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크로노스 왕국과의 국경에 더 많은 투자를 하기엔 올해 예산이 턱없이 부족……!”
국정 회의를 진행 중이던 바르칼라 공작이 보고를 하다 말고 크흠,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도 그럴 것이 키언의 눈이 감겨 있었기 때문이다.
바르칼라 공작의 시선을 따라 황제의 얼굴을 바라본 가신들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게 떠올랐다. 이 자리에 모인 가신들은 대부분 제국과 역사를 같이 해 온 유력한 가문의 귀족들이었고, 그들은 자신이 섬기는 주군을 무척이나 신뢰하고 있었다.
비록 사생아 출신에 전쟁귀라는 소문이 붙어 있는 황제이긴 했지만, 그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키언에게 설득당해 충성을 맹세한 이들이었다.
항상 예리하고 틈이 없던 황제가 지금 졸고 있다고? 보고도 믿지 못할 광경에 가신들은 입만 뻐끔거렸다.
“폐하, 폐하?”
테오르가 재빨리 키언의 곁에 다가가 낮게 속삭였다.
“바르칼라 공작, 그래서 예산이 부족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보고를 지금 하고 있는 건가?”
감았던 눈이 떠지며 예리한 금빛 눈동자가 드러났다. 졸던 이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날카로운 눈빛을 본 가신들은 ‘그러면 그렇지, 폐하께서 졸았을 리가 없어.’라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크로노스 왕국은 루하르 제국에 비하면 미미한 세력일 뿐입니다. 무역 쪽으로 투자하면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데 굳이 국경 지역에 예산을 할애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짙은 보랏빛 머리가 희끗한 바르칼라 공작이 키언을 똑바로 바라보며 자기 생각을 말했다.
한쪽 팔로 느른하게 턱을 괴고 있던 키언이 허리를 곧추세우며 입을 열었다.
“크로노스 왕국은 그 세력이 우리 제국에 비할 바가 못 되지만, 근래에 자주 국경을 침범해 오고 있지. 비록 국경 지역에 사는 제국민들이 소수라고는 하나 그들 또한 엄연히 제국민인데, 안전하게 보호받아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나?”
키언의 논리는 너무도 타당했지만, 뼛속까지 귀족인 자들은 굳이 평민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투자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폐하,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은 불가하다고 생각됩니다.”
가만히 지켜보던 브리엘 후작이 한 마디 거들자 회의 석상이 시끌벅적해졌다. 그 소란한 틈을 타 테오르가 키언에게 귓속말을 전했다.
“성녀께서 폐하를 뵙길 청하십니다. 언제쯤 다시 오라고 할까요?”
키언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회의 때 피곤해서 눈을 감게 만든 장본인이 여기 나타날 줄이야.
“들어오라고 해. 성녀의 고견을 청해 듣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군.”
“네?”
테오르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뜬 채 키언을 바라보았다. 오만한 귀족 남성들 앞에 성녀를 선보이고 싶은 황제의 저의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명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테오르가 급하게 고개를 숙인 뒤 밖으로 나가 샤로니아에게 황제의 뜻을 전했다.
문이 열리고 샤로니아가 들어오자 시끄럽던 귀족들이 일제히 입을 닫았다. 호기심과 불편함이 교차되는 눈빛을 바라보면서도 샤로니아는 의연하게 걸음을 내디뎠다.
황제가 어울리지 않는 이 자리에 자신을 초대했을 때는 원하는 것이 있을 터. 그것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는 푸른 눈이 요요하게 빛났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샤로니아가 무릎 살짝 굽혀 인사하자 키언이 귀족들에게 그녀를 소개했다.
“그대들은 처음 보겠군. 이번에 새롭게 선택된 성녀라네.”
“처음 뵙겠습니다. 샤로니아 파르비즈입니다.”
샤로니아가 예를 갖추어 인사를 한 뒤 허리를 곧게 펴고 섰다.
“쉬운 결정이 어려운 논쟁으로 번지고 있기에 그녀의 의견을 듣고 싶어 불렀네. 이의가 있나?”
귀족들은 키언의 눈빛을 피해 어색한 헛기침만 늘어놓았다. 이의가 있다 한들 그것을 대놓고 말하기엔 아무래도 껄끄러웠으니까.
더군다나 어려 보이는 외모의 성녀를 보니 무슨 대답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싶다. 요즘 황제가 성녀에게 푹 빠졌다는 소문이 돌던데 아예 지어낸 말은 아니었나 보군. 귀족들의 눈빛이 기민하게 서로 오갔다.
“제 의견을 물을 일이 있으십니까?”
의외라는 표정으로 샤로니아가 둥근 웃음을 지어 보였다.
“크로노스 왕국과의 국경 지대에 비용을 투자해 경비를 강화하자는 의견을 냈는데 말이야.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은 불가하다는군.”
키언이 바르칼라 공작의 얼굴을 쳐다보며 팔짱을 단단히 얽어 꼈다. 바르칼라 공작은 충성심이 뛰어나고 일 처리 능력도 좋았지만, 귀족 우월주의만큼은 해결이 안 되는 사람이었다.
가만히 상황을 파악하고 있던 샤로니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 불가하다라……. 그 소수에 공작님의 식솔이 포함되어도 말입니까?”
올곧은 푸른 눈은 마치 거울과도 같아서 제 시꺼먼 속내가 그대로 비치는 것만 같다. 바르칼라 공작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샤로니아를 노려보았다.
“부디 노여워 마세요. 그래도 제가 명색이 성녀인데 제국민의 목숨을 소홀히 여길 수는 없지 않습니까? 공작님의 식솔이 국경 지역에 있다고 생각하시고 사병을 내어 주시든지, 아니면 예산을 투자하여 절충하시든지 선택은 공작님 몫이 되겠군요.”
어린 외모가 무색할 정도로 매끄러운 말솜씨에 여기저기서 작은 탄식들이 터져 나왔다. 바르칼라 공작은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입만 달싹였다.
“공작.”
“예, 폐하.”
키언이 묵직한 음성으로 부르자 바르칼라 공작이 고개를 숙였다.
“공작은 어찌하고 싶은가?”
그에게 의견을 묻고 있었지만, 실상 공작의 선택은 샤로니아의 대답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기로에 놓여 있었다.
“국가 예산을 투자, 하기로 하지요.”
개인 사병을 국경까지 보내겠다는 말은 죽어도 나오지 않는지 바르칼라 공작이 눈 밑을 파르르 떨며 대답했다.
“현명한 선택이네.”
키언의 입매가 넓은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그 후로 몇 가지 안건을 더 처리하고 회의를 마치자 귀족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마 문을 나서자마자 샤로니아에 대한 말을 늘어놓겠지만 일단 귀족들은 황제 앞에서는 그런 티를 내지 않으며 물러 나왔다.
“짐을 찾은 이유는?”
키언이 건네는 말에 샤로니아가 곱게 눈을 흘겼다.
“오늘 절 이용하셨습니다.”
“그게 우리가 맺은 관계이지 않나?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관계 말이야.”
키언이 뻔뻔하게 고개를 들자, 샤로니아의 두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폐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제가 한결 편하게 부탁을 드릴 수 있겠군요.”
샤로니아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한 목소리로 말하자 옆에서 조용히 대화를 듣고 있던 테오르가 풋, 소리를 내다가 놀라 입을 막았다. 테오르를 한 번 노려본 키언이 턱을 매만지며 샤로니아에게 물었다.
“얼마나 대단한 부탁을 하려고?”
잠시 눈을 반짝이던 샤로니아가 곧바로 말했다.
“돈 좀 빌려주세요.”
응? 뭘 빌려달라고? 키언이 눈을 크게 뜨고 황망한 얼굴로 샤로니아를 바라보았다.
“그냥 달라는 게 아니라 엄연히 빌리는 거예요.”
샤로니아가 싱긋 웃자, 키언은 막힌 숨을 토해 내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지?”
“아, 그리고 황실 마차도 좀 빌릴게요.”
설상가상으로 요구 사항이 하나가 아니다?
키언이 눈썹을 꿈틀거리자 샤로니아는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해사하게 웃음 지을 뿐이었다. 마치 이렇게 웃는 낯으로 기다리면 그가 결국 모든 것을 승낙해 줄 것이라는 데 한 점의 의심도 없는 듯한 말간 얼굴이었다.
“마차를 빌려드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나, 국고를 마음대로 빌려 가는 건 안 될 말씀입니다. 하지만…….”
테오르가 결사적으로 반대 의견을 피력하다가 뭔가 할 말이 남았는지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샤로니아가 괜찮으니 하던 말을 계속해 보라고 고갯짓을 했다. 그제야 테오르가 슬며시 웃으며 뒷말을 덧붙였다.
“국고는 안 되지만, 폐하의 개인 자금은 상관없지요.”
“뭐?”
키언이 테오르를 노려보자 그는 조용히 먼 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걱정하지 마세요. 빠른 시일 내에 이자까지 쳐서 갚을게요. 나쁜 짓을 하려는 건 아니니 윤허해 주세요.”
하아, 이런 요망한 여자 같으니라고. 키언이 낮은 한숨을 토해 내며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계약 내용에 필요한 부분은 적극적으로 협조한다는 사항이 있었기 때문에 마냥 안 된다고만 할 순 없었다.
그걸 알았기에 이런 수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자신이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더 요망한 거다. 그녀의 손바닥 안에 놀아나는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 없어서.
그런데도 기꺼이 놀아나 주고 싶어져서.
* * *
“우와, 제가 황실 마차를 타다니 믿어지지가 않아요.”
엘런이 연신 감탄을 내뱉으며 마차의 의자며 문틀을 어루만지는 것을 샤로니아는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황제 폐하께 마차를 빌려달라고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달라고 할 걸 그랬나?”
“예에?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샤로니아의 말에 엘런이 마차 천장에 머리를 찧을 정도로 펄쩍 뛰었다.
“누가 진짜로 그렇게 한대? 희망 사항이었어, 희망 사항.”
엘런을 놀리는 맛이 제법 쏠쏠하다고 생각하며 샤로니아가 쿡, 웃었다.
“그나저나 어딜 가시는 길이세요?”
엘런이 창밖을 내다보며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마차가 진입한 곳은 귀족들이나 다닐 법한 번화가였기 때문이다.
“데리러 오기로 약속했었거든.”
샤로니아가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며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표정이 꽤 복잡했기에 엘런은 더 이상 묻지 못하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마차가 도착했다. 달칵, 문이 열리고 목적지를 확인한 엘런의 두 눈이 커졌다.
‘레오나 부티크’
제국민이라면 누구나 그 이름을 알 만큼 유명한 곳이었다. 이곳은 유력 귀족에게만 맞춤 의상을 제작해 주었기 때문에 마담 레오나의 옷을 입었다는 것만으로도 사교계의 대우가 달라질 정도였다.
형편이 그렇다 보니 마담 레오나의 콧대는 날이 갈수록 드높아져 그녀가 만드는 의상은 부르는 게 값일 정도로 비합리적인 금액을 자랑했다.
딸랑, 가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종업원 하나가 빠르게 다가왔다.
“어서 오세요. 레오나 부티크를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상냥하던 종업원의 말투가 샤로니아의 옷차림을 훑고 난 뒤 급격히 달라졌다.
“혹시, 예약하셨나요?”
아직까지는 예의를 차리고는 있었지만, 말투에 묻어나는 업신여김은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상대방의 신분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차림새로 사람을 판단하는 종업원의 모습은 부티크의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를 대변해 주는 것 같았다.
“아니, 예약 안 했는데.”
“네?”
당당한 샤로니아의 대답에 종업원의 얼굴이 일순 멍해졌다.
“예약을 꼭 하고 와야 하나?”
샤로니아의 태도가 너무 당당해서 종업원은 당황스러웠다. 정말로 저런 옷차림에 예약도 하지 않고 이곳을 드나들 수 있다고 여기는 건가? 막 시골에서 상경한 촌뜨기가 아니고서야 수도의 물정을 모르는 것은 말이 되지 않을 테고.
종업원은 샤로니아의 당당함의 원인을 찾아 빠르게 눈을 굴렸다. 그러다 밖에 세워진 마차가 눈에 들어왔다. 황실 깃발을 꽂은 마차를 본 종업원의 눈이 지진을 일으키며 흔들렸다.
“꼬, 꼭 예약을 하고 오실 필요는 없지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지만 그래도 황실 사람에게 밉보여서 좋을 것은 없었다.
“의상을 맞추려고 하십니까?”
볼품없는 손님을 받아 부티크의 격을 떨어트렸다며 마담 레오나가 잔소리해 댈 것이 눈에 선연했지만, 종업원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 사람을 찾고 있네.”
“사람요?”
종업원이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역시 제 눈이 틀리지 않았다. 이로써 오늘 영업에 하등 도움이 될 것 없는 방문자라는 게 확인되었다.
“이멜다 랑베르.”
“네? 누, 누구요?”
샤로니아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을 들은 종업원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어깨를 흠칫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