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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요망한 구원자 (24)화 (24/123)

24화

눈엣가시인 성녀가 떠나고 난 신전은 너무도 평화로웠다.

진즉에 이랬어야 했는데. 이제야 좀 살 만하군. 리비어는 오랜만에 티타임을 온전히 즐기는 중이었다.

성녀 같지도 않은 것을 위해서 열과 성을 다해 퍼레이드를 준비했던 걸 생각하면 저절로 이가 갈렸다. 하지만 이제 다 끝이다. 모든 것이 원상태로 돌아올 거니까. 이제 자신의 평화를 방해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늘따라 차 맛이 좋구나. 한 잔 더 주겠니?”

평상시와는 달리 말투가 나긋나긋했기에 그녀의 시중을 들던 신녀가 움찔 손을 떨었다.

또 이러다가 무슨 트집을 잡으려고. 신녀는 책잡히지 않으려고 신경을 곤두세웠고, 리비어는 굼뜬 신녀의 행동에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가 관대한 마음으로 곧 표정을 풀었다.

그렇게 리비어가 차를 즐기고 있을 때였다.

“신녀장님, 큰일 났습니다!”

그녀가 수족처럼 부리는 신녀 엠마가 뛰어 들어오며 즐거운 티타임은 막을 내렸다.

“무슨 일이야?”

간만에 평화를 만끽하고 있었던 만큼 짜증이 솟구친 리비어의 목소리가 뾰족해졌다.

“그것이 저…….”

엠마가 리비어 주변에 늘어선 다른 신녀들을 보고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리비어가 신경질적으로 턱짓을 했다.

“다들 나가 봐.”

“예, 신녀장님.”

방 안에 있던 신녀들이 우르르 몰려나가자 엠마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살수가, 실패했다고 합니다.”

“뭐? 제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실력자라며? 들인 돈이 얼만데 실패를 했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리비어를 보고 엠마의 표정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무래도 붙잡힌 것 같습니다.”

엠마는 자신이 죄를 저지른 것처럼 참담하게 고개를 떨구었다.

“하? 실패한 것도 모자라 붙잡히기까지?”

리비어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 것을 듣곤 경악했다. 불리한 상황에 처하면 제 목숨을 끊어서라도 의뢰인이 누구인지 무덤까지 비밀을 가져간다기에 거금을 들인 것이었다.

그런데, 붙잡혀? 누굴 호구로 아나? 리비어의 눈에 독기가 서렸다.

“분명히 방을 따로 잡았다고 했잖아.”

“그, 그랬죠. 그랬는데 황제 폐하께서 갑자기 나타나셨답니다.”

“이런 미친!”

리비어가 이를 아득 갈았다. 성질을 이기지 못한 그녀가 티 테이블을 쓸어 버리자 와장창, 소리를 내며 찻잔과 티 포트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엠마는 비명을 질렀다간 도리어 화를 입을 게 뻔했기에 제 입을 틀어막은 채 어깨를 잔뜩 옹송그렸다.

그때, 방문이 활짝 열리고 마구스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서늘한 기운을 풍기며 걸음을 내딛던 그는 엉망이 된 바닥을 흘끔 내려다본 뒤 경멸 어린 표정으로 리비어를 바라보았다.

“카, 카티르께서 여,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험악한 분위기에 당황한 리비어가 더듬거리며 간신히 고개를 숙였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기별도 없이 온 걸까. 설마 들킨 건 아니겠지. 리비어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시키지도 않은 짓을 잘도 했더구나.”

싸늘하게 내리깐 마구스의 눈빛에선 감정 한 톨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개미 한 마리 죽이듯 언제든 제 목숨을 빼앗아갈 수 있는 자의 눈빛이었다.

“그, 그것은…….”

리비어는 그가 모든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에 좌절하며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젠장, 아무도 모르게 진행했는데 어떻게 알았지? 아무래도 제 주변에 그가 심어 놓은 쥐새끼가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걸 파헤칠 여유는 없었다. 당장 자신의 목이 먼저 뎅겅 잘릴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

몸을 파르르 떠는 리비어의 모습을 마구스는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자비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의 표정에서 리비어는 절망을 느꼈다.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엔 약도 없는 법이다.”

리비어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빌었다. 비는 것이 아니고는 달리 살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비굴할 정도로 자세를 바짝 낮추었다. 죽음의 문턱에 다다르고 보니 자존심이고 뭐고 살아야겠다는 생각밖엔 들지 않았다.

“카티르,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기회를 주시면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

마구스가 침묵하며 리비어를 내려다보았다. 고개를 들지 않았지만, 그녀는 제 정수리 위로 꽂히는 그의 서늘한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카티르, 부디 자비를…….”

리비어는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그가 연민을 느낄 만한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한 달 동안 노동자를 위한 제사에 참석하며 근신하도록 해라.”

차갑기 짝이 없는 마구스의 명령에 흡, 리비어는 숨을 들이마신 채 굳어 버렸다. 노동자를 위한 제사는 가장 낮은 직급의 신녀들이 들어가는 제사였다.

더군다나 배우지 못하고 우악스러운 사내들을 감당하느라 신녀들은 꽤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뎌야만 했다.

신녀장이 그런 제사에 몸담게 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죽음보다 더한 치욕이었다.

“가, 감사, 합니다. 카티르.”

리비어는 부들부들 떨면서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녀는 비참한 신음을 내뱉지 않기 위해 이를 꽉 사리물었다.

마구스가 그런 리비어를 보고 차가운 비소를 남긴 채 방을 나갔다.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거야.’

리비어는 바닥에 엎드린 채로 샤로니아를 향해 이를 갈았다. 그녀만 없었다면, 그녀만 이 세상에서 사라져 준다면 자신이 이런 수모를 당할 일도 없을 텐데.

어찌나 꽉 그러쥐었는지 손톱이 박힌 주먹 사이로 핏물이 똑똑, 떨어졌다.

* * *

‘아으, 머리야.’

샤로니아는 울렁거리는 속 때문에 아픈 머리를 한 손으로 꾹꾹 눌렀다.

“속이 안 좋나?”

키언이 그녀의 상태를 눈치 빠르게 알아차리고 물었다.

샤로니아는 대답하지 않고 눈을 굴렸다. 이 남자는 내 상태를 왜 이렇게 잘 아는 걸까? 마치 내 얼굴만 살피고 있었던 사람처럼.

일부러 그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한 손을 슬쩍 이마에 갖다 댔을 뿐인데 그걸 단박에 알아 버렸다.

“괜찮아요.”

마차가 덜컹거리는 바람에 샤로니아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호라산까지의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서 아침 일찍부터 다시 마차를 타고 달리는 중이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마차 안에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샤로니아는 멀미인지 숙취인지 모를 애매한 두통을 느끼고 있었다.

“괜찮은 게 아닌 것 같은데?”

키언이 그녀를 관찰하려는 듯이 바짝 얼굴을 들이댔다.

빛나는 황금색 눈동자가 예쁘게 휘어져 있는 것을 보고 샤로니아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다.

이게 책에서 보던 미남계? 뭐 그런 건가 싶었다.

‘어젯밤에도 좀 멋있긴 했지.’

샤로니아는 그가 단검 하나로 살수를 제압하던 장면을 떠올렸다. 분명 그 살수도 뛰어난 실력자였을 텐데 키언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거침없이 검을 휘두르며 무기의 약점까지 뛰어넘었던 그의 모습은 신화 속에 나오는 영웅처럼 근사했다.

“열은 없는데?”

콩, 이마가 맞닿았다.

놀란 샤로니아의 눈이 일순 커졌다. 열을 원래 이렇게 재는 건가?

뭘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석상처럼 굳어 있으려니 키언이 쿡, 웃음을 터트렸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 표정이 그렇게 되지?”

내 표정이 어때서요? 샤로니아가 눈빛으로 말하며 뚱한 표정을 지었다.

키언이 뒤로 몸을 물리자 그의 웃는 얼굴이 더욱 눈에 잘 들어왔다. 샤로니아는 그 얼굴에 홀리지 않으려고 일부러 더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서로 마주 보며 앉아 있었지만 그는 월등한 신체 조건을 증명하듯 단번에 이마를 맞대 왔다. 마치 자신이 원하면 언제든 그 간격쯤은 없앨 수 있다는 듯이.

“호라산에 오르려면 체력을 비축해야 해. 그러니 자, 빌려줄게.”

그가 제 무릎을 툭툭 두드렸다. 무심코 그의 손짓을 따라 듬직한 그의 허벅지에 시선을 두었던 샤로니아는 괜스레 뺨이 홧홧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반대로 휙 돌렸다.

“아니요, 괜찮아요.”

샤로니아가 여전히 마차 한쪽 벽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어쩐지 그에게서 위험한 기운이 물씬 풍겼다.

당신은 괜찮을지 몰라도, 내가 안 괜찮아요. 샤로니아는 고개까지 흔들었다.

“자, 사양하지 않아도 돼.”

키언이 싱긋 웃으며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친절하게 제 무릎에 눕혀 주기까지 한다.

샤로니아는 순식간에 그의 다리를 베고 눕게 되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요란하게 흔들렸다. 이래도 되는 건가? 안 될 것 같은데. 샤로니아는 혼란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일어나려고 버둥거렸다.

하지만 키언은 그녀가 자신의 무릎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놔주지 않았다.

“좀 좁긴 해도 이게 더 나을 거야.”

샤로니아는 다정한 그의 말을 들으며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에휴, 나도 이제 모르겠다. 다리에 쥐가 나도 난 몰라요.

“고마워요.”

샤로니아는 포기한 채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렇게 잘해 주면 의지하게 되는데. 남을 의지한다는 건 샤로니아에게 썩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나약해지는 것 같았으니까.

샤로니아는 강해지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무던히 애를 썼다. 방대한 지식을 습득한 것도, 무감한 표정에 제 감정을 감춘 것도 다 그래서였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짓밟고 득세하는 세상이라면 자신은 그 강한 자보다 더 강한 자가 되어 그들에게 벌을 주고 싶었다.

‘그러니 약해지면 안 되는데…….’

키언이 살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느낌이 좋았다. 단단한 허벅지 근육이 뺨에 닿는 느낌도 생각보단 나쁘지 않았다.

어쩐지 덜컹거리는 마차도 견딜 만했다. 나른한 오후에 어울리는 묵직하고 텁텁한 바람이 불어왔지만, 그마저도 다 괜찮았다.

샤로니아는 그런 생각을 반복하다가 가물가물 잠이 들었다.

키언은 어느덧 잠든 샤로니아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생각보다 작네.’

그는 제 다리를 베고 누운 그녀를 보고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의 기준이었다.

그의 기준에 비춰 볼 때 그녀는 머리도, 어깨도, 손도, 모든 것이 다 작았다. 그런 주제에 존재감은 왜 이리 큰지.

어젯밤 들이닥친 살수는 분명 샤로니아를 노리고 있었다. 그것은 신전 내에 그녀의 정적이 많다는 것을 의미했다. 신전 측에서 성녀를 적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고달픈 길이 될 텐데…….’

그는 짧게 숨을 내쉬다가 자신이 그런 걱정을 할 처지인가 싶어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를 이렇게 위험한 길에 뛰어들도록 손을 잡아준 것이 자신이었으니.

보드라운 머리칼을 하염없이 만지작거리고 있자니 곧 마차가 멈춰 섰다.

“폐하, 그리딤산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수하가 마차 밖에서 알려온 소식에 키언은 샤로니아가 깨지 않도록 목소리를 낮추어 대답했다.

“일단 오늘 밤은 천막에서 보내고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등산을 시작하겠다.”

“예, 폐하.”

키언은 수하들이 천막을 치는 내내 샤로니아가 깨지 않도록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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