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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요망한 구원자 (32)화 (32/123)

32화

“그럼, 우리는 또래끼리 친해지도록 자리를 좀 비켜 줄까요?”

바르칼라 공작 부인이 은근슬쩍 무리를 선동해서 자리를 옮겼다.

그런 상황에 계속 옆에 있을 수 없었던 헤이든도 샤로니아에게 슬쩍 눈짓을 한 뒤 다른 쪽으로 이동했다.

주변에 사람들이 없어지자 에일린은 기다렸다는 듯이 본색을 드러냈다. 기회를 잡은 승냥이처럼 오만하게 미소 짓는 모습이 앞으로 그녀가 할 말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았다.

“신녀들은 길거리 여자들과 다를 바 없다던데, 성녀라고 뭐 다를 게 있겠어요?”

속을 긁기로 작정한 듯 아예 대놓고 하는 말에 샤로니아는 실소했다. 엄청난 말을 준비해 온 줄 알았는데 한다는 말이 고작 저런 거라서.

“공작 영애께서 지금 무슨 대답을 듣고 싶은 건지 모르겠군요. 제 입에서 스스로를 길거리 여자라고 칭하는 걸 듣고 싶어서 질문하는 것처럼 들리니 말입니다.”

표정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되받아치는 말에 에일린의 입꼬리가 살짝 떨렸다.

“오해하지 마세요. 그냥 궁금해서 한 질문일 뿐이니까요.”

“아아, 궁금해서 그러셨군요. 듣기에 따라 신성 모독으로 들릴 수 있는 말도 궁금하면 하실 수 있지요.”

샤로니아가 뼈있는 말을 중얼거리며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리자 에일린의 표정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예상한 것보다 더 보통내기가 아니야.’

에일린은 눈에 힘을 주고 생각을 가다듬었다.

황제의 총애를 독차지한다는 여자. 그녀가 아무리 성녀라지만 질투에 눈이 먼 여자에게는 그저 내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방해물일 뿐이었다.

“진짜 궁금한 것은 따로 있는 것 아닙니까?”

샤로니아의 질문에 에일린이 말려들지 않으려고 주먹을 꼭 그러쥐는 것이 보였다. 저렇게 눈에 훤히 보이는 행동만 계속 해 대니 이제는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무, 무엇을 말입니까?”

가만히 에일린의 얼굴을 바라보던 샤로니아가 그녀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가령, 황제 폐하께서 침대 위에서 어떤 표정을 짓는지?”

그 말대로 상상해 버린 에일린의 표정이 화악 붉어졌다.

그녀가 아무리 악녀를 자처해도 그녀는 이제 막 데뷔탕트를 앞둔 19살 소녀였다. 그런 그녀가 남녀의 내밀한 일까지 자세하게 알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샤로니아도 별반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머릿속에는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고 술술 얘기할 수 있는 방대한 지식이 있었다.

“지, 지금 절 놀리는 겁니까?”

에일린이 발끈해서 목소리를 높이자 연회장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도 바르칼라 공작 부인의 서늘한 시선이 느껴졌던 탓에 에일린은 황급히 입술을 말아 물었다.

“놀리다니요? 저도 엄연히 ‘궁금한 것’에 대해서 질문한 것뿐인데요.”

샤로니아가 연회장 곳곳에 아무 일도 아니라는 뜻을 담아 미소를 보내며 말했다.

샤로니아에게 완전히 대화의 우위를 내준 에일린의 표정이 썩어들어 갔다.

‘안 돼! 기선 제압이 중요하단 말이야! 밀리면 안 돼!’

에일린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표정을 다잡았다.

그녀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황후의 자리가 자신의 것인 줄 알고 자라왔다. 그리고 그녀 역시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이고, 에일린 황후 폐하.’

집에서는 모두들 자신을 그렇게 불렀다. 자신의 아버지가 제국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공작인데 황후가 되지 못할 리가 없지 않은가.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그 자리는 자신의 것이어야 옳았다. 모두가 그렇게 입을 모아 말했으니까.

그러니 그녀는 신앙을 빙자하여 제 남편의 침실에 들락거리는 존재를 묵인해 줄 생각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남편이 될 사람’이었지만 에일린의 머릿속에는 자신이 황후가 되는 것이 기정사실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중요치 않았다.

‘절대로 밀리면 안 돼!’

에일린은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바꾼 뒤 말했다.

“요즘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그러는지. 제 주제도 모르고 남의 자리를 탐하는 자들이 있다는데, 성녀님께선 그런 소문에 대해 들어 보지 못하셨습니까?”

그건 네 얘기잖아. 샤로니아가 튀어 나가려는 말을 간신히 삼키며 웃었다.

“글쎄요? 그런 자가 어디 한둘이어야지요.”

결국은 모두 실패였다. 그 후로도 몇 번이나 샤로니아를 꺾기 위해 말을 주고받았던 에일린은 혼자 성질만 나서 씩씩거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대화를 끝내고 자리를 옮긴 에일린은 화를 삭이지 못하고 샴페인을 들이켰다. 신전에서는 말싸움하는 법도 가르치는 건가. 아니면 원래부터 저렇게 재수 없게 생겨먹은 건가.

독이 잔뜩 오른 에일린의 모습을 보고 다가온 그녀의 오빠, 더랜 바르칼라가 물었다.

“누이께서 뭐 때문에 이렇게 골이 나셨을까?”

공작저에서도 에일린은 자주 패악을 부리곤 했지만, 가족들은 오히려 그런 그녀의 편을 들어주었다.

가장 정점에 서게 될 사람은 어차피 다른 이들의 감정 따윈 신경 쓸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것이 에일린의 난폭한 성격의 원인이었다.

더랜을 만난 에일린의 눈에 일순 반짝 빛이 들어왔다. 샤로니아를 골탕 먹일 계획이 떠올랐던 것이다.

에일린이 더랜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더랜이 가까이 다가가자 에일린이 그에게 귓속말로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리고 둘은 서로 마주 보며 씨익 웃었다. 평상시에는 데면데면한 남매였지만 이런 일을 벌일 때만큼은 죽이 잘 맞았다.

“꼭 제대로 해야 해.”

에일린은 더랜에게 몇 번이나 당부했다. 자신의 계획이 성공해서 꼭 저 재수 없는 성녀가 망신당하는 꼴을 보고 싶었다.

“알았으니까, 넌 걱정하지 마.”

더랜이 아주 흥미로운 눈빛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샤로니아를 주시하며 말했다.

그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는 샤로니아에게 다가가 그윽한 목소리를 꾸며 냈다.

“실례합니다. 아름다운 레이디에게 인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샤로니아는 자신을 알은척하는 이를 향해 몸을 돌렸다.

더랜이 살짝 허리를 숙이며 예를 갖춘 뒤 샤로니아를 바라보며 눈을 찡긋했다.

“……눈에 뭐가 들어갔나요?”

더랜의 얼굴을 멀뚱히 쳐다보던 샤로니아가 손수건을 건네며 말했다.

“하, 하, 하. 감사합니다. 친절하시군요.”

왜 이렇게 식은땀이 나는 거지? 더랜은 당황해하며 일단 손수건을 받아 들었다. 여자가 건네는 호의를 받지 않는 건 굉장히 무례한 짓이었으니까.

그는 자신의 외모에 꽤 자신이 있었다. 자신이 보낸 윙크 한 방에 넘어간 영애가 수도 없이 많건만. 자신이 작정하고 건 수작질에 이토록 아무 반응이 없는 여자는 처음이었다. 당황스러웠지만 그래서 더 흥미가 생겼다.

‘도대체 이 여자는…….’

더랜은 처음 접해 보는 유형의 여자를 관찰하듯 살폈다.

“소개가 늦었군요. 더랜 바르칼라입니다.”

“아, 이번에 성녀로 선택받은 샤로니아 파르비즈입니다.”

샤로니아는 더랜의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자신의 예상이 맞는 것에 쓴웃음을 지었다.

더랜은 공작 부인과 같은 금발이었다. 하지만 눈동자 색은 에일린과 같은 붉은색이었다.

붉은 눈동자를 보는 순간 ‘바르칼라’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예상이 적중하니 입 안이 썼다. 그도 별반 좋은 의도로 접근한 건 아닌 것 같았으니까.

“괜찮으시다면 저와 한 곡 추시겠습니까?”

그가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이걸 거절하면 평판에 흠집이 생길 거다. 여기 있는 모두가 자신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었으니. 뭐라도 건수를 잡으면 득달같이 물고 늘어질 거라는 걸 샤로니아는 잘 알고 있었다.

‘춤은 싫은데.’

춤을 출 줄은 알았지만 안 춘 지 너무 오래였기에 몸이 굳어서 말을 듣지 않을 게 뻔했다.

‘망신을 주려는 속셈이겠지.’

그걸 알면서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거절했다간 무슨 뒷말이 나돌지 너무나도 뻔했으니까. 차라리 헤이든이 춤 신청을 했다면 고민하지 않고 받아들였을 텐데.

‘사업하기 정말 힘드네.’

샤로니아는 살포시 한숨을 내쉬며 더랜의 손을 잡았다. 그녀가 자신의 손을 잡자 더랜은 그러면 그렇지, 고개를 주억거리며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제가 좀 부족하더라도 영식께서 잘 리드해 주실 거라 믿어요.”

내리깐 샤로니아의 속눈썹을 보는 더랜의 눈빛에 이채가 서렸다.

엉뚱한 것도 같고, 연약한 것도 같고, 또 어떻게 보면 영악한 것도 같다. 어느 것이 진짜 모습일까? 그의 호기심에 불이 붙었다.

“그럼요. 저만 믿으십시오.”

더랜이 그린 듯한 미소를 지으며 샤로니아를 이끌고 홀 중앙으로 나왔다.

때마침 새로운 곡이 연주되려 하고 있었다. 둘은 서로 마주 보고 서서 파트너에 대한 예를 갖추어 인사했다

악단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서로에게 다가서서 손을 겹치고 허리에 손을 올린 그들은 연주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어떤 분이실지 내내 궁금했습니다.”

더랜이 노골적인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하지만 샤로니아는 그 눈빛을 보고 두근거리기는커녕 속이 느글거릴 뿐이었다.

의도치 않게 키언의 눈빛이 떠올랐다. 보고 있으면 황홀해지는 황금빛 눈동자. 제 속의 불순물을 모조리 녹여 낼 것처럼 찬란하고 뜨거운 금빛 눈동자는 노골적인 추파가 담긴 더랜의 눈동자와 더욱 극명하게 비교되었다. 그래서 그의 붉은 눈동자를 바라볼수록 오히려 차갑고 냉철해졌다.

“‘바르칼라’들께서 제게 궁금하신 것이 참 많으시네요.”

샤로니아는 에일린과 더랜을 따로따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에일린은 그녀에게 궁금하다는 것을 핑계로 막말을 해 댔고, 그 오빠는 궁금하다는 것을 핑계로 추파를 던지니 말이다.

보통 여자의 귓가에 관심을 속삭이면 표정에 변화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샤로니아의 표정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집안을 들먹이니 이게 무슨 말인가 싶다. 더랜이 고심하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에일린이 왜 그렇게 독기를 뿜어 냈는지 알 것 같다.

‘이 여자 보통이 아니야.’

더랜은 그렇게 생각하며 싱글싱글 웃었다. 그녀는 무료한 일상에서 만난 아주 재미있는 흥밋거리였으니까.

“당신을 좀 더 알고 싶은데,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더랜이 샤로니아에게 몸을 밀착했다. 명백한 유혹이었다.

그는 제 외모가 여성에게, 특히나 미혼 여성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균형 잡힌 몸매와 큰 키, 그리고 빛나는 금발과 카리스마 넘치는 붉은 눈동자가 뭇 여성들의 시선에 어떻게 보이는지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순간, 샤로니아는 생각했다.

‘발을 확 밟아 버려?’

정신 나간 주둥이를 발로 밟아 줄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녀가 고개를 살짝 꺾으며 생각하는 모습을 고민하는 것으로 받아들인 더랜이 조금 더 수위를 높여 접근했다. 허리에 올려놓았던 그의 손이 슬금슬금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이 미친놈이!’

샤로니아는 제 엉덩이를 만지는 손길에 기함하며 마력을 뿜어 냈다.

우둑, 더랜의 손가락이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꺾였다.

“악!”

놀란 더랜이 신음을 내뱉는 사이 춤은 절정에 다다랐다.

춤의 피날레는 완전히 몸을 뒤로 젖힌 여자의 허리를 남자가 받치는 동작이었다. 그런데 손가락이 꺾인 더랜이 당황한 사이 역할이 뒤바뀌었다. 샤로니아가 마치 남성처럼 몸이 뒤로 젖혀진 더랜의 허리를 받친 채 춤이 끝났다.

굴욕적인 모습으로 춤을 마치게 된 더랜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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