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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요망한 구원자 (33)화 (33/123)

33화

“어머, 저것 좀 보세요.”

“살다 살다 저런 꼴을 다 보게 되다니.”

“망측하기도 해라.”

수런거리는 소리가 웅성거리며 들려왔다. 모두가 경악하며 입을 벌린 채 더랜과 샤로니아의 피날레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얼굴이 확 붉어진 더랜이 황급히 자세를 바로 했다.

살면서 이렇게 굴욕감을 느낀 적은 처음이었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더랜이 샤로니아에게 따지듯 물었다.

“이게 지금 무슨 짓입니까?”

마치 복화술처럼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이를 악물고 하는 말은 굉장히 위협적이었다.

“영식께 리드를 부탁드렸는데, 이런 자세를 취하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샤로니아가 말간 눈으로 ‘네가 그래놓고 왜 내 탓을 하느냐’고 돌려 말했다.

“하? 지금 그걸 말이라고!”

더랜이 결국 화를 폭발시키며 손을 치켜들었다.

“황제 폐하께서 납시셨습니다!”

그때, 누군가 커다랗게 키언의 입장을 알려왔다.

그 소리에 순간 치켜들었던 더랜의 손이 움찔했다.

상황의 심각성을 눈치챈 바르칼라 공작 부인이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뛸 듯이 키언을 맞으러 나갔다.

마치 처음부터 파티의 주인공이었던 것처럼 키언이 당당한 걸음걸이로 공작저에 들어섰다. 그를 본 귀족들이 일제히 무릎을 굽히고 고개를 숙이며 예를 갖추었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오지 않으실 줄 알았는데 어, 어떻게…….”

바르칼라 공작 부인이 바들바들 떨면서 인사를 올렸다.

넓은 홀을 한 바퀴 쭉 돌아본 키언의 표정이 순식간에 살벌하게 바뀌었던 탓이었다.

“짐이 못 올 곳을 온 것처럼 말하는군.”

“아, 아닙니다. 그, 그럴 리가요. 폐하께서 공작저까지 납시다니 여, 영광입니다.”

항상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고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고 있던 공작 부인이 비굴할 정도로 태도를 바싹 낮추었다.

본능적으로 불길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키언이 아까부터 불붙은 눈으로 자신의 아들을 노려보고 있었으니까.

“갑자기 볼일이 생겼거든. 누굴 좀 만나야 해서.”

키언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홀 중앙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정확히 더랜의 얼굴을 태울 듯이 노려보며 걸었기에 바르칼라 공작 부인이 안절부절못하면서 그 뒤를 따랐다.

키언이 더랜의 코앞까지 와서 걸음을 멈추었다. 더랜은 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리며 일단 예를 갖춰 인사했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

키언이 인사를 받아 주지 않고 고압적인 시선으로 자신을 내려다보자 더랜은 입술을 한차례 곱씹었다.

‘도대체 왜?’

방금 나타난 황제가 왜 이렇게 날 선 기운을 풍기는지 더랜은 이해할 수 없었다.

‘설마, 이 여자 때문에 그러는 건가?’

그것은 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성녀라고는 하나 자신을 모욕한 출신 성분도 알 수 없는 여자다. 벌을 받는 게 마땅했다.

성질대로 하자면 묶어놓고 채찍질을 해야 했지만, 성녀라는 신분 때문에 많이 봐준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뭘 했다고!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단 말이다!

그러니 황제가 저런 살기등등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볼 필요가 전혀 없었다.

“긴히 할 말이 있는데 따로 좀 보지.”

키언이 더랜을 향해 고갯짓을 까딱한 뒤 발코니 쪽으로 걸어갔다.

수런거리던 무리들이 키언이 다가오자 양편으로 쫙 갈라지며 길을 내주었다.

황제가 독대를 원하는데 거절할 수 없었던 더랜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그 뒤를 따랐다.

연회장은 1층이었기 때문에 발코니는 공작저의 후원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우수한 정원사가 혼신을 다해 가꾼 정원의 모습이 노란 불빛을 내뿜는 등과 어우러져 퍽 아름다웠다.

하지만 풍경 따윈 별 감흥이 없는 듯 키언은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후미진 곳까지 멈추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갔다.

아무도 없는 곳에 다다르자 키언이 걸음을 멈추었다. 길게 늘어진 나무의 그림자가 키언의 얼굴 위로 어둑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따로 하실 말씀이 무엇입니까?”

아직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는지 더랜이 성급하게 물었다. 아마 이 순간 키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알았다면 이런 질문은 감히 꺼낼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문을 몰랐던 더랜은 제 처지도 모르고 저런 질문을 입에 담았다.

“말만 하면 다행이겠지.”

키언도 그런 더랜의 태도에서 불쾌감을 느꼈는지 여전히 알아듣지 못할 말을 불친절하게 툭 내뱉었다.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더랜이 미간을 구겼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말은 안 하고 ‘행동’만 하고 싶어서 말이야.”

키언이 더랜의 손을 낚아채 뒤로 확 꺾었다.

“으악!”

안 그래도 아까 그 여자에게 손가락이 꺾이는 바람에 상태가 좋지 못했던 부위였다. 건장한 남성이 인정사정없이 손을 꺾자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다.

“감히, 어디다 손을 댄 거지?”

“뭐,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더랜은 흉흉한 키언의 눈빛을 바라보며 어떻게든 그 손아귀를 빠져나가 보려고 버둥거렸다.

“이 손으로 감히, 어딜 만졌느냐 물었다.”

감정을 꾹꾹 누른 음성이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당장이라도 그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지 않으면 손목을 부러뜨릴 것만 같았다.

배다른 형제들을 도륙하고 아르다시스 공작위를 거머쥔 남자. 잔혹한 전쟁귀라 불리며 참여하는 전쟁마다 승리를 이룬 남자. 그리고 지금은 누구도 도전할 수 없는 황제라는 권위를 가진 남자.

그런 남자라면 제 손목쯤은 간단하게 부러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그건 실수였습니다.”

더랜이 울상이 되어 중얼거렸다. 아주 구차한 변명이었다.

“보고 받기론 공자의 오른손이 몹쓸 짓을 저질렀다는데.”

오른손이 없어지면 꽤 불편하겠군. 표정 변화가 전혀 없이 중얼거리는 키언의 말에 더랜이 기함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자, 잘못했습니다! 폐하.”

“잘못한 사람치곤 고개가 뻣뻣하군.”

마치 죽이기 직전의 벌레를 바라보는 것처럼 감흥 없는 시선은 더랜의 팔 위로 오소소 소름이 돋아나게 했다.

“다시는 그, 그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더랜은 자신이 숙일 수 있는 최선의 자세로 키언에게 용서를 구했다.

“그 말, 반드시 지켜야 할 거야.”

키언이 그의 팔을 던지듯 휙, 놓았다.

“으윽!”

더랜이 손목에 통증을 호소하며 다른 손으로 아픈 부위를 움켜쥐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손목이 벌겋게 부풀어 있었지만, 지금은 손목이 제자리에 붙어 있는 것에 감사해야 할 처지였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키언은 더랜을 남겨두고 다시 연회장으로 향했다.

“하? 나도 손대고 싶은 걸 억지로 참고 있는데 말이야.”

걷는 내내 그는 화가 가라앉지 않는지 계속 중얼거렸다.

근래에 업무가 많아 바빴던 탓에 그는 샤로니아의 얼굴을 자주 보지 못했다. 그녀만 보면 발동이 걸리는 몸뚱어리 때문에 의도적으로 그녀를 피했던 건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녀가 바르칼라 공작 부인이 주최하는 파티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그것도 헤이든의 에스코트를 받아 막 출발하면서.

‘빨리 초대장을 찾아봐.’

키언이 테오르를 닦달했다.

그는 황제가 된 이래, 황실에서 주최하는 무도회가 아닌, 다른 장소에서 열리는 무도회에 사적으로 참석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귀족들은 황제가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그저 예의상 초대장을 보냈다. 그래서 무도회 초대장 같은 것은 따로 모아두었다가 폐기하는 것이 황실의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초대장을 찾아보라니?

테오르는 수많은 초대장 속에서 ‘바르칼라’라는 이름을 찾느라 눈알이 튀어나올 뻔했다. 물론 황제는 초대장이 없이도 찾아갈 수 있는 존재이긴 했지만, 그래도 귀족 사회에는 그런 종이 쪼가리가 명분을 쥐여 주는 법이었다.

간신히 초대장을 찾은 키언이 공작저로 들어서자 미리 연회장에 파견되어 샤로니아를 지켜보던 수하가 기함할 만한 보고를 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그녀에게 접근하는 놈팡이를 제거하기 위해 사람을 붙였던 것이다. 제 눈에 매력적인 여자는 다른 이들의 눈에도 매력적일 테니까.

더군다나 어디에다 손을 대? 키언이 까득 이를 갈았다.

생각 같아서는 정말로 손을 없애 버리고 싶었지만, 키언은 바르칼라 공작을 생각해서 백번 참았다.

더랜과 함께 나갔던 황제가 아까와 달리 혼자 연회장에 들어서자 사람들의 시선이 다 키언에게 쏠렸다.

“아름다운 밤입니다. 마르브 후작 부인, 오늘 화장이 아주 잘되셨네요. 오, 디아베네 백작 부인, 그간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왜 이렇게 젊어지셨어요?”

키언은 자신에게 접근해 오는 사람들에게 능청스러운 인사를 건네며 안으로 쭉쭉 들어갔다.

그를 붙잡고 말을 붙이려던 사람들은 키언이 짓는 신사적인 미소에 잠시 멍해졌다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그가 저만치 멀어진 뒤였다.

샤로니아를 향해 곧장 걸어온 키언은 그녀에게 크리스털 성수 병을 받고 있던 귀족 남성들을 보고 돌처럼 굳었다.

그녀를 보며 헤죽거리고 웃던 놈들의 이름을 다 적어 둬야지. 그 명부가 살생부가 되지 않길 기도해야 할걸.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당연히 시선이 고울 리가 없었다.

“폐, 폐하, 저희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좋은 시간 되십시오.”

눈치 빠른 영식들이 서로를 쿡쿡 찌르며 급하게 인사를 한 뒤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제 사업을 방해하시면 폐하께도 손해라는 거 아시죠?”

샤로니아가 키언 덕분에 도망간 영식들을 아쉬움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꽤 적극적인 고객들이었는데.

그녀의 눈빛을 바라본 키언이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 올렸다. 평소엔 지나치게 똑똑하고 해박해 보이는 그녀가 비어 보일 때가 바로 이런 때였다.

저렇게 빤히 보이는 수작질도 간파하지 못하다니. 그 놈팡이들은 상품 구매에 적극적인 게 아니라, 네게 적극적인 거라고!

키언은 그렇게 말하진 못하고 끙, 앓는 소리를 냈다. 이걸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빚 말이야. 안 갚아도 돼.”

키언이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어차피 쓰는 돈 없이 차곡차곡 쌓이기만 하는 돈이었다. 테오르가 주기적으로 자산 규모에 대해 보고를 하지만 늘어나는 숫자를 헤아리는 것이 귀찮아서 자세히 보지 않을 정도로 막대한 재산이기도 했다.

뭐, 요즘 급격히 잔고가 줄어드는 것이 이상하긴 했지만, 어차피 그녀에게 들어가는 돈이면 상관없었다. 그리고 평소에 비해서 자산이 급격히 줄고 있다는 것이지 애당초 고갈될 수준의 자산은 아니었으니까.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원래 가까운 사이일수록 계산은 더 정확하게 해야 하는 법이에요.”

그 말을 하며 샤로니아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든지, 눈에 잔뜩 힘주고 있다든지 하는 것은 키언에게 보이지 않았다. 오직 ‘가까운 사이’라는 말만 귓가에 꽂혔다.

가까운 사이라……. 그건 그렇지. 아주, 가까운 사이지. 그의 입매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알았어. 뭐 그렇다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그 대신 나랑 춤춰.”

키언이 뜬금없이 춤을 추자고 하는 바람에 샤로니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저 춤 잘 못 추는데 괜찮으시겠어요?”

“괜찮아.”

무조건 괜찮아야 했다. 금발의 놈팡이가 그녀의 첫 춤을 빼앗아 가 버린 건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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