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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요망한 구원자 (27)화 (27/123)

27화

서로의 몸이 맞닿으며 물기가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그저 부둥켜안은 것뿐인데 차갑게 식은 몸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괜찮은 건가? 어디 다친 데는 없고?” 

오랫동안 검을 잡았던 탓에 굳은살이 박인 단단한 손이 샤로니아의 뺨을 보듬고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그는 이렇게 붙잡고 있지 않으면 그녀가 사라지기라도 할까 봐 겁이 나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샤로니아는 그의 걱정 어린 질문 공세에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다른 건 다 괜찮은데, 이건 좀 안 괜찮은 것 같네요.”

도대체 뭐가? 그녀의 말뜻을 파악하기 위해 시선을 내렸던 키언은 곧바로 그녀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물에 빠졌던 탓에 샤로니아의 옷이 몸 전체에 착 달라붙어 실루엣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물기 때문에 살결이 훤히 다 비치는 옷은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샤로니아가 입고 있었던 얇은 튜닉보다 더 야했다. 그래서 키언은 지금 이 상황이 다행인지 아닌지 몹시도 헷갈렸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갑자기 상의를 벗는 키언을 보고 샤로니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보고도 몰라?”

키언이 벗은 상의로 샤로니아의 몸을 감쌌다.

“감사하긴 한데, 폐하의 옷도 다 젖어서 별로 의미가 없는 것 같은데요?”

물에 빠진 생쥐 꼴은 키언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젖은 옷 위에 젖은 옷을 걸쳐 봤자 크게 바뀌는 것도 없을 테고. 하지만 키언은 고개를 흔들며 단추까지 꼭꼭 채워 주었다.

“이건 널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다른 이들을 위해서이기도 하니까 가만히 있어.”

“그게 무슨 말이에요?”

샤로니아가 잘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가 어떤 표정이든 상관없이 키언은 매우 진지한 얼굴로 단추를 다 채운 뒤 말했다.

“돌아가다가 혹시라도 만나게 되는 사람을 살리고 싶거든 내 말 들어.”

샤로니아는 맨몸을 훤히 드러낸 채 그가 으르렁거리며 하는 말을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았다.

그나저나 자기는 벗고 있으면서.

샤로니아는 좀 불공평한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말을 내뱉진 않았다.

밤이 되면서 온도가 급격히 떨어졌기 때문에 두 사람은 서둘러 천막으로 향했다. 키언은 샤로니아가 젖은 옷자락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그녀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미 다들 잠들었을 시간이었기에 그들은 다른 이들을 깨우지 않기로 했다. 기사단은 젖은 샤로니아 때문에 오히려 근처에 오지 않는 게 나았고, 시중을 들 엘런은 샤로니아가 깨우길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얼른 옷을 갈아입도록 해.”

천막 안에 들어서자마자 키언이 화로에 불을 지피며 말했다.

젖은 채로 찬 바람을 쐬어 감기에 걸릴지도 몰랐다. 황궁이라면 얼마든지 치료해 줄 손길이 많았지만 여긴 마물이 나오는 산이다. 어떻게 해서라도 몸 상태가 나빠지는 것을 막아야 했다.

“폐하도 젖으셨잖아요.”

“그래서? 사이좋게 같이 갈아입자고?”

“아…… 니요.”

샤로니아가 머쓱하게 웃었다. 자세한 건 몰라도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났다간 굉장히 위험해질 거라는 건 분명히 알겠다.

“보지 마세요. 아시겠죠?”

샤로니아가 괜히 두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키언에게 말했다. 그러자 그가 콧김을 뿜어내며 항변했다.

“하? 짐을 뭐로 보고!”

“뭐, 아니면 됐고요.”

샤로니아가 담백하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한 뒤 바로 옷을 벗기 시작했다.

으윽, 신음을 내뱉은 키언이 서둘러 다른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단출한 천막 안에 몸을 가려 줄 만한 것이 있을 리 없었다.

키언은 눈은 돌렸지만, 신경이 온통 샤로니아에게로 향했다. 화로에서 뻗어 나온 불빛 때문에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천막 위로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키언은 곁눈질로 슬쩍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그림자를 통해 펼쳐진 상상의 나래에 저절로 꼴깍 마른침이 넘어갔다.

‘이건 본능이야. 어쩔 수 없는 거라고.’

그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꾸만 옆으로 움직이는 시선을 옹호했다.

찰팍, 젖은 옷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야릇하게 울렸다.

‘젠장!’

그는 차마 완전히 쳐다보지는 못하고 욕설을 중얼거렸다. 그놈의 신사도가 뭔지. 그녀에게 보란 듯이 큰소리를 쳐놓고 먼저 어길 수는 없지 않은가.

그는 눈을 꼭 감고 오래전 경전에서 본 구절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나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신전에 반감이 심했던 탓에 거의 억지로 배운 내용은 자기가 필요한 구절만 떠오르게 했다.

그래서 키언은 그 부분만 무한 반복했다. 안 그러면 진짜 시험에 빠질 것 같았으니까.

“다 됐어요.”

그녀가 마치 아주 잘 기다렸다고 칭찬하듯이 싱긋 웃으며 다가왔다. 젖은 머리칼을 늘어뜨린 채 뺨에 홍조를 띤 그녀가 해사한 웃음을 보이자 그건 그거대로 사람을 환장하게 만든다.

“폐하도 얼른 갈아입으세요.”

이미 절반은 벗고 있는 그에게 샤로니아가 재촉했다.

‘난 봐도 상관없는데.’

키언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차마 입을 떼진 못하고 헛기침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환복 후 그들은 화롯가에 앉아 따뜻한 차를 마셨다. 추위에 경직된 몸이 사르르 녹는 것 같았다.

“그런데 아까는 어떻게 된 거였지?”

키언은 분명히 새하얀 빛이 그녀를 삼키는 것을 보았다. 그 광경을 떠올리면 또다시 심장이 발 아래로 추락하는 것처럼 아찔했다. 그녀를 다시 볼 수 없다는 가정만으로도 심장 언저리가 욱신거린다.

“글쎄요, 저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물이 저에게 보여 주고 싶은 게 있었던 것 같아요.”

키언의 한쪽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남의 집 애 이름이 ‘물’은 아닐 테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저도 이상하다는 거 아니까.”

샤로니아가 곱게 눈을 흘겼다. 키언이 크흠, 낮게 헛기침을 내뱉으며 괜히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신을 믿지 않아서 능력이 없다더니?”

키언은 아까 보았던 새하얀 빛이 신성력이 터져 나올 때 나는 빛과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게요. 뭐였을까요?”

샤로니아가 제 손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성녀가 갖는다는 신성력과 치유력을 발휘해 본 적이 없었으니 지금 제 손에 느껴지는 열감이 무엇인지 정확히 말할 수가 없었다.

* * *

다음 날, 다시 산행이 시작되었다. 곧 호라산 쪽에 발을 들여놓아야 했기에 일행 모두 신경이 잔뜩 예민해졌다.

“자기 위치를 잘 지키도록 해. 안 그러면 목숨을 보장받을 수 없을 테니까.”

키언이 어제 신전 쪽에 소식을 전하다가 발각된 사제를 겨냥한 말을 하며 씨익 웃었다. 사제는 어젯밤 한숨도 자지 못했는지 얼굴이 꺼칠했다.

호라산은 푸른 식물들로 가득한 그리딤산과는 완전히 상반된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의 산인데도 불구하고 호라산이라고 불리는 쪽에 발을 딛자 메마른 모래가 날아올랐다.

그곳은 사막을 연상케 할 정도로 바싹 마른 땅에 가시덤불만 무성히 자라나고 있었다. 도무지 생물이라고는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척박한 환경에 모두 눈살을 찌푸렸다.

일행이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버석하게 마른 흙 때문에 뿌연 먼지가 일어났다.

“절대로 경계를 게을리하지 마라.”

키언이 서늘한 시선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느 방향에서 마물이 아가리를 벌리고 튀어나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스산한 분위기였다.

덩달아 잔뜩 기합이 들어간 기사단이 검을 빼든 채 주위를 경계하며 걸었다.

얼마간 걷자 정상이 보였다. 서둘러 분향을 끝내고 내려가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모두가 일제히 민첩하게 움직였다.

기사단과 사제들의 도움으로 산 정상에 제단이 세워졌다. 그리고 샤로니아가 제단 앞에 섰다.

그녀는 정해진 절차에 따라 마물에게 죽임을 당한 영혼들을 위한 기도를 올리고 루하르 제국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기도했다.

그녀가 순서에 따라 기도할 때마다 향불을 하나씩 올렸기 때문에 제단 위에는 곧 연기가 피어오르는 향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우르르릉―!

분향이 끝나갈 무렵, 하늘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아무래도 비가 내릴 것 같습니다.”

기사단장 코넬르가 키언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키언은 사실 여부를 확인하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먹구름이 몰려드는 하늘은 어느덧 껌껌해지고 있었다.

“주변에 비를 피할 만한 곳이 있는지 살펴보도록 해.”

키언의 은밀한 지시에 코넬르가 기사의 예를 갖춘 뒤 수하 몇과 함께 빠르게 사라졌다.

그리고 분향이 끝남과 동시에 투둑투둑,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샤로니아가 성녀가 된 이후, 두 번째로 내리는 비였다. 다른 때도 아니고 분향 후에 내리는 비였기에 그 의미가 남다르다고 할 수 있겠으나, 호라산 정상에서는 그런 걸 따지고 있을 수가 없었다.

쏴아아아.

시야를 가릴 정도로 많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쪽입니다!”

코넬르가 손짓하는 방향을 따라 일행은 서둘러 몸을 피했다.

“갑자기 웬 비람…….”

사제들이 코넬르가 인도한 동굴에 들어서자마자 물기를 털어 내며 툴툴거렸다. 오로지 개인의 필요와 이득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깊게 뿌리박힌 신전은 신심(信心) 따윈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괜찮으세요?”

엘런이 샤로니아의 안색을 바라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이번 산행으로 인해 그녀의 체력이 많이 고갈되었다.

얼른 황궁으로 돌아가서 쉬어야 할 것인데 비 때문에 발이 묶이다니. 엘런은 여신께서 참으로 무심하다고 생각하며 입술을 말아 물었다.

“걱정하지 마. 괜찮은 것 같으니까.”

샤로니아가 설핏 웃는 것을 보고도 엘런은 믿을 수가 없었다. 이제껏 보아온 샤로니아는 항상 걱정을 시키지 않으려고 참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었으니까.

“잠시 저쪽에 앉으세요.”

엘런이 샤로니아를 데리고 동굴 안쪽으로 갔다. 동굴은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공간이 좁아지는 형태였는데, 더 깊숙이 들어갔다간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샤로니아와 엘런은 일행과 적당히 떨어진 곳으로 갔다.

내리는 비 때문인지 동굴 안은 습기를 머금은 텁텁한 공기가 가득했다. 엘런은 천장에서 똑똑, 떨어지는 빗물을 피해 앉을 만한 자리를 물색했다.

“무슨 돌이 이렇게 많담.”

엘런이 샤로니아를 앉히기 위해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들을 이리저리 치울 때였다.

“엘런, 잠깐만.”

샤로니아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왜요?”

“그거 이리 줘 봐.”

엘런은 샤로니아가 달라고 한 것이 자신의 손에 들린 돌이 확실한지 다시 한번 확인했다. 왜 이런 돌멩이 따위를 성녀님이 신경 쓰는지 전혀 짐작도 할 수 없었으니까. 엘런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손에 들고 있던 돌을 내밀었다.

“이건…….”

얼핏 보기엔 일반 돌과 같았지만 그것은 자세히 보면 붉은빛을 띠는 원석 결정체였다. 빛을 투과시킬 수 있는 붉은 돌이 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샤로니아가 두 눈을 좁게 뜬 채 기억을 더듬어 도서관에서 보았던 책 내용을 떠올렸다.

“마정석이야.”

작게 속삭이는 샤로니아의 음성에 엘런은 소리 지르지 못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세상에나, 정말요?”

마법사의 명맥이 끊어지고 나자 자연스럽게 마정석에 대한 수요가 늘었다. 마법사 대신에 마정석의 마력으로 충당해야 할 일들이 많아졌기 때문이었다. 그 덕분에 마정석 또한 구하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운 실정이 되었다.

그런 마정석이 쓸모없는 돌처럼 바닥에 나뒹굴고 있다니.

엘런은 일단 사제들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려고 눈치를 보았다. 만일 이 사실이 신전에 흘러 들어가게 되었다간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질 테니까.

엘런이 어떻게 하면 사제들 모르게 마정석을 옮길 수 있을까 고민하던 때였다.

쿠그그그긍!

바닥이 심하게 흔들리며 동굴 벽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무, 무슨 일이야?”

“동굴이 무너진다!”

“마물이다! 마물이 나타났다!”

동굴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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