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요망한 구원자 (28)화 (28/123)

28화

일행들은 무너지는 동굴 안에서 대형을 갖추기 위해 애썼다. 놀란 샤로니아와 엘런도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무슨 일인지 상황을 살폈다.

무너진 벽을 뚫고 날름거리는 혓바닥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커다란 뱀 마물이 갈라진 틈 사이를 뚫고 나오기 위해 거대한 몸뚱어리를 들이밀고 있었다.

“오, 신이시여!”

사제 하나가 겁에 질려 소리 질렀다.

콰르르륵, 기어코 벽을 뚫고 나온 뱀 마물이 부들부들 떠는 사제 하나를 한입에 삼켜 버렸다.

“으악! 살려 줘!”

제 동료가 순식간에 사라지자 사색이 된 다른 사제가 소리 지르며 동굴 밖으로 뛰쳐나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끔찍한 일에 잠시 멍해졌던 기사들이 키언의 외침을 듣고 정신을 차렸다.

“무턱대고 공격하지 말고 약점을 공략해!”

기사단은 방어하는 자들과 공격하는 자들로 나누어 전략적으로 마물과 싸우기 시작했다. 좁은 동굴에서 한데 뒤엉켜 싸우는 모습은 마치 지옥도를 보는 것처럼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쉬시시식―!

어딘가에서 새끼 뱀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젠장!”

키언이 검으로 뱀들을 무차별적으로 도륙하며 이를 갈았다.

일단 숫자에서 열세였다. 새끼 뱀들을 베어 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나 모체가 되는 마물이 함께 날뛰니 전세가 점점 밀리기 시작했다.

“다들 조심해! 큰 놈을 죽여야 싸움이 끝난다고!”

키언은 거의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뱀에게 물리는 자들이 한두 명씩 나타나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샤로니아는?’

불현듯 든 생각에 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키언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미친 듯이 그녀의 흔적을 찾았다.

“샤론! 대답해! 무사한 건가?”

“예, 폐하! 저 여기 있어요!”

다행히 엘런과 함께 동굴 안쪽 벽에 서 있는 샤로니아를 발견했다. 

“괜찮은 거야? 어디 다친 데는 없고?”

키언이 검을 휘두르며 샤로니아 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무너진 바위 더미 때문에 시야가 가려져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았다.

“네! 저 괜찮아요!”

다친 곳이 없다는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그나마 안도감이 몰려왔다. 그런데 곧 새된 비명이 그의 귀에 꽂혔다.

“폐하! 뒤요! 뒤를 조심하세요!”

키언은 아차 싶었다. 하지만 이미 자신을 덮친 마물의 입에서 독액이 어깨 위로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폐하!”

“폐하를 보호해!”

“그쪽을 막아!”

여러 명이 동시다발적으로 외치는 소리가 귓가에 아득하게 들렸다.

‘젠장!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순 없어!’

키언은 검을 고쳐 잡고 일격을 준비했다. 이렇게 생을 끝내기에는 무척 억울했으니까.

그런데 그때, 갑자기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몸이 무거워졌다. 그리고 새끼 뱀들이 일제히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어떻게 된 것인지 생각하기도 전, 엄청난 진동과 함께 섬광이 번뜩였다.

순간의 파장이 얼마나 강했던지 건장한 기사들의 몸이 뒤로 밀려나 검을 땅에 박은 채 버텨야 할 정도였다.

키언을 덮치려던 커다란 뱀 마물도 거센 압력에 날려 동굴 벽을 부수며 나동그라졌다. 무엇보다도 놀라웠던 것은 섬광과 함께 새끼 뱀들이 일제히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게 도대체…….”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이 멍하게 중얼거렸다.

“저, 저것 좀 봐!”

누군가가 외친 소리에 모두가 샤로니아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이 어슴푸레한 빛에 휩싸여 있었다.

“성녀님이 하신 건가?”

“이런 능력을 가지고 계실 줄이야.”

수런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샤로니아는 그 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자기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온몸에서 마력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크에에엑!

타격을 입은 데다 새끼 뱀들을 잃은 마물은 사납게 울부짖으며 공격해왔다. 동굴 벽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안 돼!”

샤로니아가 손을 뻗자 푸른 기운이 광범위하게 방출되었다.

커다란 뱀 마물이 그 기운을 뚫고 들어오려고 사력을 다해 버둥거렸다.

휘오오오옥―.

두 기운이 맞부딪치며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바람이 일어났다. 드드드득, 땅이 진동하는 굉음에 귀가 얼얼할 지경이었다.

사람들은 강력한 바람에 휩쓸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버텼다. 얼마나 그것이 지속되었을까.

“끼에에에에엑!”

뱀 마물이 소름 돋는 괴성을 지르다가 펑, 폭발했다. 그 폭발과 함께 동굴 천장이 날아가 버렸다. 휑하게 뚫린 공간으로 쏴아아, 비가 들이쳤다.

“성녀님? 성녀님, 정신을 좀 차려 보세요!”

몽롱해진 시선 사이로 엘런이 절박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폐하는 무사하시니 다행이야.’

키언과 눈이 마주친 샤로니아는 더는 생각을 이어가지 못하고 까무룩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왜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는 거지?”

“그, 그게 너무 방대한 양의 마력을 소모하셔서 그런 것 같습니다.”

“다른 데 이상이 있는 건 아니고?”

“아마도 소진된 체력을 채우고 계신 것 같습니다만…….”

“뭐가 이렇게 정확한 게 하나도 없어?”

샤로니아는 누군가의 대화를 들으며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여기가 어디지? 사람들은 안전하게 대피했나? 마물은?

갑자기 넘치도록 떠오른 물음에 샤로니아는 헉, 숨을 들이마셨다.

“성녀님이 깨어나셨어요!”

엘런이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후드득 쏟아지는 눈물을 옷소매로 급하게 훔쳐 낸 엘런은 샤로니아의 몸 여기저기를 살폈다.

황실 주치의를 타박하고 있던 키언이 한걸음에 침대 곁으로 달려왔다.

“내가 보이나? 몸은 어때?”

샤로니아는 정신을 가다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는…….”

“황궁이야. 나흘 동안 깨어나지 않아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격정적인 황제의 반응에 크흠, 헛기침을 내뱉은 사람들이 서로 눈치를 주고받다가 슬쩍 방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엘런과 주치의, 시종들이 우르르 방을 빠져나가도 키언의 시선은 오로지 샤로니아의 얼굴에만 못 박혀 있었다.

“제가 나흘이나 잤어요?”

샤로니아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바싹 마른 그녀의 입술이 휘어지는 것을 본 키언이 와락 미간을 구겼다.

“하? 웃음이 나오나 지금?”

그녀가 잘못된 줄 알고 심장이 내려앉은 걸 생각하면 웃고 있는 그녀가 괘씸했다. 그녀가 잠든 내내 키언은 그녀 곁을 맴돌며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으니까.

“다치셨네요.”

샤로니아가 키언의 뺨에 난 상처를 어루만졌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키언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사람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요망한 여자…….

키언은 모든 걸 포기한 사람처럼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그녀의 손길에 제 뺨을 기댔다.

“걱정했어. 아주 많이.”

잘 조련된 맹수처럼 온순해진 황제를 보며 샤로니아가 미소 지었다.

“걱정을 끼쳐서 죄송해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손끝에 우웅, 새하얀 빛이 감돌았다. 동시에 키언의 얼굴에 난 상처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능력을, 얻은 건가?”

키언이 놀란 얼굴을 하며 물었다.

“아직은 기운이 뒤섞여서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그런가 봐요.”

샤로니아가 싱긋 웃었다. 이제는 확실히 알 것 같았다. 남들에게는 없는 것이 제 안에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축하를…… 해 줘야 하나?”

굉장히 어려운 고민을 맞닥뜨린 사람처럼 키언이 코끝을 찡그렸다. 분명히 앞으로 위험한 일에 연루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럴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선뜻 기뻐할 수가 없었다.

“뭐예요, 그게.”

샤로니아가 쿡쿡, 웃음을 터트렸다. 곱게 접히는 눈매를 보던 키언이 참지 못하고 촉, 그녀의 눈가에 키스했다.

“능력이 있든 없든 짐은 상관없어. 너만 무사하다면.”

그의 짙어진 시선에서 절절한 진심이 느껴졌다.

“잊으셨어요? 저는 복수할 때까지 절대로 안 죽을 거예요.”

“아니, 복수가 삶의 이유가 되어선 안 돼.”

“그럼요?”

동그랗게 뜬 샤로니아의 눈을 키언이 똑바로 마주 보았다.

“나.”

찬란한 금빛 눈동자에 깃든 불길이 그녀를 향해 조용히 타올랐다.

“짐이 네 삶의 이유가 되면 좋겠어.”

키언이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어떻게 보면 퍽 오만한 말이었다. 자신을 삶의 이유로 삼으라니.

맹목적인 신앙을 강조하는 신전보다 어찌 보면 더 파렴치한 요구였다.

하지만 샤로니아는 그 말을 농담으로 넘길 수가 없었다. 열감이 뚝뚝 떨어지는 눈길이 온 힘을 다해 진심이라는 것을 토로하고 있었으니까.

샤로니아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눈을 굴리고 있자니 그가 숨결이 닿는 곳까지 다가와 속살거렸다.

“짐은 이번에 알았거든. 네가 내 삶에 그런 존재라는 걸.”

샤로니아는 그가 사람을 홀리는 마법을 부리는 건 아닌지 진심으로 헷갈렸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보아도 그에게선 마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눈동자 가득히 정염이 넘실거린다. 숨이 턱, 하고 막힐 정도의 강렬한 정염이.

그것을 알아차리자마자 촉, 입술이 삼켜졌다. 거칠게 갈라진 입술을 삼키는 뜨거운 감촉은 마치 불길에 휩싸인 것 같은 기분을 선사했다.

강철같이 단단한 팔이 허리를 바스러질 정도로 꽉 감싸 안았다.

마치 심한 갈증을 느끼는 사람처럼 집요하게 파고드는 그로 인해 샤로니아는 머리가 어찔했다.

“폐하…….”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애달픈 목소리에 키언의 입매가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미안, 도저히 멈추질 못하겠더라고.”

다시 진득하게 입술을 물었다가 놓은 키언이 설렁줄을 잡아당겨 시종을 불렀다.

“미리 일러둔 대로 식사를 방으로 가져오도록 해.”

“예, 폐하.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키언의 명을 받은 시종이 물러가고 잠시 후, 식사 준비를 마친 시종들이 트레이를 밀고 들어왔다.

하나, 둘, 셋……. 좀처럼 끝나지 않는 행렬에 샤로니아가 깜짝 놀라 키언을 바라보았다.

“뭐가 이렇게 많아요?”

“나흘 동안 아무것도 못 먹었으니까 많이 먹어야지.”

넘쳐나는 음식을 바라보던 샤로니아가 황망하게 입을 달싹거렸다.

‘이건, 좀, 많이…… 과한데요?’

* * *

“그래서? 다른 사제들이 다 죽었다고?”

마구스가 비뚜름하게 입매를 뒤틀며 제 앞에 고개를 숙인 사제, 데니얼을 향해 물었다.

“네, 유감스럽게도 그렇습니다.”

함께 호라산에 올랐던 사제 둘 중 하나는 뱀 마물에게 단숨에 잡아먹혔고, 다른 하나는 겁에 질려 동굴 밖으로 뛰쳐나갔다가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혼자 살아남은 것이 마치 죄를 지은 것만 같아 데니얼의 고개가 더 밑으로 떨어졌다.

“그대에겐 신의 은총이 함께 했나 보군.”

신전의 수장 카티르가 으레 할 법한 말이었지만 그 말속에 위로나 안도 같은 감정은 없었다. 오히려 불쾌함과 짜증이 잔뜩 뒤섞여 있다는 것을 데니얼은 알고 있었다.

황궁 기사단은 사망자가 아무도 없는데 사제들만 죽었으니까. 만일 전원이 사망했더라면 황제를 의심할 정황을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가 살아 돌아왔으니 그런 잔꾀를 부릴 수도 없다. 그러니 살아 돌아온 데니얼은 반갑지 않은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다 카티르의 기도 덕분입니다.”

데니얼은 떨리는 목소리를 간신히 가다듬었다. 자신이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들켜서는 안 된다. 속으로 딴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을 그가 알아차려서는 안 된다. 자신이 황제의 편에 섰다는 것을 그가 알게 된다면 자신의 목숨은 물론이거니와 집안 자체가 아예 멸문되어 버릴 테니까.

“훗, 입에 발린 소릴 잘도 하는구나.”

비소를 머금은 마구스가 데니얼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마구스가 그에게 종종 일을 맡기는 까닭은 이런 면이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권위에 복종하고 자신을 칭송하는 자들에게는 그에 걸맞은 보상을 주어야겠지. 잠시 죽음을 유보하는 것으로.

“수고했다. 일단 물러가서 쉬어라.”

“예, 카티르.”

데니얼은 마구스 앞에서 물러 나와 방문을 닫은 후에야 참아왔던 숨을 한꺼번에 몰아 내쉬었다. 대사제장에게 죽임을 당하기 전에 신경쇠약으로 먼저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