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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요망한 구원자 (20)화 (20/123)

20화

남들의 눈에는 그저 살벌한 기세로 마물을 베어내는 황제일 테지만, 샤로니아의 눈에는 무척 다르게 보였다. 키언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샤로니아의 시선이 짙어졌다.

“폐하, 상황이 종료되었습니다.”

부관의 보고에 키언이 휘두르던 검을 멈추었다.

어마어마한 숫자의 마물을 베어 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호흡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사망자 수는 얼마나 되지?”

“현재 3명입니다. 부상자는 모두 치료 중이며 다행히 목숨이 위태로운 중상자는 없었습니다.”

“시신을 잘 수습해 주고 제대로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돌봐 주도록 해. 위로의 말을 전하는 것도 잊지 말고.”

키언은 상황을 정리하라고 부관을 보낸 뒤,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무감하게 바라보았다.

온몸에 피를 뒤집어쓰고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는 모습은 과연 ‘전쟁귀’라고 불릴 만했다. 하지만 붉은 피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는 공허했고 동시에 날카로웠다.

사람이건 마물이건 그 신체를 베어 낼 때의 감각은 다르지 않다. 수많은 생명을 제 손으로 거뒀다.

물론 전쟁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가 한 일은 살기 위한 것이었고, 누구도 자신을 향해 ‘살인자’라고는 부르지 않는다. 하지만…….

‘다 개소리야.’

그건 몰라서 하는 소리다. 자신은 전쟁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누군가의 아버지를, 누군가의 남편을, 누군가의 아들을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강 저편으로 보내 버렸다.

근래에 들어 잊고 있었다. 제 손이 원래 붉은색이었다는 걸. 자신이 베어 낸 자들의 생명과 남은 자들의 삶이 제 손에 핏빛이 되어 물들어 버렸다. 그것을 잊어선 안 되는데.

키언이 텅 빈 눈동자로 하염없이 제 손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다치신 거예요?”

아수라장이 된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맑디맑은 푸른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키언은 홀린 듯이 그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심해를 연상시키는 푸른 눈은 드넓었고 어떤 것도 포용할 수 있을 것처럼 아주 깊어 보였다.

이토록 불의한 자라도 품어 줄 수 있을 만큼.

살면서 단 한 번도 자비를 구한 적이 없던 키언은 그녀의 앞에만 서면 약해지는 자기 자신을 깨닫곤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어디 좀 봐요.”

그가 얼굴을 찌푸린 이유가 상처를 입은 탓이라고 생각한 샤로니아가 그의 손을 살피기 위해 다가섰다.

“피가 났네요.”

“짐의 피가, 아니야.”

침잠된 마음만큼이나 목구멍 깊숙이 가라앉았던 목소리가 목울대를 긁으며 흘러나왔다.

키언은 짙어진 시선으로 그녀를 살폈다. 옷이 더러워지고 여기저기 피가 묻어 있기는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다쳤을 수도 있으니 그래도 살펴봐야겠어요.” 

그녀가 자신의 손을 잡는 순간, 이상하게도 숨이 멎었다.

공간이 뒤집히고,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공기가 변했다. 시끄러운 잡음이 일순 잠잠해지고 시야에 오롯이 그녀만 맺혔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긴 한데…….”

단 한 번도 구원을 바란 적은 없다.

“일단 피를 닦아 내는 것이 좋겠어요.”

이 지옥 같은 세상이 내가 머물 곳이라는 데 단 한 번도 이의를 가져본 적이 없다.

“아프면 바로 얘기하세요.”

그런데, 욕심이 생긴다.

“제 말 듣고 계세요?”

너를 통해서 내 세상이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폐하? 아무래도 사람을 불러오는 것이 좋겠어요.”

너를 통해 처음으로 구원받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 버린 나를 이기적이라고 욕해도 좋다.

“가지 마.”

멀어지는 온기를 놓칠세라 키언이 급하게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냥 있어.”

그냥, 내 옆에 있어 줬으면 좋겠어.

키언이 샤로니아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자그마한 몸이 품 안에 들어오자 따뜻한 온기가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한번 맛본 따스함은 끊을 수 없이 사람을 매료시킨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일 정도로.

너로 인해 구원의 열망을 깨달아 버린 나는.

“갖고 싶은 게 생겼어.”

키언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소리는 아수라장이 된 주변 소음에 묻혀 샤로니아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폐하?”

영문도 모른 채 키언의 품에 갇힌 샤로니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가 가만히 있는 게 마치 이렇게 있어도 된다는 허락 같아서 키언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잠깐만 이렇게 있지.”

키언은 곧 사라져 버릴 신기루를 붙잡은 사람처럼 그녀를 단단하게 그러안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다른 이들의 시선에 어떻게 비칠까 하는 염려도 들지 않았다. 이곳이 방금까지 마물과 피 튀기는 전투를 벌였던 곳이라는 것도 잊었다.

그저, 놓기 싫었다. 그냥, 시간이 이대로 멈추었으면 했다.

“그런데요, 폐하? 아무래도 놓아주셔야겠는데요.”

샤로니아가 그의 품에서 바르작거리며 눈짓을 보냈다.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린 키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의 테오르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으니까.

가끔씩 ‘젠장’, ‘미치겠네’ 같은 욕설이 섞여 들려오는 것도 같았다.

긴 한숨을 뽑아낸 키언이 샤로니아를 놓아주며 테오르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지?”

그러자 테오르가 기다렸다는 듯이 한걸음에 다가와 말했다.

“방금 신전에서 계시가 내렸다는 공식 발표를 했습니다.”

“계시?”

키언의 한마디에 순식간 주변이 얼어붙는 것처럼 싸늘해졌다. 그의 얼굴을 한차례 살핀 테오르가 퍽 곤란하다는 듯이 턱을 문지르며 이어 말했다.

“마물이 갑작스럽게 도심을 덮친 사건에 대한 입장 발표인 것 같습니다.”

테오르가 말하는 도중 샤로니아의 얼굴을 흘끔 바라본 것이 예민한 키언의 촉에 걸려들었다. 아마도 신전의 발표에 성녀에 대한 내용이 있는 듯했다.

“말해. 그게 다가 아닐 텐데?”

키언의 고압적인 태도에 테오르가 당황해서 입을 뻐끔거렸다.

아아, 자기인들 이런 내용 따위 전하고 싶은 줄 아나. 더군다나 눈치 빠른 황제는 보고를 마치기도 전에 벌써 더 중요한 사안이 숨겨져 있음을 간파해 버렸다.

인생사가 왜 이렇게 고달프냐. 테오르는 속으로 잠시 신세 한탄을 했다.

앞으로 자신이 보고할 내용을 듣고 키언이 화내지 않을 확률은 천만분의 일이었으니까. 그 말인즉슨 반드시 화를 내게 되어 있다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그게, 신전 측 발표에 의하면 이번에 마물이 나타난 것은 신의 분노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신의 분노를 잠재울 방안이…….”

“결론만 말해.”

장황한 설명을 끝까지 듣기엔 키언의 인내심은 바닥이었다.

“성녀께서 호라산 정상에 올라 분향하는 것으로 신의 분노를 달래겠다고 했습니다.”

“뭐? 이 미친!”

키언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테오르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 그저 말을 전한 것뿐인데 왜 황제가 화를 쏟아 내는 건 자신인 걸까. 생각 같아서는 황제보다 더 큰 목소리로 신전을 향해 신랄한 욕설을 날려 주고 싶었다.

“지금 호라산이라고 했나? 마물들이 득실거리는?”

“유감스럽게도 호라산이 맞습니다.”

테오르는 자라처럼 목을 움츠린 상태에서도 꼬박꼬박 대답은 다 했다.

하아, 거친 숨을 내뱉으며 키언이 머리를 쓸어 올렸다. 호라산 정상에서 분향하란 소리는 가서 죽으라는 소리와 다를 게 없었다.

“이 지긋지긋한 신전 놈들!”

키언이 참지 못하고 분통을 터트렸다. 도대체 머릿속에 뭐가 들어있으면 마물의 소굴에 들어가 분향하란 말이 나오는 걸까.

그게 소위 말하는 신의 계시라니. 키언의 눈에서 미처 여과되지 못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분노하는 키언과는 달리, 샤로니아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잔잔한 호수를 연상시키는 그녀의 행동은 키언과 대비되어 더욱 이목을 끌었다.

“일단 황궁으로 돌아가죠.”

샤로니아가 차분한 표정으로 키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돌아가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보도록 해요. 네?”

그녀의 접촉에 키언이 내뿜던 살기가 한풀 꺾이는 것은 본 테오르는 어깨가 내려가도록 막힌 숨을 뱉어냈다.

황제까지 날뛰지 않은 게 어찌나 다행인지.

* * *

“수고했다.”

마구스가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부복한 사내에게 미소 지어 보였다. 그가 이렇게 미소 짓는 일은 극히 드물었기에 사내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한 뒤 고개를 숙였다.

“오늘 몇 마리를 풀었지?”

“스무 마리 남짓입니다.”

마구스는 착실하게 대답하는 사내, 미카엘을 보며 교활한 눈빛을 빛냈다. 앞으로의 일을 점치듯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던 마구스가 다시 질문했다.

“그럼 이제 얼마나 남았지?”

“딱 그만큼 남았지만, 카티르께서 신경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마물은 번식력이 뛰어나니까요.”

눌러쓴 후드 아래로 드러난 미카엘의 입매가 길게 늘어졌다.

“신께서 네 노고를 기억해 주실 거다.”

마구스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제 충직한 하수인이자 마물 사육사에게 금화가 가득 든 주머니를 던져 주었다.

“감사합니다, 카티르.”

묵직한 주머니가 헐렁한 로브의 소매 속으로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다음 지시가 있을 때까지 조용히 대기하고 있거라.”

마구스는 미카엘이 물러가고 나자 화려한 크리스털 잔에 독한 술을 부어 마시며 오늘의 일을 자축했다.

“황제의 면전에서 친히 계시의 내용을 읊어 주지 못한 건 꽤나 아쉽게 됐군.”

성녀를 제 편으로 끌어들인 것이 과연 득이 될까, 아니면 독이 될까.

앞날을 예측하던 마구스가 아주 재미있다는 듯 큭큭 소리 내어 웃었다.

신의 계시를 전하는 카티르, 황권에 버금가는 대단한 권력을 틀어쥔 신전의 수장, 그것이 마구스였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자신의 뜻이 곧, 신의 뜻이 되기 시작하면서 그는 스스로 신을 자처하고 있었다.

* * *

“일단은 씻으시는 게 좋겠어요.”

키언의 침실에 들어서자마자 샤로니아가 말했다. 키언은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상황이 여유롭게 목욕이나 즐길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

“아뇨, 그 정도 여유는 있어요.”

샤로니아가 조금의 틈도 주지 않고 대답했다.

이 남자는 황제씩이나 되면서 왜 자기 몸을 돌볼 줄 모르는 걸까. 생각 같아서는 자기 몰골 좀 보라고 거울 앞에 세워 두고 싶었지만, 황제에게 그러면 안 될 테고.

샤로니아는 애써 미소 지으며 그를 설득하기 위해 힘썼다.

“네 목숨이 달린 일이야. 여유 따위 있을 리가 없잖아.”

그의 말에 샤로니아의 눈동자가 한차례 흔들렸다.

‘아아, 나 때문에…….’

이 남자는 사람 마음을 복잡하게 만드는 데 선수다. 왜 나보다 나를 더 걱정하는 것 같지?

샤로니아는 한차례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정돈한 뒤 차분하게 말했다.

“어차피 산 정상에서 분향해야 하잖아요. 그러면 호라산 쪽이 아니라 그리딤산 쪽으로 가면 돼요.”

호라산은 특이한 산이었다. 그 산은 두 개의 이름을 갖고 있었으니까.

호라산의 다른 이름은 그리딤산이었다. 이 산이 두 개의 이름으로 불리게 된 이유는 산의 절반은 햇볕이 들지 않아 마물의 서식지가 되었고, 또 다른 절반은 햇볕이 잘 들 뿐만 아니라 온갖 자원이 풍부해서 일 년 내내 푸름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극과 극이 공존하는 산, 축복과 저주가 동시에 임한 산이 호라와 그리딤이었다.

어차피 산 정상이 목적지라면 마물이 득실거리는 위험한 호라산 쪽이 아니라 비교적 안전하고 위험 요소가 적은 그리딤산 쪽으로 가면 되지 않겠냐는 것이 샤로니아의 계산이었다.

물론 그리딤산 쪽을 거치더라도 호라산에 발을 들여놓아야 한다는 것은 바뀌지 않는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해 볼 만한 일이었다.

샤로니아의 말을 들은 키언이 고민하며 턱을 문질렀다. 현재로선 그녀가 제시한 방안이 가장 현명한 대처일 것 같다.

“그럼, 네 말대로 계획을 세우고 인원을 꾸리도록 하지.”

“설마 같이 가겠다는 말씀이세요?”

샤로니아의 질문에 키언이 어이가 없다는 듯 헛숨을 뱉어 냈다.

“그럼 짐 없이 혼자 갈 생각이었나?”

겁도 없이, 무슨 생각으로. 키언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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