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만일 그가 황제만 아니었다면 샤로니아는 자신의 생각을 곧장 행동으로 옮겼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감히 황제의 머리를 쓰다듬는 짓은 할 수 없었기에 대충 웃음으로 무마할 뿐이었다.
“이봐, 어째서 웃는 거지?”
키언이 모로 누워 한 팔로 머리를 괸 채 샤로니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글쎄요? 아까 폐하께서도 혼자 웃으셨으니, 그 복수쯤으로 해 두죠.”
그제야 자신도 그녀가 공감하지 못할 웃음을 터트렸던 것이 기억난 키언이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이 했던 그대로 돌려받는 기분은 어쨌든 썩 유쾌하진 않았으니까.
그녀의 심경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낱낱이 알아내고픈 마음이 요동친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되겠지.
그는 뭐라고 답하는 대신 미동 없이 샤로니아를 주시했다. 구름에 감추어졌던 달빛이 커튼 사이로 스며들며 그녀의 모습이 또렷하게 시야에 맺혔다.
‘웃으니 더 예쁘군.’
원래도 예쁜 얼굴이긴 했지만, 평상시 그녀는 얼굴에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무심한 표정은 그거대로 매력이 있었지만 그래도 웃는 얼굴에 비할 순 없었다.
달빛 때문에 그의 모습이 보이는 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였는지 서로 눈이 마주쳤다.
은은한 달빛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은발이 반짝거리는 것을 샤로니아는 홀린 듯이 눈에 담았다. 달빛보다 더 진한 금빛 눈동자 속에 제 모습이 맺혀 있는 것을 보니 어쩐지 기분이 묘했다.
그가 머리를 괴고 모로 누워 있었던 탓에 입고 있던 가운이 벌어져 맨 가슴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더군다나 열기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눈빛은 웬만한 여자가 버텨 내지 못할 정도로 뜨겁기까지 하다.
눈만 마주쳤을 뿐인데 아찔한 감각이 발끝에서부터 퍼져 나가 전신을 관통했다.
어째서 이런 느낌이 드는 것일까. 샤로니아는 처음 느껴본 생경한 감각의 원인을 찾기 위해 어둠 속에서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그 순간 키언의 생각도 샤로니아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못하는 이유를 찾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러다 아주 조악한 변명거리를 찾아내었다.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까닭은 오늘따라 유난히 달빛이 환하기 때문이라고.
달빛이 이토록 밝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웃는 얼굴을 보지 못했을 것이고, 이토록 홀린 듯이 눈에 담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마치 그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듯 쏟아지는 달빛은 그녀의 얼굴 위로 음영을 만들며 긴 속눈썹에 그림자를 드리우게 했다. 그녀가 천천히 눈을 깜박일 때마다 짙푸른 눈동자가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는 마치 오아시스를 만난 사람처럼 그 눈동자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심연을 연상시키는 푸른 눈은 마치 마력을 지닌 것처럼 그의 눈길과 생각을 모조리 빨아들였다.
거기에다 남자를 홀리고도 남을 정도로 깊이 파인 얇은 튜닉은 머리가 어찔할 정도로 유혹적이다. 달빛을 받아 더 매끄러워 보이는 어깨와 풍만한 가슴선이 자꾸만 시선을 잡아끈다.
꿀꺽, 막을 새도 없이 목울대가 출렁였다. 침대 위에 누워 살짝 흐트러진 그녀의 모습은 남자의 원초적인 욕구를 건드리기에 충분했다.
후우,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이 잇새를 비집고 나오자 키언은 인상을 찌푸렸다. 자각하지 못했던 한숨 소리를 또렷이 듣고 말았으니까.
“정말 버릇인가 보네요.”
샤로니아가 둥근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게.”
그런 버릇이 있다는 걸 나도 오늘 알았지 뭐야.
키언은 속마음을 숨긴 채 그저 짤막하게 답했다. 아무래도 이 버릇은 그녀에게만 한정으로 나타나는 게 틀림없었으니까.
젠장, 오늘 밤도 잠자긴 글렀군. 키언은 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리며 괜히 이불을 끌어다가 그녀를 푹 덮어 주었다.
“폐하?”
“새벽엔 날씨가 꽤 쌀쌀해지니 이불을 잘 덮고 자라고.”
“아, 감사해요.”
어른거리는 그녀의 실루엣을 아예 이불 속에 묻어버리려는 속셈인지도 모르고 샤로니아가 감사 인사를 했다.
얼떨결에 고개를 까닥거리며 인사를 받은 키언은 저절로 솟아나는 쓴웃음에 입꼬리를 바르르 떨었다.
양심에 찔리지만 어쩔 수 있나. 이게 최선인 것을.
* * *
다음 날도 역시 샤로니아는 단잠을 자고 개운한 몸으로 일어났다. 잠에서 깨 보니 전날과 마찬가지로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자, 그럼 오늘은 대신전으로 가 볼까나.”
기지개를 쭉 켜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샤로니아가 황제의 침실을 나섰다.
엘런의 도움을 받아 단장을 마친 샤로니아는 대신전을 향했다. 기한이 당겨진 퍼레이드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신전 이곳저곳은 분주했다.
샤로니아가 개방형 마차를 장식할 꽃과 실크 리본 따위를 들고 씨름하는 신녀들을 지나쳤을 때였다. 성녀가 나타났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 신녀들이 깜짝 놀라며 엉거주춤 일어서 고개를 숙였다.
“모두들 고생이 많네.”
그녀가 대놓고 성녀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내자 수런거리는 소리가 심해졌다.
저주받은 외모의 별 볼 일 없던 신녀가 성녀로 선택된 것도 놀라운데 황제의 총애를 독차지하다니. 샤로니아는 이미 신전 내에서 여러모로 껄끄러운 존재가 되어 있었다.
‘언제부터 성녀였다고.’
‘성녀면 성녀지, 자기가 뭐라고.’
이죽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쟁쟁하게 들리는 것 같았지만 샤로니아는 내색하지 않은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준비는 잘 되고 있는가?”
샤로니아가 건넨 말에 주위가 일순 조용해졌다. 나서서 상황 보고를 할 만한 인물이 없었던 터라 샤로니아의 시선을 받은 신녀 하나가 식은땀을 흘리며 쩔쩔맸다.
그때, 소식을 들은 신녀장 리비어가 반대쪽에서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뒤쪽에 자신의 목욕 시중을 들었던 신녀들이 줄지어 따라 들어오는 것을 보고 샤로니아는 입매를 살짝 비틀어 웃었다.
“오셨, 습니까?”
말을 높이려니 꽤나 거북했던지 리비어가 멈칫거리며 인사를 했다.
“퍼레이드 준비가 잘 되고 있는지 궁금해서 와 봤네.”
샤로니아가 리비어의 뒤쪽에 서 있는 신녀들을 하나씩 바라보며 말하자 눈이 마주친 신녀들이 움찔거리며 어깨를 떨었다.
“그럼요. 보다시피 차질 없이 준비가 잘 되고 있습니다.”
리비어가 보란 듯이 과장되게 손짓을 하며 준비가 한창인 신전 내부를 가리켰다.
“그렇군. 수고가 많아.”
샤로니아가 신전 내부를 쭉 둘러보며 말했다. 퍼레이드 준비는 ‘신전의 일’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생각 없이 맡아 진행하던 리비어가 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샤로니아의 입에서 나온 칭찬은 마치 자신이 그녀를 위해 일하는 것처럼 들렸으니까.
“수고랄 것은, 없지요.”
리비어는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평정심을 찾고자 노력했다. 자신이 그녀를 위해서 일하고 있다는 생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없나?”
샤로니아의 질문에 가까스로 호흡을 고른 리비어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퍼레이드 때 입을 옷이 준비되어 있으니 가봉만 하시면 됩니다.”
하마터면 ‘성녀님께서는’이라고 말할 뻔한 리비어가 간신히 호칭을 생략하며 더듬더듬 대답했다.
“준비성이 참 좋네. 그럼, 가 볼까?”
샤로니아가 걸음을 내딛자 둘러섰던 신녀들이 썰물처럼 반으로 쫙 갈라지며 길을 내주었다. 안내해야 하는 입장에 뒤를 따를 수도 없는 노릇이라, 리비어는 입술을 한 차례 깨문 뒤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뛰다시피 하여 샤로니아의 앞에 섰다.
“가, 시죠.”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이렇게 말을 높여야 할 존재가 생길 줄은 몰랐는데. 리비어는 생각만 해도 화가 치밀어 주먹을 꽉 그러쥔 채 앞장서서 걸었다.
“이곳입니다. 준비는 되었느냐?”
리비어가 방에 들어서기 무섭게 준비 중이던 신녀들을 다그쳤다. 미리 전갈을 받은 신녀들은 마련한 의상을 걸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입어 보시겠습니까?”
신녀들이 예를 갖춰 묻는 말에 샤로니아는 미동 없이 의상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명색이 20년 만에 선택된 성녀이다. 성녀의 탄생을 알리는 퍼레이드는 신전의 최고 행사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아주 중요한 일이었고.
그런데 마련된 의상은 특별해 보이기는커녕 아주 진부하고 고루한 데다 천의 재질도 썩 좋은 것이 아니었다.
샤로니아가 대답은 하지 않고 의상만 뚫어져라 바라보자 시중을 들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신녀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왜 그러십니까?”
리비어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물었다.
사실 이 모든 것은 리비어의 철저한 계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저주받은 신녀가 성녀가 되어 화려한 의상을 걸치고 주목받는 꼴은 도저히 볼 수 없었다. 아니, 보기 싫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래서 준비한 것은 아주 평범한 의상이었다. 신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신녀복보다 조금 더 고급스러운 것으로 말이다.
‘흥, 마음에 안 들어? 그렇다고 네까짓 게 뭘 어쩔 건데?’
리비어는 경멸이 담긴 눈동자를 내리깔며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그녀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의상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샤로니아 따위가 뭘 어찌할 수 있겠느냐고.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 그렇지 않고서야 그대의 옷장에나 걸려 있을 법한 옷이 여기 와 있을 리가 없지 않나?”
그 말을 듣는 순간, 리비어는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그럴 리가요. 제 옷장에는 이런 옷이 없…….”
진부한 변명을 늘어놓으려던 리비어는 서늘한 샤로니아의 시선을 느끼고는 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젠장! 이게 아닌데! 리비어는 뱀처럼 번들거리는 눈동자를 내리깔며 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렸다.
“신전의 수준이 원래 이 정도였던 건가, 아니면 그대의 수준이 이 정도인 건가?”
고저 없는 샤로니아의 목소리에 잔뜩 긴장한 주변의 신녀들이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마, 마음에 들지 않으시다니 다른 옷으로 준비를……!”
“내 옷은 내가 알아서 준비하겠네.”
불쑥 내뱉는 샤로니아의 말에 리비어는 제 귀를 의심하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직접, 준비하겠다고요?”
평정심이 산산조각 나기 일보 직전이었기 때문에 되묻는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졌다.
“그래, 내가 직접 준비하겠네. 그러면 안 될 이유라도 있나?”
리비어는 입술을 짓씹으며 잠시 숨을 골랐다. 대놓고 자신을 엿 먹이려는 심산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나설 이유가 없을 텐데.
‘해 보자는 건가?’
리비어는 독기 어린 시선을 차마 갈무리하지 못한 채 갈등했다. 그러다 곧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어차피 제대로 준비한다고 해도 본전. 아니면 마음껏 비웃어 주면 그만이었다.
“안 될 이유가 있을 리가요. 그러면 원하시는 대로 하시지요.”
리비어는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그린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디 얼마나 제대로 된 옷을 준비하는지 보겠어.
“그러지. 그대는 일정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다른 것들을 잘 마무리해 주길 바라네.”
샤로니아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빙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