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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요망한 구원자 (21)화 (21/123)

21화

“폐하는…… 바쁘시잖아요?”

샤로니아가 키언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아까도 말했을 텐데. 네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바쁠 일은 없어.”

이 말을 테오르가 들었더라면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졌겠지만, 유감스럽게도 테오르는 성깔 있는 황제를 맡아 준 성녀에게 감사해하며 자리를 피한 뒤였다.

샤로니아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생각하느라 잠시 눈을 굴렸다. 자신이야 껄끄러운 신전 측 사람들과 동행하는 것보단 키언과 함께 가는 편이 훨씬 나았다. 뭐, 호의는 받으라고 있는 것이니까.

“좋아요, 그렇게 할게요. 그러니 이제 얼른 씻고 나오세요.”

대화 내용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것을 깨달은 키언이 코끝을 찡그렸다.

“짐의 몰골이 그렇게 보기 흉한가?”

“이제라도 아셨으니 다행이네요.”

자신의 대답에 잠시 벙한 얼굴이 된 키언을 보고 샤로니아가 쿡,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니 이제 그만 씻고 오세요.”

고단한 하루였다. 마물의 피가 흉하게 엉겨 붙은 옷은 이제 그만 벗어 버리고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쉬었으면 하는 마음에 샤로니아는 조금 짓궂게 대답했다.

“알았어, 알았다고.”

키언이 체념한 듯 빠르게 상의를 탈의하며 욕실 쪽 복도로 향했다. 그러다 갑자기 할 말이 생각났는지 되돌아온다.

샤로니아는 무슨 일인가 싶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눈을 잠잠히 바라보던 키언이 조금 망설이다 툭, 뱉듯이 말했다.

“자고 가.”

그의 말에 샤로니아의 속눈썹이 잠시 파르르 떨렸다. 이 남자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심장에 무리가 갈 만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그럴게요.”

샤로니아의 대답을 들은 그가 싱긋 웃은 뒤 다시 욕실로 향했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샤로니아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혀 괜히 표정을 다잡았다.

“얘가 왜 이러지?”

샤로니아는 빠르게 고동치는 심장 부근을 꾹 누르며 설핏 웃었다. 처음 겪는 낯선 감정이 생경한 나머지 웃음이 삐져나왔다. 내가 이런 생각이 들 때도 있구나 싶어서.

샤로니아는 황제의 침실 밖에 대기 중이던 엘런을 불러 갈아입을 옷을 부탁했다.

“괜찮으신 거예요? 호라산에 가게 되셨다면서요?”

엘런이 커다란 눈망울에 걱정을 한가득 담아 물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담긴 진심을 본 샤로니아는 괜히 웃어 보였다. 이 착한 아이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으니까.

“난 괜찮아. 황제 폐하께서 같이 가 주신다고 하셨어.”

“정말요? 역시 폐하께선 성녀님을…….”

엘런이 말을 다 끝맺지 못하고 양 뺨을 발그레하게 물들였다.

샤로니아는 그녀의 말을 정정해 주는 대신 지금 해야 할 일을 상기시켜 주었다.

“폐하께서 욕실에서 나오시기 전에 내 옷을 가져다줬으면 좋겠는데.”

“아참, 내 정신 좀 봐!”

엘런이 화들짝 놀라며 허둥지둥 하트론 궁으로 뛰어갔다. 그런데 무슨 상상을 한 것인지 그녀의 얼굴이 아까보다 더욱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음? 내 말이 좀…… 그랬나?”

뒤늦게 생각해 보니 듣기에 따라서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말이긴 했다.

다행히 엘런이 늦지 않게 다녀온 덕분에 샤로니아는 갈아입을 옷을 전해 받았다. 그녀가 잘 접어놓은 옷을 탁자 위에 올려놓는데, 키언이 아주 멀끔한 모습으로 욕실에서 나왔다.

은빛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것을 그는 수건으로 몇 번 툭툭 닦아 낸 뒤 샤로니아에게 고갯짓을 했다.

“이제 네 차례야.”

어떻게 보면 굉장히 묘한 상황이었지만 샤로니아는 별다른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실례할게요.”

자신이 썼던 욕실을 쓰겠다고 그녀가 선뜻 말할 줄 몰랐던 키언은 멀어지는 샤로니아의 뒷모습을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지금 이 상황, 나만 이상해?’

키언은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오는 야릇한 상상을 몰아내려 젖은 머리카락을 벅벅 문질렀다.

그때였다.

“저기…… 폐하? 잠깐만 와 보실래요?”

샤로니아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도 욕실에서!

키언은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닐까, 제 귀를 의심했다.

“……폐하?”

다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자리에서 튕겨 오른 것처럼 빠르게 욕실로 향했다. 하지만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던 탓에 그는 차마 욕실 문을 곧바로 열지 못하고 잠깐 심호흡을 했다. 표정을 가다듬은 그는 신사처럼 보이기 위해 애쓰며 최대한 정중하게 욕실 문을 열려고 노력했다. 그래봤자 욕실 문인데 말이다.

“크흠, 짐을 불렀……?”

그가 말을 다 끝맺지 못하고 멍하게 입을 벌렸다.

샤로니아가 옷을 벗다가 어디에 걸렸는지 등을 훤히 드러낸 채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것 좀 벗겨 주세요”

샤로니아의 말에 키언은 저도 모르게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키언은 시종들을 전부 물러가게 했던 것이 신의 한 수라고 생각했다. 안 그랬으면 그녀가 자신을 욕실로 부를 일도 없었을 테니까.

“억지로 힘을 주면 옷이 망가질 것 같아서요.”

샤로니아는 부끄러움 없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키언에게 등을 보이고 섰다. 그의 시선에 자신이 어떻게 비치는 줄도 모르고.

불빛 아래서 바라본 그녀의 등은 매끄럽고 윤기가 흘렀다. 이미 한차례 욕실을 사용하고 난 뒤였기에 욕실 안은 뜨거운 수증기가 들어차 있었다.

욕실의 후끈한 열기가 마치 제 속에서 피어나는 열망 같다. 키언은 일단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그리고 옷이 어째서 제게 이렇게 좋은 일을 해 주고 있는지를 살폈다. 샤로니아의 머리카락과 옷에서 튀어나온 실밥이 꽤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좀 아플 수도 있겠는데.”

그는 옷에 걸려 팽팽해진 머리카락을 두고 나머지 머리카락을 한 손에 모아 쥐었다. 실크처럼 부드러운 머리카락은 손안에 쥐는 것만 해도 묘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키언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완전히 걷어 내어 앞쪽으로 보냈다. 그 덕분에 샤로니아의 목덜미가 훤히 드러났다.

그는 잠시 숨을 멈췄다. 지독한 갈망이 꿈틀거리며 일어서는 것을 막을 길이 없었다. 새하얀 목덜미와 그 아래로 뻗어 내려간 매끄러운 피부 위로 진득한 시선이 따라붙었다.

“괜찮아요. 참을게요. 역시 머리카락이 걸린 거였군요.”

아무것도 모르는 샤로니아는 여상하게 답하며 키언이 다가서기 편하게 오히려 몸을 더 내어 주었다.

‘미치겠군.’

키언은 이게 뭐 하는 짓인가, 라고 생각하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숨결이 목덜미에 닿자 샤로니아가 움찔거렸다.

“이상한 거 알아요?”

의문을 담은 목소리가 중얼거리듯 그녀에게서 흘러나왔다.

“뭐가?”

키언은 다른 데 손을 대지 않고 머리카락만 빼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말했다. 온 신경을 집중했던 탓에 저도 모르게 건성으로 대답하고 말았다.

“다른 사람이 만질 때는 이렇게 이상하지 않은데…….”

어째서 그의 손길이, 그의 숨결이 닿으면 몸의 세포가 다 일어나는 것 같을까. 샤로니아는 계속해서 해결되지 않는 의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키언은 순간 고민했다. 그녀의 궁금증을 이용해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싶다는 생각이 너무도 강렬했으니까.

이만큼 참았으면 많이 참은 것 아닌가? 그녀가 먼저 알고 싶다고 하기도 했고.

그는 자신이 앞으로 할 행동에 대한 타당한 이유를 열거하며 합리화시켰다. 그것은 바꿔 말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물러나고 싶지 않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건, 짐의 손길을 원하기 때문이야.”

“제가요? 폐하의……?”

샤로니아가 잘 이해가 되지 않는지 고심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엉킨 머리카락을 풀어내던 키언의 손가락이 샤로니아의 견갑골 위를 스쳐 갔다. 맨살에 닿는 뜨거운 손가락은 온몸에 소름이 돋아나게 만들었다.

“몸은 원하는 것 같은데?”

키언이 불이 뚝뚝 떨어져 내릴 것 같은 표정으로 그녀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살짝 힘주어 그녀를 돌려세웠다.

샤로니아는 가슴께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흘러내리기 직전인 옷을 두 손으로 부여잡은 채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뭔가 이상했다. 그게 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상한 건 틀림없었다.

마치 격랑에 휩쓸린 사람처럼 감정은 마구 요동쳤고, 그의 시선이 닿는 자리마다 열꽃이 피어나는 것 같았다.

처음 겪는 감정의 기류는 온몸을 뒤흔들었고 조그마한 자극에도 극심한 반응을 나타냈다. 살갗이 이토록 예민해지기는 처음이었으니까.

“알려달라면서?”

키언의 은근한 목소리에 샤로니아는 눈을 깜박였다. 알고 싶기도 하고 모르고 싶기도 한 이 기분으로 뭐라고 답해야 할까.

“왜? 막상 배우려니 겁이 나나?”

키언은 그녀의 턱을 살짝 들어 올리며 도발했다. 그가 이제껏 경험한 그녀는 이렇게 도발하면 절대로 뒤로 물러서지 않는 성격이었다. 어쩌면 그걸 바라고 묻는 것일지도 몰랐다.

“겁나지 않아요.”

또렷한 푸른 눈이 키언의 황금빛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그럼, 알려 줘도 되겠군.”

금빛 찬란한 눈동자가 매끄럽게 휘어지는 것을 바라본 순간, 입술이 겹쳐졌다.

그 말캉한 감촉은 아까까지 느꼈던 감각과는 차원이 다른 전율을 몰고 왔다. 발끝이 붕 떠오르는 것처럼 몸이 나른해지고 여기가 어디인지, 내가 누구인지 모를 정도로 정신이 혼곤하게 풀어졌다.

“흐읏!”

달뜬 숨이 잇새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그런데도 샤로니아는 제게서 그런 소리가 흘러나갔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열기에 잠식되어 흐늘거리는 의식 가운데서도 샤로니아는 어째서 이런 감각이 느껴지는지 알기 위해 몇 번이나 생각을 다잡았다. 하지만 그런 수고가 허망할 정도로 머릿속은 순식간에 새하얀 백지가 되었다.

뜨겁게 몰아치던 입맞춤이 잦아들었다. 그 대신 사람을 안달하게 만드는 야릇한 접촉이 계속되었다.

입술을 살짝살짝 물었다 놓기를 반복하는 키언의 행동에 기운이 빠진 샤로니아의 몸이 휘청거렸다.

키언은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받쳤다. 그녀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붙잡고 있던 옷이 느슨하게 풀어졌다.

입맞춤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듯이 거대한 욕망이 욕심을 부추겼다. 보드라운 살결을 양껏 취하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생각을 통제하는 일이 이렇게 힘든 일일 줄이야.

키언은 가까스로 그녀에게서 몸을 떨어뜨렸다.

그의 눈이 발갛게 부푼 샤로니아의 입술을 지나 쾌감에 흐려진 그녀의 눈동자에 닿았다.

맑디맑은 푸른 눈동자가 저로 인해 혼탁해졌다는 것은 의외로 묘한 만족감을 주었다. 마치 순수하고 고귀한 영혼을 타락시킨 악마가 된 것 같달까.

“한 번 더 할까?”

그녀를 위해 악마를 자처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키언이 샤로니아의 입술을 손끝으로 슬쩍 쓸며 낮게 속살거렸다.

“아, 아니요. 오늘은 그만할래요.”

혼란스러워 보이는 샤로니아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래. ‘오늘은’ 그만하지.”

키언의 입매가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못다 한 것은 오늘이 아니라 내일 하면 될 테니까.

내일을 기대하게 되는 건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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