가 씩씩거리며 내뱉는 말에도 더랜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나마 있었던 아군도 사라지자 에일린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어떻게 하면 황제의 눈에 들 수 있을까.

오늘 무조건 얼굴도장을 찍고 그의 춤 신청을 받아 내야만 한다. 에일린의 눈동자에 결연함이 깃들었다.

* * *

“죄송해요.”

벌써 세 번째 키언의 발을 밟으며 샤로니아가 사과했다. 이럴 것이란 짐작은 했지만 정말로 그의 발을 여러 차례 밟고 있으려니 민망해서 얼굴이 달아올랐다.

“괜찮아. 네가 밟는다고 해서 뼈가 부러지진 않을 테니까.”

“뭐라고요?”

샤로니아가 키언을 향해 곱게 눈을 흘겼다. 하하, 웃던 키언의 눈썹이 한차례 꿈틀거렸다. 그녀가 네 번째로 발을 밟았기 때문이다.

“아까 했던 말 취소. 뼈가 부러질 수도 있을 것 같아.”

키언이 엄살을 부리며 샤로니아의 어깨에 머리를 살짝 기대자 샤로니아의 몸이 움찔 떨렸다. 이렇게 서로에게 기대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들의 모습은 사람들의 눈에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는 연인처럼 비쳤다.

“소문이 사실인가 봐요.”

“예사 사이가 아니라더니…….”

귀부인들은 부채로 얼굴을 반쯤 가린 뒤 그 뒤에서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숙덕거렸다.

그러는 사이 음악은 무르익어 여자가 파트너의 손을 잡고 턴을 하는 지점에 이르렀다.

턴을 하는 여자도 균형을 잘 잡아야 하지만 그것을 지탱해 주는 남자도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

둘 다 춤을 잘 못 췄던 까닭에 턴을 하는 샤로니아의 몸이 기우뚱 흔들렸다. 이대로 간다면 아주 볼썽사납게 넘어지고 말 거다.

샤로니아가 위기감을 느끼고 은밀히 마력을 방출했다. 발끝을 살포시 들어 올린 기운이 그녀를 한 마리의 백조처럼 우아하게 만들어 주었다.

아주 매끄럽게 턴하며 빙그르르 돌자 그녀의 드레스 자락이 풍성하게 펼쳐지며 여기저기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쿡, 낮은 웃음을 토해 내며 키언이 자신의 품으로 돌아 들어온 그녀의 허리에 익숙하게 손을 올려놓았다.

“여러모로 유용한 능력이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피날레까지 성공적으로 끝마치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키언과 샤로니아는 큰 실수 없이 춤을 끝낸 것을 기뻐하며 마주 보고 미소 지었다.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던 에일린은 그 다정한 모습에 분개하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춤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던 그녀는 조급한 마음을 누르지 못하고 얼른 키언에게 다가갔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다소곳이 무릎을 굽히며 인사하는 에일린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잘 배운 티가 나는 귀족 영애였다. 아까 에일린과 대화를 나누며 그녀의 본모습을 알아 버린 샤로니아는 마치 다른 사람처럼 구는 그녀의 이중성에 놀라서 혀를 찼다.

“폐하, 그럼 편하게 이야기 나누세요.”

샤로니아가 예를 갖춰 무릎을 굽히고 물러나자 키언이 눈살을 찌푸렸다. 황제의 체면상 자리를 비켜 주는 여인을 붙잡을 수도 없었다. 샤로니아에게 가지 말라 눈짓을 보냈건만 저 냉정한 여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 버린다. 그러니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누군지도 모를 영애에게 보내는 시선이 고울 리가 없었다.

“음, 누구더라…….”

키언이 두 눈을 좁히며 에일린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자신이 기대했던 것처럼 만나서 반갑다느니, 안 그래도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다느니 그런 말이 일절 나오지 않자 에일린은 퍽 당황스러웠다.

적어도 ‘바르칼라’라는 것은 알아볼 줄 알았는데……. 그녀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물러날 순 없었다.

“에일린 바르칼라입니다, 폐하.”

그녀는 자신이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미소를 지으며 키언에게 어필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마치 지나가던 행인을 만난 것처럼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아아, 바르칼라로군.”

어쩐지 그 눈길이 이전보다 더욱 싸늘해졌다.

‘도대체 왜?’

에일린은 이해할 수 없었다. ‘바르칼라’라는 이름을 듣고도 호감을 나타내지 않는 사람은 이제껏 없었으니까.

그것이 ‘바르칼라’가 가진 힘이었다. 황권을 더욱 공고하게 세우기 위해서는 황제도 마다할 이유가 없는 것이 현재 바르칼라가 가진 위치였다.

“예, 폐하. 바르칼라입니다.”

에일린은 또박또박 힘주어 말하며 그가 춤 신청을 해 주길 기다렸다.

“그럼, 아무쪼록 즐거운 파티가 되길.”

그렇게 말하며 그가 곧장 돌아서자 에일린은 저도 모르게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이렇게 간다고? 날 내버려두고? 그녀는 당황스러운 나머지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이런 대접을 받은 적이 없었다.

“폐, 폐하?”

에일린이 성급한 목소리로 그를 불러 세웠다.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돌아서는 황제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서 에일린은 저도 모르게 움찔 어깨를 떨었다.

도대체 왜? 내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저런 냉담한 시선을 보내는 건데? 에일린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왜, 그러지?”

감정이 한 톨도 느껴지지 않는 무감한 시선에 에일린은 주먹을 꾹 말아 쥐며 목소리를 짜냈다.

“그게…… 다인가요?”

“뭐가 더 있어야 하나?”

눈이 딱 마주쳤다. 불쾌한 듯이 미간을 찡그리는 얼굴마저 잘생긴 황제를 보고 에일린은 말문이 막혔다. 벙한 그녀의 얼굴을 본 키언이 더욱 심하게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그럼, 이만.”

다시 붙잡힐까 봐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공작이 자식 농사는 말아먹었군.”

키언이 진심으로 안타까운 듯 쯔쯧, 혀를 찼다.

“폐하, 여기까진 어인 행차이십니까?”

헤이든이 농담조로 말하며 다가온 키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에스코트를 짐에게 넘겨.”

가타부타 다른 설명도 없이 키언이 불쑥 말했다. 애당초 그 말을 하려고 인파를 뚫고 헤이든에게 온 것이었으니까.

“어째, 명령조이시네요?”

헤이든이 황당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녀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기에 키언은 빠르게 수긍했다.

“마음대로 생각해.”

단박에 수긍하는 모습은 아주 뻔뻔하고 당당하기까지 했다.

“기사에게 황제의 명이 어떻게 적용되는지 뻔히 아시면서 그런 말을 잘도 하시는군요.”

헤이든이 유들유들하게 받아치는 말에 키언이 크흠, 헛기침을 내뱉었다. 누가 헤이든 델라크 아니랄까 봐, 꼭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키언의 눈초리가 뾰족해지자 헤이든이 얼른 이어 말했다.

“누구의 명이신데 거부할 리가 있겠습니까? 존명,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헤이든이 기사의 예를 갖추며 절도 있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이만 가 보겠네.”

키언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돌아섰다. 몇 발자국을 내딛자 등 뒤로 헤이든의 목소리가 들렸다.

“좋은 시간 보내세요!”

그 목소리가 너무 해맑아서 잠시 키언의 걸음이 삐걱거렸다.

그는 헤이든을 만나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 다음, 곧바로 샤로니아를 찾았다. 홀 오른편에 그녀를 둘러싼 무리가 보였다.

키언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빨리했다. 그리고 샤로니아의 얼굴을 보자마자 말했다.

“같이 황궁으로 돌아가지.”

“함께 돌아가자고요?”

샤로니아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반문했다. 파티는 이제 막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오래 있으면 있을수록 사업 기반을 확장시킬 수 있을 텐데 어째서 가자는 걸까.

“그래, 지금, 당장, 같이 가.”

키언은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다시 들러붙은 놈팡이들을 쏘아보며 말했다.

그녀에겐 ‘사업’이었지만, 뭇 남성들에겐 ‘작업’인 만남을 두고 볼 만큼 그는 마음이 넓지 못했다.

가면 갈수록 그녀의 주위를 맴도는 영식들이 많아지고 있었다. 이것은 매우 좋지 않은 징조였다.

“꼭 지금 가야 해요?”

“어. 지금 가야 해.”

샤로니아의 질문에 키언은 숨도 쉬지 않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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