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햇볕이 내리쬐는 오후, 샤로니아는 헤이든 델라크 백작과 함께 티타임을 갖는 중이었다.
“제국 내에 성녀님의 무용담이 퍼지고 있는데, 아세요?”
헤이든이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녀는 이번 호라산행에 참여하지 못한 것이 꽤 아쉬웠다.
뱀 마물이라니! 생각만 해도 짜릿하지 않은가.
자신이 그 마물을 처리했어야 하는데. 그런 생각에 자꾸만 아쉬운 입맛을 다셨지만 그녀는 이번에 따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보나 마나 실제 이야기보다 잔뜩 부풀려졌겠지요.”
샤로니아가 여상하게 답하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어차피 소문이란 것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부풀기 마련이었고, 떠들어 대기 좋아하는 이들을 통해 극적으로 변하기 일쑤였다.
“성녀님이 여신의 현신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어요. 구름을 불러들여 비를 내리고 벼락을 쳐서 마물을 물리친다고요.”
헤이든이 아주 재미있다는 듯이 하는 말에 샤로니아가 끙, 앓는 소리를 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과장되어 있을 줄이야.
아무래도 민심은 실제 사실에 관심 있다기보다는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볼 것이었다. 팍팍한 현실에서 의지할 만한 대상이 필요했으니까.
그런 마음은 쉽게 소문을 부풀리고 사람을 신격화시키기 마련이었다.
“저는 비를 내리지 않았어요. 정말 우연일 뿐이었죠. 더군다나 벼락을 치다니.”
샤로니아가 허허롭게 웃으며 잘못된 사실을 정정해 주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헤이든은 마치 샤로니아가 겸손이라도 떠는 것처럼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아무렴 어때요? 자기들이 그렇게 믿겠다는데.”
헤이든은 이렇든 저렇든 돌아가는 형국이 재밌나 보다. 그녀의 입가에서 연신 웃음이 떠나지 않는 걸 보면.
“아, 내 정신 좀 봐. 이걸 전해 드리려고 왔는데.”
헤이든이 씨익 웃으며 샤로니아에게 인장이 찍힌 초대장 하나를 내밀었다. 봉투를 살펴보던 샤로니아의 눈이 잠시 커졌다.
“바르칼라 공작 부인이 보낸 것이네요?”
루하르 제국에서 현재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가문 중 하나가 바르칼라 공작가였다. 바르칼라 공작저에서 열리는 파티 초대장을 받게 될 줄이야.
“제가 힘 좀 썼지요.”
헤이든이 보란 듯이 제 가슴을 텅텅 두드렸다. 그 모습이 너무도 듬직해 보여 샤로니아는 피식 웃고 말았다. 정말로 헤이든이 이 정도로 신경 써 줄 줄 몰랐으니 말이다.
“감사해요. 생각보다 일이 수월해지겠어요.”
“제가 그날 에스코트하죠. 기왕지사 도와드리기로 한 것, 아주 제대로 해 보려고요.”
샤로니아는 사교계를 통해 부를 창출할 계획을, 헤이든은 샤로니아가 사교계를 통해 입지를 다져 황후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도울 계획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한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전혀 다른 미래를 생각하고 있는 줄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럼, 잘 부탁드려요.”
둘은 마주 보고 싱긋 웃었다.
* * *
오늘 밤은 기필코 샤로니아와 함께 보내겠다는 생각에 쉬지 않고 일을 해치운 키언이 업무를 마무리 짓고 침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려던 키언이 멈칫했다. 안에서 샤로니아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감히, 주인도 없는 침실에서 황제가 총애하는 여인과 대화를 나누는 정신 나간 놈은 누구일까. 반드시 그 면상을 확인해야 했다.
키언이 사나운 기운을 억지로 갈무리하며 벌컥, 문을 열었다.
“오셨어요?”
샤로니아가 소파에 앉아 있다가 일어나며 그를 반겼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 정신 나간 놈’은 없었다.
“누가 있지 않았나?”
키언이 한쪽 눈썹을 슬쩍 들어 올리며 묻자 샤로니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쭉 저 혼자 있었어요.”
거참, 이상한 일이군. 키언은 느리게 턱을 쓰다듬으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너무 피곤한 나머지 환청이 들렸나?’
그는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상황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잘못 들었을 리가 없는데. 오늘따라 업무를 과중하게 처리한 게 원인인가? 그는 풀리지 않는 의문 때문에 느리게 턱을 문질렀다.
“일이 바쁘신가 봐요.”
소파에 털썩 주저앉는 키언의 앞에 샤로니아가 달칵, 잔 하나를 내려놓았다.
“이제 바쁜 일은 다 끝났어. 그런데, 이게 뭐지?”
키언은 잔을 들여다보았다. 안에 든 액체는 아무런 색이 없었다. 마치 물처럼. 하지만 어디선가 맡아본 익숙한 향이 났다.
“일전에 말씀드린 민트 향이 나는 성수예요.”
아아, 그래, 민트 향. 키언은 그녀와 함께 분수대에서 보았던 워터 민트를 떠올리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건 시음용으로 만들어 본 거예요. 이래 봬도 치유 성분이 들어있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짐더러 이걸 마셔 보라는 건가?”
“네!”
샤로니아가 말갛게 웃으며 대답했다.
키언은 잔에 든 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뭐, 독을 탔을 것 같진 않지만 저토록 사랑스러운 얼굴로 내미는데 도저히 모른 척할 수가 없다.
황제를 실험용으로 삼는 건 네가 유일할 거야. 키언이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리며 잔에 든 물을 마셨다.
“당연히 검증은…… 된 거겠지?”
키언이 미심쩍다는 듯이 두 눈을 좁혀 뜨며 물었다.
“인체에 무해한 성분이니 괜찮을 거예요. 폐하의 반응을 보고 용량을 조절하려고 해요.”
그 말은 검증이 안 됐다는 뜻이잖아! 키언이 헛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 순간, 몸에 뜨거운 열기가 훅 솟구쳤다. 단전을 뒤틀리게 하며 온몸으로 뻗어나가는 열감은 키언을 꽤 당혹스럽게 했다.
“이거, 무슨 치유 성분이 들어 있는 거지?”
“음…… 일종의 자양강장제 같은 거예요.”
키언의 표정이 좋지 못하자 샤로니아가 바짝 얼굴을 들이밀고 그를 관찰했다.
“어디가 안 좋으세요?”
그게 어딘지 어떻게 말해! 어딘지 말하면 알기는 하고? 키언은 다가온 그녀에게서 나는 달큼한 체취를 맡으며 으윽, 신음을 흘렸다.
“일단, 어떻게 제조한 건지 방법을 말해 봐.”
키언이 허공에 손을 휘적거리며 그녀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어떻게 만든 것인지 방법을 알면 해결할 방안이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민트 잎을 넣고 우린 물에 마력을 불어넣는 거예요. 근데 아직 마법을 사용하는 게 서툴러서…….”
샤로니아가 물이 담긴 잔을 끌어다가 앞에 두고 시연을 시작했다.
“황제 폐하께서 드시고 기운이 날 수 있도록, 부탁해.”
그러자 잔에 담긴 물이 대답이라도 하듯 빙글빙글 회오리쳤다.
그 황당한 모습에 당황한 키언이 벙하게 입을 벌렸다.
“방금…… 물에게 부탁을 했나?”
“네, 그런데요.”
“…….”
키언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잘못 들은 건 아니었네.’
아까 방에서 말소리가 들렸던 것은 샤로니아가 이렇게 물에게 부탁을 해 치유력이 담긴 성수를 만들고 있었던 탓이었다.
허어어, 키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부탁’ 같은 걸로 이렇게 대단한 효과를 낼 수 있다고?
“아무래도 제가 대상자를 생각할 때 기운이 많이 들어간 것 같아요.”
몸이 끓어올라 정신없는 와중에도 그 말은 귀에 콱 꽂혔다.
“그러니까 네 말은, 짐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는 뜻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과한 효능이 나타날 리가 없어요. 제가 무의식적으로 폐하께서 기운이 넘치셨으면 했나 봐요.”
그래, 네 바람대로 기운이 아주 펄펄 솟는구나. 키언은 쓰게 웃었다.
아무래도 제 몸뚱어리는 너무 건강해서 기운이 다 그쪽(?)으로만 가는 것 같았다.
그래도 한 가지 위로가 된다면 그녀가 자신을 많이 생각해 주었다는 것인데. 그 생각이 오히려 자신을 위험에 빠트린 줄은 알고 있을까?
그의 시선이 샤로니아의 입술에 들러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해독제를 만들어 주든지, 아니면 네가 책임을 지든지 둘 중 하나를 하도록 해.”
키언이 가쁜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젠장, 열기가 들끓어 생각을 이어가는 것도 힘들었다. 뭐가 이렇게 마음대로 되는 게 없는지.
그는 두 눈을 꾹 눌러 감고는 최대한 이성적인 판단을 하려고 노력했다. 이런 상태면 차라리 그녀가 곁에 없는 게 낫지 않을까. 샤로니아를 하트론 궁으로 돌려보내는 게 나을지 키언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해독제는…… 생각을 안 해 봐서. 어차피 하루 한정이거든요.”
샤로니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괴롭게 일그러진 표정이 무척 고통스러워 보였다.
“어떻게 하면 괜찮아질까요?”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던 샤로니아가 미안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물었다.
열기에 휩싸인 몸이 노곤해지는 바람에 소파 등받이에 느른하게 몸을 기댄 키언이 손짓을 했다.
“이리 와.”
샤로니아는 잠시 주저하다가 결심한 듯 그에게 다가갔다.
키언의 뜨거운 손이 그녀의 가는 손목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바로 그의 품으로 몸이 훅 딸려 들어갔다.
“미안하면 키스해 줘.”
열기를 머금고 탁하게 갈라진 그의 목소리가 너무도 자극적이었다.
샤로니아는 그의 무릎 위에 올라탄 자세로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결 좋은 은발이 엉망으로 흐트러졌다. 언제나 태양처럼 밝은 빛을 흩뿌리던 금빛 눈동자가 욕망에 침잠되어 있었다.
사락사락, 샤로니아가 그의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당신과 닿으면 이상해지는 것 같아. 샤로니아가 짙어진 눈길로 그의 뺨을 쓸었다. 자신의 손길을 애타게 갈구하는 남자의 눈빛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당신도 나와 같은 기분일까. 샤로니아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인간의 몸에 이토록 많은 감각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로 인해 처음 알았다.
피부가 스치는 것만으로도 전율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그와 닿고 나서 처음 깨달았다.
“샤론…….”
꽉 들어찬 열기가 그의 금빛 눈동자 가운데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렸다.
“괴롭게 만들 생각은 없었어요.”
사과하듯이 중얼거린 샤로니아가 그의 입술에 촉, 입을 맞췄다.
부드럽고 뜨거웠다. 그녀는 다시 그의 입술을 물었다 놓았다. 마치 그의 뜨거운 기운이 제게로 옮겨 오는 것 같았다.
샤로니아는 다시 촉, 입을 맞췄다. 가볍게 맞닿은 입술이 떨어지려는 순간, 키언은 그녀의 입술이 떨어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흣!”
숨소리 하나까지 먹어 치울 것처럼 강렬한 입맞춤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주도권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무릎 위에 자리를 잡고 있던 그녀의 뒷덜미를 받친 키언이 방향을 휙 돌렸다.
풀썩, 샤로니아의 등이 소파에 닿았다.
뜨거웠다. 입술을 삼키는 느낌도 그의 손길도, 모든 것이 뜨거웠다.
“네가 책임져.”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고막을 녹일 것 같았다. 샤로니아는 저도 모르게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불을 머금은 것 같은 입술이 그녀의 쇄골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발끝이 곱아드는 느낌에 샤로니아가 흡, 숨을 들이켰다. 마치 아득한 황홀경에서 꿈을 꾸는 것 같았다.
키언에게 매달리며 밭은 숨을 토해 내던 샤로니아가 자신의 허벅지를 스치는 손길에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녀의 반응에 키언의 정신이 돌아왔다. 아무리 검증도 안 된 액체를 마셨다고는 하나 그 핑계로 짐승처럼 굴 작정은 아니었다. 실수를 할 뻔했다.
“이렇게 널 안고 싶진 않아.”
그녀에게 진심이 된 순간, 키언은 다짐했다. 강제로 그녀를 취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열에 취해서 이를 꽉 깨물고 중얼거리는 키언을 샤로니아가 보듬어 안았다.
“미안, 미안해요.”
당신의 손길에 오르내리는 이 마음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나면 당신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그땐 제가 먼저 다가갈게요.’
샤로니아의 마음을 모르는 키언은 그녀의 사과가 약을 잘못 조제한 것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인지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