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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요망한 구원자 (18)화 (18/123)

18화

기껏 해 봤자 어디 가서 값싼 기성복이나 사 오겠거니 했다. 하지만 샤로니아가 입은 옷은 완전히 차원이 달랐다. 고가의 맞춤 의상이 분명할 정도로 그 완성도가 무척이나 훌륭했다.

한 땀도 비틀리지 않은 금색 자수와 엄청난 시간과 공이 들어갔을 장식품이 빼곡히 들어찬 드레스는 한 번만 입어 보았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할 만큼 황홀함, 그 자체였다.

그 말인즉슨 그냥 운이 좋아서 구할 수 있는 드레스가 아니라는 소리다.

생각할수록 분해서 리비어는 발을 쿵쿵 구르며 걸었다.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대로 퍼레이드용 마차를 타고 나간다면 사람들의 시선을 독차지하는 것은 물론, 온갖 칭송을 다 받게 될 것이다.

리비어는 대신전 외부로 이어지는 높다란 계단 위에서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계단 밑엔 오늘을 위해 정성껏 준비한 퍼레이드용 마차가 성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만일 여기서 ‘사고’가 일어난다면…….’

리비어는 샤로니아가 높은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모습을 상상하며 입매를 비틀었다.

사고는 언제 어느 때고 일어날 수 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사고’였으니까.

20년 만에 선택받은 성녀에게도 예상치 못한 불미스러운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오, 여신이시여. 그렇지 않습니까? 성녀도 얼마든지 사고를 당할 수 있지요.’

리비어는 비열한 웃음을 입가에 가둔 채 버릇처럼 여신을 향해 중얼거렸다. 그녀의 머릿속엔 이미 성녀가 어떻게 ‘사고’를 당할지 구체적인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한 상태였다.

‘아름다운 드레스에 심취한 성녀, 치맛자락에 발이 걸려 계단에서 추락하다!’

이 정도면 꽤 그럴듯하지 않나? 리비어는 입술을 비집고 나오려는 웃음을 꾹 눌러 참으며 정확한 위치를 계산했다.

샤로니아가 자신을 스쳐 지나갈 때 슬며시 치맛자락을 밟는 것이다. 그러면 균형을 잃은 그녀가 별수 없이 계단 아래로…… 꽈당!

사고 장면과 함께 머릿속에 떠오른 파열음이 아주 맑고 경쾌했다.

리비어는 계산이 확실히 서자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샤로니아가 자신의 곁을 지나치려는 순간……!

“여기서부터 에스코트는 짐이 하지.”

누군가 성녀와 자신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커다란 등판이 해를 가리고 선 것을 리비어는 짜증스럽게 노려보았다. 끼어든 불청객 주제에 그는 아예 자신을 무시하고 있었다.

“도대체 누가……?”

리비어가 신경질이 섞인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자 서늘한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누군가와 시선을 마주한 리비어의 눈동자가 순간 커다랗게 변했다.

“황제 폐하?”

리비어는 잠시 멍하게 키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햇볕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은발과 지나치게 잘생긴 이목구비가 서늘한 그의 눈빛은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짐이 하면 안 될 이유라도 있나?”

삐딱하게 고개를 꺾고 내려다보는 키언의 고압적인 눈빛에 리비어는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아, 아니요. 그, 그럴 리가요.”

손사래까지 치며 뒤로 물러난 리비어는 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렸다. 젠장, 이게 아닌데.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든 상관없이 황제는 성녀밖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굴었다. 어쩐지 그게 더 약이 오르고 속이 뒤집혔다.

“오랜만이군.”

키언이 샤로니아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녀는 키언이 내민 손을 잠시 바라보다가 그 위에 제 손을 얹었다. 에스코트를 위해 당연히 해야 할 신체 접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긴장되었는지 손끝이 뻣뻣해졌다.

“그러게요. 며칠 못 뵈었는데 정말 오랜만이에요.”

하지만 ‘오랜만’이라는 키언의 말이 재미있어 쿡,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키언이 뭔가 항의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꾹 다물었다.

원래는 그녀를 만나자마자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가놓고 연락 한번 없을 수 있느냐. 다시는 술 같은 건 입에 대지도 말아라. 뭐 이런 종류의 잔소리 말이다.

하지만 그녀를 본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오늘의 그녀는 여신이 지상에 내려왔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아름다웠으니까.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게 단장한 그녀가 해사하게 웃자 키언이 어색하게 크흠,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녀가 시야에 가득 맺힌 나머지 눈이 아린 것도 같았다.

“못다 한 말은 퍼레이드가 끝나고 하지.”

키언은 샤로니아의 귓가에 낮게 속살거리며 뒤편에서 다가오는 대사제장 마구스를 흘끔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구스에게 보란 듯이 샤로니아의 손등에 키스했다.

“폐하?”

아직 마구스를 발견하지 못한 샤로니아는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살짝 눈이 커졌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제가 경의의 표시로 성녀의 손등에 키스를 남긴다는 것은 항간에 떠도는 소문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도 여전히 보기가 좋군요.”

등 뒤에서 들려오는 마구스의 목소리에 샤로니아가 어깨를 흠칫 떨었다.

“오늘도, 라니? 언제 안 그런 적이 있었다고.”

키언이 웃으며 대꾸했다. 분명히 그의 얼굴은 웃고 있는데 어쩐지 서늘한 기운이 주변에 쫙 퍼지는 것만 같다.

“그렇습니까?”

마구스는 높낮이 없는 말투로 답하며 샤로니아를 훑듯이 바라보았다. 도저히 신전의 솜씨라고 여길 수 없는 샤로니아의 차림새를 본 마구스가 티 나지 않게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황제 폐하의 솜씨이십니까?”

샤로니아의 의상을 보고 묻는 말에 키언이 콧방귀를 뀌었다. 꼴에 보는 눈은 있단 말이지.

“준비는 신전 측에서 다 하기로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키언이 미간을 찡그리며 말하자 마구스가 슬쩍 입매를 비틀었다. 황제가 시치미를 뗀다면 맞춰 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보는 눈이 많은 이상 신전의 체면을 차리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니.

“그렇군요. 신녀들이 이렇게 최선을 다해 일하리라곤 예상치 못해서 말입니다. 담당자들에게 상이라도 내려야겠군요.”

샤로니아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답한 마구스는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인지 도통 표정이 읽히지 않았다.

“뭐, 그건 신전 측에서 알아서 할 일이고.”

키언이 별 관심 없다는 듯이 대충 대답하자 마구스의 표정에 미세하게 금이 갔다. 더 이상 황제에게 휘둘리기 싫었는지 마구스가 급하게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시간이 다 되었군요. 이제 마차에 오르도록 하지. 여신의 축복이 함께 하길.”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감정을 갈무리한 마구스가 뱀처럼 반들거리는 눈이 접히도록 웃으며 샤로니아에게 인사말을 건넸다.

키언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샤로니아가 마차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출발하거라!”

마구스의 명령이 떨어지자 개방형 사륜마차가 천천히 출발했다. 키언은 미리 준비된 백마에 올라탄 뒤, 행렬에 가담했다.

퍼레이드는 성녀의 탄생을 알리는, 온전히 성녀를 위한 행사였다. 하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것일 뿐, 실상 마구스가 원한 것은 신전의 건재함을 제국 내에 드러내는 것이었다.

20년 동안이나 선택받은 성녀가 나오지 않자 신전은 흉흉한 소문에 휩싸였다. 여신이 타락한 신전을 버렸다느니, 신은 존재하지 않다느니 하는 종류의 소문들이었다.

운이 좋았던 것인지 성녀가 선택되고 비가 내리는 호재가 겹쳤다. 마구스는 이것을 십분 활용할 계획을 세웠다.

‘성녀는 신전의 꼭두각시일 뿐이야.’

마구스는 샤로니아를 신전의 꼭두각시로 쓸 생각이었다. 혹은 체스 판에서 사용할 말과 같은 존재로 말이다. 쓰임이 다 하면 언제든 가차 없이 버릴 수 있는 그런 소모품 정도. 샤로니아의 역할은 딱 거기까지였다.

그런데 계획에 차질이 생기기 시작했다. 자기주장이 강하고, 시키지 않은 일을 하며, 고분고분하지 않은 것은 꼭두각시로서 실격이다.

마구스는 멀어지는 퍼레이드용 마차를 보며 까득, 이를 갈았다.

‘황제와 한편이 되었단 말이지?’

자신이 성녀를 황제 쪽에 은근히 붙인 것은 그녀를 통해 황제의 약점을 틀어쥐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오늘 분위기를 보아하니 성녀가 황제 쪽 사람이 되었다.

마구스는 그걸 그냥 지켜보고 있을 성미가 못 되었다.

“미카엘.”

쇳소리처럼 성대를 긁는 기분 나쁜 목소리가 누군가를 찾았다.

“찾으셨습니까, 카티르.”

사제복을 입고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가 곧바로 대답했다. 마구스는 익숙한 손짓으로 그를 가까이 불러들였다. 남자가 다가오자 마구스는 입매를 비틀어 올리며 말했다.

“할 일이 있다.”

마구스의 눈빛이 음산하게 번뜩였다.

* * *

“우와, 저분이 이번에 선택된 성녀님?”

“엄마, 성녀님에게서 빛이 나요.”

샤로니아가 탄 퍼레이드용 마차가 지나갈 때마다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들은 한결같이 순수한 호기심과 탄성을 담고 있었다.

샤로니아는 마주치는 눈길마다 온화한 미소로 화답해 주었다. 그들이 보이는 관심은 이제껏 겪어 왔던 것들과는 결이 달랐다. 신전에서 받아왔던 시선이 적대감, 시기심, 멸시와 같은 것들이었다면 군중이 보내는 시선은 동경에 가까웠으니까.

샤로니아가 미소 지을 때마다 정말 여신의 축복을 받기라도 한 것처럼 사람들의 얼굴에 행복감이 서렸다.

“타고났군.”

웃음기를 머금은 묵직한 목소리에 샤로니아가 고개를 돌렸다. 백마를 탄 키언이 마차와 속도를 맞추어 말을 몰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보니 어쩐지 긴장감이 조금 풀리는 기분이라 샤로니아는 설핏 웃으며 말했다.

“먼저 가신 줄 알았어요.”

“설마, 그러길 원했나?”

샤로니아의 말에 키언이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뇨, 그럴 리가요.”

샤로니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금빛 베일이 반짝반짝 빛났다.

황제가 신전의 행사에 참여하는 것은 황실과 신전이 돈독한 관계임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황제는 퍼레이드의 가장 선두에서 행진했고, 성녀가 광장 중앙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가 버리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이렇게 황제와 성녀가 나란히 행진하는 것을 본 적 없던 제국민들은 처음 보는 광경에 눈이 휘둥그레졌다가, 곧 눈을 즐겁게 하는 선남선녀의 모습에 환호하며 꽃을 흔들었다.

아주 성공적인 퍼레이드였다.

* * *

퍼레이드를 끝내고 황궁에 돌아오자 날이 어둑해지고 있었다.

고된 하루였던 만큼 샤로니아는 곧장 하트론 궁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키언의 한마디에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우린 할 이야기가 있지 않나?”

키언이 샤로니아를 향해 고갯짓을 까딱했다.

글쎄, 반드시 나눠야 할 이야기는 없는 것 같은데. 샤로니아는 그런 생각이 불쑥 솟아올랐지만 내색하지 않은 채 대답했다.

“뭐, 그러시다면야…….”

샤로니아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황제의 집무실로 향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샤로니아는 그의 집무실로 향하는 내내 그런 생각을 하느라 머릿속이 시끄러웠다.

“오, 딱 맞춰서 왔군.”

행사가 끝난 뒤 이것저것 지시를 내리고 마침 본궁으로 들어서던 키언이 반가운 얼굴을 했다. 조금 전까지 함께 있었으면서 저렇게 반가운 기색을 하다니.

샤로니아는 고민하던 것을 잊고 픽 웃고 말았다. 그들은 나란히 복도를 걸어 집무실 앞에 도착했다.

달칵, 문을 열고 집무실 안으로 걸음을 내디딘 키언이 탁자 위에 세팅되어 있는 샴페인을 보고 와락 미간을 구겼다.

“누가 이걸……!”

울컥한 키언이 목소리를 높이다가 샤로니아를 의식하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녀는 자신이 황궁 내에 금주령을 내렸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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