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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요망한 구원자 (15)화 (15/123)

15화

“다른 곳요?”

샤로니아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묻자 키언이 아주 즐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꽤 심한 불면증이라 한 곳만 만져선 어림도 없을걸.”

너무 당당하게 말하니 거부할 수가 없었다. 이파리를 비빈 손끝이 키언의 귓불을 스치고 그 뒷부분을 지그시 눌렀다.

“민트 향이 심신을 안정시켜 줄 거예요.”

괜히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하며 샤로니아는 묘한 분위기를 벗어나고자 했다.

“흠, 겉보기엔 볼품없는 풀 같은데 이렇게 좋은 효능이 있을 줄은 몰랐네.”

“그렇죠. 눈여겨보지 않으면 잘 모르는 게 당연해요.”

손끝에 닿는 피부의 감각을 애써 무시하며 샤로니아가 거의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이 좋은 걸 짐만 누릴 순 없지.”

키언이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워터 민트 잎을 툭, 뜯어 냈다.

“예? 그게 무슨?”

그의 말을 이해하려는 듯 샤로니아가 눈을 크게 뜨자 키언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지. 나만 숙면을 취할 순 없잖아?”

그러곤 민트 잎을 문지른 손을 그녀의 이마 쪽으로 뻗었다. 샤로니아의 흘러내린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걷어 낸 키언이 그녀가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관자놀이 쪽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알싸한 향과 함께 뜨거운 열감이 훅 끼쳐 올라왔다. 아주 소중한 것을 대하듯 조심스러운 손길은 오히려 긴장감을 부추긴다.

그가 짙어진 시선으로 머리칼을 걷어 내고 제 얼굴에 손을 댈 때까지 그 짧은 찰나가 무한대의 시간처럼 시야에 느리게 펼쳐졌다.

샤로니아는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려 괜히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알려 준 대로 잘하고 있는 건가?”

키언이 이번엔 그녀의 귓불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방해되는 머리칼을 그가 걷어냈다. 머리카락이 드리웠던 공간이 비워지자 서늘한 밤공기가 목덜미를 스치는 것이 느껴진다.

단지 손끝이 닿은 것뿐인데, 어째서 이렇게 몸의 감각이 예민해지는 걸까. 샤로니아가 납득할 수 없다는 듯이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야릇한 분위기는 전염성이 강하다.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한번 야릇해지기 시작한 분위기는 걷잡을 수 없는 충동을 향해 치달았다.

키언은 그녀의 새하얀 목덜미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꿀꺽, 저도 모르게 마른침이 넘어갔다. 민트 향이 원래 이렇게 야했나?

키언은 끓어오르는 충동을 애써 누르며 천천히 그녀의 머리카락을 걷어 냈다. 가느다란 목덜미는 제 손안에 들어오고도 남을 정도다.

그러니 그녀의 뒷머리로 손을 집어넣어 아주 약간만 힘을 주면 당장 제게로 쑥 딸려 올 것이다. 그 틈에 입술을 삼키면…….

새빨간 상상이 난무하는 머릿속은 매우 시끄러웠다. 그것과는 별개로 키언은 꿋꿋이 그녀의 귓불을 손끝으로 꾹 눌렀다. 그녀와 접촉할 수 있는 이 좋은 기회를 날릴 수는 없었으니까.

보드라운 피부가 손끝에 감기듯 착 달라붙었다. 저절로 뜨거운 숨이 잇새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젠장, 숙면 좋아하시네! 이러다간 또다시 밤을 꼴딱 지새울 것 같은데. 키언은 자조하듯 으르렁거리며 급하게 손을 거둬들였다.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워터 민트에 최음 효과가 있는 것도 아닐 테고. 그냥 이건…… 제정신이 아니라는 방증일 뿐이다.

한차례 전율이 휩쓸고 간 자리에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민트 향이 나는 성수를, 팔까 해요.”

눈치를 보던 샤로니아가 먼저 말을 꺼냈다.

“크흠, 그래. 꽤 괜찮은 아이템이네.”

제가 생각한 ‘괜찮은’의 범주가 일반적인 것에서 완전히 벗어난 거라는 걸 그녀가 굳이 알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해요.”

싱긋 웃는 그녀를 보니 어쩐지 양심이 콕콕 찔린다.

“그런 인사는 하지 말라니까.”

“네?”

그런 인사를 들으면 불순한 제 모습을 거울로 들여다보는 것 같았으니까.

“아무튼 안 팔리면 짐이 다 사 줄 테니 걱정하지 마.”

성수가 아니라, 성수의 주인에게 목적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것을 살 가치는 충분했다.

“예? 그건 안 돼요.”

샤로니아가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 만일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빚진 돈을 갚는 게 아무 의미가 없었으니까.

“이 일은 제가 알아서 추진할 테니 중간에서 손쓰시면 안 돼요.”

샤로니아가 미심쩍었는지 신신당부를 했다.

“흠, 뭐, 그러지.”

그에 비해 대답은 별로 시원치 않았다.

“인제 그만 돌아갈까요?”

샤로니아는 필요한 것들에 대한 확인을 마쳤으니 계속해서 머물 이유가 없어졌다고 판단을 내린 반면, 키언은 아쉬움이 묻어나는 얼굴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달빛에 둘러싸인 분수대는 아주 로맨틱해 보였다. 마치 데이트하기 아주 적합한 장소처럼.

하? 데이트라니. 미쳤나 보군.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생각을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는 통제가 되지 않는 생각을 억지로 갈무리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데려다주지.”

“굳이 안 그러셔도…….”

“지금 감히, 황제의 호의를 무시하는 건가?”

그는 치열하게 접전을 벌이는 머릿속을 애써 무시하며 허울 좋은 기사도에 제 행동이 포장될 수 있기만을 바랐다.

“아뇨, 그게 아니라…….”

곤란한 듯 말끝을 흐리던 샤로니아는 이내 단념한 듯 키언의 옆에 나란히 섰다. 키언은 손끝으로 한 차례 턱을 쓰다듬으며 입매가 늘어지려는 것을 바로잡았다.

도둑고양이처럼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조심스럽게 오가던 길을 키언과 걷자 마치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밀회를 즐기는 연인처럼 야릇한 느낌이 되었다.

“왜? 할 말이 있나?”

키언이 자신을 흘끔거리는 샤로니아를 보며 물었다.

“그냥, 저한테 왜 이렇게 잘해 주시는지 궁금해서요.”

“총애 받는 성녀를 원한 게 아니었나?”

단지 그걸 묻는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 말을 돌리는 황제가 어쩐지 밉상이다. 샤로니아가 곱게 눈을 흘기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렇다고 황제에게 대들 수도 없는 노릇이니.

“글쎄…… 실은 짐도 그게 알고 싶은데 말이야.”

“네?”

샤로니아가 그의 말뜻을 파악하려는 듯이 멈춰 서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달빛을 등에 업은 남자가 자신을 돌아보며 싱긋 웃는데 이상하게도 가슴이 술렁거린다.

“뭐, 이제부터 알아보려고.”

그녀의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내려다보던 키언이 충동적으로 뒷말을 덧붙였다.

“같이 알아볼까?”

마치 해서는 안 될 불법적인 일을 제안하는 사람처럼 그의 얼굴이 위험해 보였다.

“아, 네, 뭐…….”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인 샤로니아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다. 도대체 뭘 같이 알아보자는 거야? 술렁거리는 마음이 진정되기는커녕 엉킨 실타래처럼 더 복잡해진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하트론 궁 앞에 도착해 버렸다. 샤로니아는 고개를 들어 키언의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달빛을 받은 은발이 반짝거리며 존재감을 뽐냈다. 달빛이 무색하다 느낄 만큼 찬란하게 빛나는 금빛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가 없었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해요.”

샤로니아는 관찰하는 듯한 시선을 숨기며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레이디에겐 당연한 일인 것을.”

키언이 장난스럽게 말하며 한 손을 가슴팍에 대고 살짝 묵례했다. 그의 행동에 슬쩍 웃음이 삐져나왔지만, 마음껏 웃기엔 머릿속이 꽤 복잡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샤로니아는 돌아서며 생각했다. 이 감정이 도대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다고. 그리고 그와 접촉할 때 느꼈던 감각이 실제인지 좀 더 알아봐야겠다고.

그것이 후일 키언을 얼마나 괴롭게 할지, 그때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 * *

다음 날, 샤로니아는 하트론 궁을 방문한 헤이든 델라크 백작과 티타임을 가졌다.

“외출은 좋으셨습니까?”

헤이든이 마치 다 안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샤로니아를 보고 싱긋 웃었다.

아, 잊고 있었다. 그림자 기사단을 꾸려 저를 호위하게 해놓은 것을.

지난밤에 황제와 함께 예정에 없던 밤 산책을 했으니 그녀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외출하고자 했던 소기의 목적은 이루었지요.”

샤로니아는 덤덤하게 대답하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자신이 예상한 반응이 아니었는지 헤이든이 코끝을 살짝 찡그렸다.

“폐하께서 보기보다 재미가 없으시죠?”

그 말은 넘겨짚어 말하기보다 그녀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듯한 질문이었다.

“재미가 없진 않으신데요. 친절하고, 매너도 좋으시고.”

샤로니아가 말을 내뱉을수록 헤이든의 표정이 서서히 구겨지기 시작했다.

“예에? 정말요? 폐하께서 재미있는 데다, 친절하고, 매너도 좋으시다고요?”

잘못 알고 있는 무언가를 정정해 주고 싶은 사람처럼 헤이든이 목소리를 드높였다.

“아닌가요?”

샤로니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의 얼굴을 응시했다. 안 그래도 키언에 관해서 알아보고 싶은 것이 많던 차였다.

헤이든의 반응을 보니 궁금증에 더욱 불이 붙었다.

“뭐, 성녀님께서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요.”

겨우 짜낸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한 헤이든이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다 이어 말했다.

“그렇다는 건…… 성녀님이 폐하께 특별하다는 의미일 텐데? 맙소사!”

헤이든이 뭔가를 깨달은 것처럼 무릎을 탁, 쳤다. 그리고 눈을 반달처럼 휜 채 차를 호록호록, 소리 나게 마신다.

샤로니아는 키언과의 관계가 특별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들은 계약서까지 작성한, 엄연한 동맹 관계였으니까.

하지만 그것을 헤이든에게 말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인정하듯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헤이든의 입장에서는 그 모습이 전혀 다른 뜻으로 해석되었다.

“폐하께서 잘생기고 멋지긴 하지만, 그걸 감수하고 옆을 지키기엔 언제 어느 때 비명횡사할지 모르는 자리라…….”

그녀가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어쩌다 그런 위험한 자리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냐며.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샤로니아는 정중하게 답하며 빙긋 웃었다. 키언과 손을 잡지 않았다면 지금 자신의 상황은 훨씬 더 참혹했을 것을 알았으니까.

“흐음, 성녀님도 폐하와 꽤…… 닮으셨군요?”

농담에 농담으로 받아치는 것이 아니라 한없이 진지하게 대꾸하는 것을 보니. 세상천지에 이렇게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또 있을까 싶다.

“예? 그런가요?”

샤로니아가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헤이든은 결심했다. 이 잘 어울리는 한 쌍의 바퀴벌레를 자신이 꼭 도와주어야겠다고.

모르긴 몰라도 그 목석같은 황제가 연애를 한다면 답답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더군다나 귀족 간의 알력 싸움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고.

성녀라고는 하나, 아직 어리고 순진한 아가씨가 감당하기엔 버거운 가시밭길이 될 터였다.

“말만 해요. 내가 뭐든 도와줄 테니.”

측은한 표정으로 밑도 끝도 없이 외치는 헤이든의 말에 샤로니아가 멈칫했다. 도움을 요청할 일이 있긴 한데, 그걸 어떻게 알았지?

각기 다른 생각의 루트가 아슬아슬하게 이어져 있는 줄도 모르고 샤로니아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안 그래도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었어요.”

“어려워하지 말고 말만 해요.”

헤이든의 눈이 빛났다. 그 눈 속에는 아주 오랜만에 사명감 비슷한 것이 타오르고 있었다. 덕분에 헤이든의 굉장한 기세에 눌린 샤로니아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귀족들의 모임에 다리를 놔줄 수 있을까 해서요.”

샤로니아의 말을 듣는 순간, 헤이든은 생각했다.

‘끔찍한 사교계에 발을 디딜 정도로 그를 사랑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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