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다음 날 아침이 되었다. 매번 키언의 옆에서 단잠을 자던 샤로니아는 잠을 설쳤다.
‘긴장을, 했어.’
샤로니아는 침대에 누운 채 기가 막히다는 듯이 헛숨을 토해 내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 왕성에서 열린 무도회에서 처음으로 공식적인 인사를 할 때 긴장한 이후로는 긴장해 본 이력이 없었다.
‘생각보다…… 기분이 묘했어.’
샤로니아는 어제의 감각을 떠올리듯 제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뭔가 아쉬워 보이는데, 아닌가?”
갑자기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샤로니아는 화들짝 놀랐다.
무심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키언과 눈이 딱 마주쳤다. 너무 놀란 나머지 심장이 쿵쿵 소리를 내며 뛰기 시작했다.
“어째서?”
일어날 때마다 항상 그가 없었기에 오늘도 그런 줄 알았다. 샤로니아는 못된 짓을 하다가 들킨 아이처럼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여긴 짐의 침실이야. 그걸 잊은 건 아니겠지?”
그 말인즉슨 그가 자리를 비우든, 머물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막 잠에서 깬 사람과는 어울리지 않는 싱그러운 미소가 그의 입가에 떠올랐다. 그가 한쪽 손으로 머리를 괸 채, 다른 한 손으로 샤로니아를 자신의 품에 훅 끌어들였다.
“!”
샤로니아는 제 눈앞에 나타난 사내의 가슴 근육을 멍하게 바라보다가 곧 고개를 들어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이제 ‘오늘’이 지났으니 다음 진도를 나가 볼까?”
속살거리는 저음의 목소리가 지독하게 매혹적이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싶을 만큼.
하지만 샤로니아는 곧 평정심을 되찾았다. 신전에서 온갖 일을 다 겪으며 자라다 보면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법을 일반 사람보다 훨씬 빠르게 터득하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며 배웠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어쩐지 오늘따라 표정을 지우는 것이 힘들었다.
샤로니아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해 눈에 힘을 주었다.
“아침부터 기운이 넘치시는 걸 보니 하루 만에 호라산 정상까지 등반하실 수 있겠는데요.”
옷매무새는 온통 흐트러져 있는 주제에 눈빛은 마치 검을 빼든 기사 같다.
쿡, 키언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샤로니아가 불만에 가득 찬 얼굴로 뚱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촉, 키언은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추며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단 한 번을 실망시키지 않는 그녀의 태도가 몹시 만족스러웠다.
이렇게 하루 종일 침대에서 뒹굴면 딱 좋겠는데.
그때, 마치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똑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젠장, 그러면 안 되는 거 나도 안다고.’
키언은 한숨을 토해 내며 일어났다. 이토록 극적인 순간에 나타나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일 것이다. 키언은 ‘정말로 위급한 순간에 안 나타나기만 해 봐라’라고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가운을 아무렇게나 걸쳐 입었다.
“폐하, 지시하신 대로 호라산에 등반할 채비를 마쳤습니다.”
문밖에서 테오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의 목소리는 청량하기만 해서 키언은 어쩐지 심사가 더 꼬이는 기분이었다.
달칵, 키언이 침실 문을 열고 삐딱하게 문에 기댄 채 테오르를 마주 보았다.
“보다시피 아직 준비가 덜 됐어.”
“아…… 그러시군요.”
테오르의 눈동자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몸의 윤곽을 잘 드러내 주는 검은색 실크 가운을 걸친 황제의 모습은 그로 하여금 많은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항상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 흐트러짐 없는 모습을 보이던 황제였다. 빳빳하게 각이 잡힌 정복을 입은 모습만 보다가 지금 막 일어난 것 같은 모습을 보니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도대체 이때까지 뭘 하느라…….’
끄악, 그만 생각해!
테오르는 생각의 범위가 넓어지는 것을 자체 차단하며 억지로 목소리를 짜냈다.
“준비를 마치실 때까지 대기하겠습니다.”
“그래,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대기하고 있던 시종과 하녀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들어와 준비를 도왔다. 샤로니아도 엘런을 불러 단장을 마치고 필요한 것들을 챙겼다.
잠시 후, 키언과 샤로니아가 준비를 마치고 대기 중인 무리에 합류했다.
행선지가 다른 곳도 아닌 마물이 나오는 호라산 정상이었기 때문에 인원은 생각보다 단출하게 꾸려졌다. 사람이 많을수록 마물의 주의를 끌기 쉬웠고, 그만큼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마차에 실은 짐을 점검하고 떠날 준비를 마쳤을 때였다. 마구스가 배웅을 하기 위해 나왔다. 신의 계시니 뜻이니 운운하며 사람을 나락으로 빠트려 놓고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배웅이라니, 참으로 두꺼운 낯짝이 아닐 수 없었다.
“날도 화창한 걸 보니 신께서도 진노를 풀 준비가 되셨나 봅니다.”
그가 가증스러운 말을 눈도 깜짝하지 않고 하는 것을 보고 키언이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신께서 취향이 이토록 독특하신 줄, 짐은 이번에 알았지 뭔가.”
키언이 잔뜩 비꼰 말을 던졌으나 마구스는 아주 매끄럽게 그 말을 받아쳤다.
“인간의 편협한 생각으로 어찌 신의 뜻을 다 알 수 있겠습니까?”
하아, 잘났군. 키언은 더 이상 그와 말을 섞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마구스가 샤로니아 쪽으로 다가가 말했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저들에게 묻게. 친절하게 알려 줄 것이니.”
그가 샤로니아를 향해 작위적인 미소를 싱긋 지어 보였다. 그녀는 버젓이 일행 속에 섞여 있는 사제들을 보며 쓴웃음을 뱉어 냈다. 그들은 누가 봐도 조력자가 아니라 감시자였으니까.
“그러지요. 카티르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샤로니아는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응당 해야 할 말만 했다.
온기라고는 전혀 없는 딱딱한 대답인데도 마구스는 뭐가 좋은지 웃기만 했다.
“신의 은총이 함께 하길.”
마구스가 떠나는 일행을 향해 축복을 빌었다.
개자식이 빌어 주는 축복 따위 전혀 받고 싶지 않았던 샤로니아는 딴생각을 하며 그의 말을 흘려들었다. 이를테면 어젯밤에 있었던 일 같은…….
그것의 효과는 아주 확실했다. 다른 생각은 아예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으니까.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마구스의 말을 가뿐히 무시한 샤로니아가 싱긋 웃으며 인사했다.
마구스와 함께 성녀 일행을 배웅하러 나왔던 리비어는 샤로니아가 밝게 웃으며 떠나는 것이 무척 못마땅했다.
호라산에 가는 걸 알면서도 저런 표정이라니.
목숨이 위태로울지도 모른다는 건 어린아이라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웃음이 나와?’
리비어는 멀어지는 마차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선물을 보내 줘야겠어.”
* * *
황궁을 벗어난 마차는 한참을 달려 수도를 벗어났다. 수도를 벗어나자 눈에 띄게 길의 사정이 나빠졌다.
거칠게 흔들리는 마차 안에 마주 앉은 키언과 샤로니아는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서 상의하던 중이었다.
“그나저나 귀찮은 것들이 들러붙었군.”
키언이 커튼을 들추어 밖을 슬쩍 내다보곤 눈살을 찌푸렸다. 신전 측에서 보낸 사제들을 보고 하는 말이었다.
“뭐 어쩔 수 없죠.”
샤로니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호라산에서 분향해야 할 사람으로 지목받은 것은 분명히 성녀였다. 제국민을 위해서 자신도 함께 분향하겠다고 나선 황제를 신전이 말릴 수 없듯이, 신전에서 보낸 사제를 내칠 명분이 이쪽에도 없었다.
그러니 이 기묘한 동행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쳇, 허튼짓하기만 해 봐라.”
키언이 서늘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며 들추었던 커튼을 내려놓았다. 샤로니아는 사제들에 대한 마음을 아예 접었는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손에 들고 있는 보고서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그리딤산을 올랐던 사람들의 증언도 만만치 않네요.”
샤로니아가 유심히 확인하던 지도를 의자 한편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언제부턴가 그리딤산이 호라산처럼 변해가고 있다고 했다. 호라산의 마물들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황폐해져 가는 영역이 급속도로 늘고 있다고.
아마 몇십 년이 지난 뒤에는 그리딤산 자체가 사라지는 건 아닐까, 그렇게 전망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뭐, 어찌 되었든 부딪쳐 봐야지.”
키언은 가장 뛰어난 정예 기사들로 일행을 꾸렸다. 모두 믿음직스러운 자들이었다. 하지만 마법사가 한 명쯤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대대로 마력을 타고 난다고 알려져 있는 마즈다크 왕국이 멸망하고 난 뒤, 마법의 명맥은 끊어졌다.
그리고 신전은 발 빠르게 움직여 조잡한 사술로 사람들의 마음에 깊게 파고들었다. 모두가 다 인간의 탐욕에 의한 폐해였다.
마즈다크 왕국이 멸망당한 이유도 그들의 능력을 탐하고 시기했던 나라 간의 분쟁이 원인이었으니까.
그러다 덜컹, 마차가 크게 흔들렸다. 마차 바퀴가 돌부리에라도 걸린 모양이었다. 보고서를 보느라 중심을 잡지 못했던 샤로니아가 키언의 품에 코를 박았다.
“흠, 적극적인 것도 나쁘지 않군.”
키언이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피식 웃었다.
“그런 거 아니거든요.”
샤로니아가 눈을 흘기며 일어서려고 했다.
덜컹, 마차가 다시 흔들렸다.
“어이쿠, 이런.”
다시 그의 품에 안겨 들어오는 샤로니아를 보며 키언이 쿡쿡 웃었다.
길은 왜 이 모양이라서 사람을 무안하게 하나. 샤로니아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몸을 곧추세웠다.
마치 그녀가 일어서지 못하게 하는 것이 목적인 것처럼 마차가 계속 덜컹거렸다.
“그냥 이렇게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키언이 자신의 품 안에 안긴 샤로니아를 보며 싱긋 미소 지었다.
“아뇨, 별로 좋은 생각 같진 않네요.”
샤로니아는 있는 힘을 다해 일어나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구겨진 치마를 펴서 정돈하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허리를 곧게 펴는 샤로니아를 보고 키언이 한동안 큭큭거리며 웃었다.
샤로니아는 한동안 창밖의 풍경에 시선을 고정했다. 별다를 것 없는 풍경이 계속 이어졌지만, 이렇게 멀리까지 나온 것이 처음이라서 그런지 눈에 담는 모든 풍경이 신기하게만 보였다.
그때, 마차가 멈추며 마을에 도착했다는 보고가 들렸다. 키언은 주변을 확인하기 위해서 먼저 마차에서 내렸고, 샤로니아는 조금 더 앉아 있다가 자신을 데리러 온 엘런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서 내렸다.
‘아흑, 허리야.’
온몸이 죽겠다고 아우성을 치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대부분 신전에만 틀어박힌 채 지냈고 외출을 해 봤자 수도 내였기에 이렇게 먼 곳까지 나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니 울퉁불퉁한 길을 달리는 마차가 익숙할 리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고통을 눌러 참으며 철저히 무감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건 자길 보고 웃었던 황제에 대한 작은 불만의 표시이기도 했다.
“괜찮으세요?”
엘런이 창백한 샤로니아의 얼굴을 보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아. 그런데…… 체력을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해?”
그렇게 묻는 샤로니아의 얼굴에서 결연함이 엿보였기에 엘런은 잠시 당황했다.
“예? 꾸준히 운동을 하셔야, 겠지요?”
“아, 운동.”
샤로니아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왠지 황제에게 지고 싶지 않았다.
제게 이상한 감각을 선사하는 것도 모자라 연약함을 절절히 느끼게 하는 그에게 반발심이 생겼다.
“오늘은 이 마을에 묵었다가 내일 아침에 출발해야 할 것 같아.”
키언이 다가와 말하다 말고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샤로니아에게서 알 수 없는 의지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것이 느껴졌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