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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요망한 구원자 (29)화 (29/123)

29화

“내일 아침은 거르는 게 좋겠어.”

키언 덕분에 배가 더부룩할 정도로 과식한 샤로니아가 엘런을 보고 말했다. 하지만 샤로니아가 평상시보다 음식을 많이 먹은 게 좋았던 엘런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앞으로 아침 식사는 황제 폐하와 만찬장에서 함께하기로 한 것 아니셨어요?”

“아참, 그랬지.”

샤로니아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이마를 짚었다.

자신이 나흘 만에 깨어난 이후로 키언은 과한 행동들을 서슴없이 했다. 혼이 쏙 빠질 정도의 키스를 거리낌 없이 하고, 황궁 주방을 다 턴 것처럼 많은 양의 음식을 방으로 나르게 했으며, 아침 식사 약속을 잡는 것까지 일사천리였다.

다른 사람의 시선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황제를 말리는 것이 맞을까, 아니면 내버려 두는 것이 맞을까.

‘뭐, 총애 받는 성녀 콘셉트에 완벽하게 부합하긴 한데…….’

문제는 이게 콘셉트가 아니라, 진심인 것 같다는 것이다. 자신까지 진심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샤로니아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이건 나중에 생각해야겠다. 다른 생각할 거리들이 많았으니. 그보다도 자신이 정신을 잃고 있었던 나흘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엘런, 동굴은 어떻게 됐어? 호라산에서 마물이 나왔던 그 동굴 말이야.”

“아, 성녀님께서 마력을 방출하시면서 마물도 죽고 동굴 지붕도 날아갔는데, 다행히 저희가 빠져나오고 동굴이 붕괴되었어요.”

“무너졌다고……?”

샤로니아가 안타깝다는 듯이 침음을 내뱉었다. 그곳에는 마정석이 있었으니까.

동굴에서 보았던 마정석 정도라면 웬만한 귀족 가문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몇 대에 걸쳐 살 수 있을 정도의 양이었다. 어마어마한 가치의 마정석이 땅 속에 그대로 매장되었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한숨이 쏟아져 나왔다.

그런 샤로니아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엘런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혹시, 마정석 때문에 그러시는 거예요?”

“그래, 맞아. 다시 호라산까지 갈 수도 없으니…….”

그 말을 들은 엘런이 주섬주섬 뭔가를 꺼내 왔다. 

“저기, 이거…….”

그녀가 묵직해 보이는 자루를 건네자 샤로니아의 눈의 휘둥그레졌다. 샤로니아는 자루 안에 든 내용물이 무엇일지 궁금해하며 엘런이 수줍게 내민 자루 입구를 열었다.

“응? 이건……!”

자루 안을 들여다본 샤로니아의 눈이 커다래졌다. 붉은빛을 띤 반투명한 돌. 분명히 마정석이었다! 그것도 한 자루 가득씩이나 되다니!

“경황이 없어서 이것밖에 챙기지 못했어요.”

“오, 엘런. 이것밖에라니!”

샤로니아가 벌떡 일어나 엘런을 꽉 끌어안았다.

다음 날 아침, 키언과 아침을 먹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샤로니아는 본궁의 만찬장에 갈 준비를 했다.

“음? 이게 다 뭐야?”

옷장을 열어본 샤로니아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화려한 의상들이 색깔별로 빼곡히 진열되어 있었다. 드레스 한 벌에 들어가는 옷감이며 보석 따위를 계산하면 어지간한 집 한 채는 살 수 있을 텐데, 그런 드레스가 옷장을 가득 메우고 있다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성녀니임! 몸은 괜찮으세요?”

때마침 들른 이멜다가 목소리를 높였다.

“괜찮아.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성녀님께서 안 계시는 동안 열심히 만들었어요!”

이멜다가 굉장히 뿌듯하게 드레스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샤로니아는 잠시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아, 이멜다를 한 번 보았다가 다시 드레스가 가득 찬 옷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에게 웃어주고 싶었지만 입꼬리가 고장 난 것처럼 올라가지 않았다.

‘도대체 왜 시키지도 않은 일을…….’

샤로니아는 잘 훈련된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며 보상을 바라듯 자신을 보는 이멜다의 시선에 차마 생각한 말을 내뱉지 못했다.

“수고, 많았어.”

샤로니아는 어색하게 말하며 이멜다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주었다.

뺨에 홍조를 떠올린 이멜다가 헤헤, 수줍게 웃었다.

“그런데 무슨 돈으로 이 많은 드레스를 만든 거야?”

“빌렸어요. 황실 보좌관님이 빌려주시던걸요.”

이멜다는 테오르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마음껏 의상을 만들 수 있었다. 그녀는 테오르가 왠지 돈을 빌려주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원하는 드레스를 실컷 만들 수 있다는 사실에 들떠 주의 깊게 생각하진 못했다.

테오르가 키언의 개인 자금이 줄어드는 것을 보며 소소한 쾌감을 즐기고 있다는 것을 몰랐던 샤로니아는 그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성녀님은 부자가 되실 거니까 이자까지 쳐서 갚으실 수 있죠?”

이멜다가 도르륵, 눈을 굴리며 샤로니아의 눈치를 살폈다. 그 표정이 마치 세상에 가장 중대한 사안에 대해 묻는 것처럼 절박하고 간절했기에 샤로니아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부자야 당연히 될 수 있지. 그녀는 피식 웃으며 이멜다의 뺨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조금만 기다려. 곧 엄청난 부자가 될 테니까.”

꺄악, 성녀님 최고! 소리를 높인 이멜다가 잔뜩 흥분한 채 샤로니아에게 드레스를 대보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엔 이 드레스가 잘 어울리실 것 같아요. 아니, 이것도 괜찮은데. 이것도!”

이멜다가 꺅꺅거리는 것을 보고 샤로니아와 엘런이 어색하게 시선을 주고받았다.

누가 저 아이 좀 말려 줘!

* * *

호라산에 다녀오면서 여러 날 정무를 쉬었기 때문에 황궁에 돌아온 키언은 무척 바빴다.

물론 테오르가 그 대신에 많은 일을 처리하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중요한 사안들은 그의 손을 거쳐야만 했다.

그래서 어젯밤은 샤로니아에게 가지 못했다. 바빠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건 괜찮았는데 그녀를 보지 못한 건 무척 아쉬웠다.

조급한 마음을 대변하듯 만찬장으로 가는 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다행히 아직 약속 시간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는 그녀와 처음으로 정찬을 갖는 것이었기 때문에 신경이 쓰였다.

자리에 앉아 샤로니아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던 키언은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저도 모르게 발끝을 까딱거렸다.

“주방장에게 특별히 신경을 쓰라 일렀겠지?”

키언의 질문에 테오르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너무 많이 얘기해서 주방장이 신경병에 걸리지 않을까 걱정됩니다만.”

테오르의 말에 키언이 눈을 흘겼다. 테오르는 크흠, 낮게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그 모습을 본 키언이 갑자기 잊었던 무언가가 떠오른 것처럼 테오르에게 질문했다.

“아, 안 그래도 묻고 싶었던 게 있었는데. 요즘 내 개인 자금이 급격히 줄어드는 것 같아서 말이야.”

테오르의 눈동자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뭘 알고 묻는 건가? 아니면 그냥 궁금해서 묻는 건가? 성녀 쪽에 돈을 빌려주는 것은 이미 그의 허락이 떨어진 일이었지만, 자신이 자진해서 돈을 퍼 나르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그, 그게 말입니다. 아무래도 성녀님의 품위 유지를 위해 당분간 돈이 많이 필요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테오르가 더듬더듬 변명을 늘어놓을 때였다.

“성녀님께서 오셨습니다.”

시종장 라즐리가 샤로니아의 도착을 알렸다.

키언은 테오르와 대화하던 것을 잊은 사람처럼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모시게.”

문이 열리고 샤로니아가 들어서는 순간, 테오르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눈동자 색을 닮은 하늘색 드레스를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샤로니아가 천천히 만찬장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테오르가 보기에도 샤로니아의 모습은 무척 아름다웠다. 그것을 증명하듯 키언이 그녀를 맞기 위해 홀린 듯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행히 한동안은 아무 탈 없겠군.’

테오르는 씨익,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성녀가 저토록 아름답게 단장하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황제는 자신의 개인 자금을 다 퍼준다고 해도 뭐라 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소소한 행복이 얼마간 더 유지되리란 사실에 기뻐하며 테오르는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자리에서 일어선 키언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샤로니아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분명히 평범한 날 중에 하나였건만. 그녀를 보는 순간, 오늘이 아주 특별한 날이 되어 버렸다. 그것은 그의 인생에 마법과도 같은 경험이었다.

이멜다의 성화에 못 이겨 너무 힘주어 단장해 버린 샤로니아는 만찬장에 들어서며 민망함에 얼굴이 홧홧해지는 것 같았다.

‘이러면 엄청 기대한 사람 같잖아.’

지금 자신의 모습은 그와의 아침 식사를 고대하고 또 고대한 사람처럼 보일 것이다. 자신이 입고 있는 옷만 보아도 아침 식사 자리에서 입기엔 무척 화려한 디자인이었으니까.

이멜다가 만든 옷들은 지나치게 섬세하고 장식이 세밀했다. 지금 입은 옷이 그나마 제일 얌전한 것일 정도였다.

유행에 맞게 가슴이 깊게 파인 드레스는 프릴과 장식이 둘러쳐져 있어서 고급스러워 보였고 동시에 여성미를 극대화했다.

‘성녀님은 고귀한 분이니 누구든 고개를 숙일 만한 옷을 입으셔야 해요.’

이멜다는 입버릇처럼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을 증명해 주듯 샤로니아의 옷장을 채운 옷들은 전부 금박 장식에 화려한 금실 자수가 놓여 있었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시종장 라즐리가 샤로니아의 의자를 빼주려 했다.

“짐이 하지.”

키언이 직접 하겠다고 나서는 것을 본 라즐리의 눈이 잠시 커졌다. 하지만 오랫동안 황궁 집사로 근무해 왔던 그는 노련하게 티를 내지 않고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아, 감사해요.”

샤로니아가 설핏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몸은 좀 어때? 잠은 잘 잤나? 기분은?”

앉자마자 키언이 궁금했던 것을 쏟아 내며 질문했다. 어젯밤 보지 못하는 동안 내내 머릿속을 떠돌고 있던 질문들이었다.

“질문이 너무 많아요.”

샤로니아가 쿡쿡, 웃었다.

그녀의 웃는 얼굴을 잠시 멍하게 바라보던 키언이 그런가, 라고 낮게 중얼거렸다.

보고 또 보아도 하늘색 드레스는 그녀 외에는 어울리는 사람이 없다고 말할 만큼 완벽했다. 그녀의 눈동자 색과 같은 계열의 색이어서일까. 오늘따라 그녀의 피부가 더욱 하얗고 매끄러워 보였다.

만일 음식이 식탁 위에 다 차려지지 않았더라면 키언은 넋을 잃고 그녀만 바라보았을지도 몰랐다.

모든 음식을 완벽하게 세팅한 시종들이 뒤로 물러났다. 이번에도 역시, 아침 식사치고는 종류가 무척 많았다.

“이번 여행 때문에 몸이 많이 축났어. 그러니 잘 먹어야 해.”

키언은 ‘그 빌어먹을 마물 때문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어쩐지 험한 말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말을 골랐다.

“나흘이나 잔걸요. 그걸로 몸은 충분히 회복되었어요.”

그녀가 수긍하지 않자 키언은 입을 꾹 다문 채 접시를 그녀 쪽으로 밀었다.

“이것 좀 먹어봐. 이것도.”

식탁 위의 음식들이 전부 샤로니아 쪽으로 쏠리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주변을 지키고 있던 시종들의 얼굴이 곤욕스럽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이런 황제의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일뿐더러, 완전 닭살이었으니까.

메인 요리가 나오자 주방장이 만찬장으로 나왔다. 황제가 그렇게 신경을 쓰라고 압력을 가했던 이유인 샤로니아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황실 주방장을 맡고 있는 로티에입니다. 음식은 입에 맞으시는지요?”

“아,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되어 영광이에요. 어떻게 이렇게 하나도 빠짐없이 맛있을 수가 있죠?”

샤로니아가 화답하듯 생긋 웃으며 말하자 로티에의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그는 몸집이 크고 험상궂게 생긴 데다 주방에서는 깐깐하고 성질이 더럽기로 악명이 높았지만, 사실 칭찬과 미인에 약했다.

“흠, 흠,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주방으로 돌아온 로티에가 다른 요리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양고기 스튜와 송어구이를 가져와. 송어구이에 레몬 얹는 걸 잊지 말고!”

주방이 다시 시끄러워진 줄 모르는 샤로니아는 음식을 먹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대체 음식은 언제까지 계속 나오는 걸까.

아침 식사 시간이 너무도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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