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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요망한 구원자 (10)화 (10/123)

10화

성녀로 선택된 이후에도 경황이 없어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는데 지금 여기에서 허기를 느끼다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녀의 시선이 갓 구운 크루아상으로 향했다.

‘뭐, 조금은 괜찮겠지.’

와삭, 크루아상이 씹히며 버터의 풍미가 입 안을 가득 메웠다.

‘음! 맛있어!’

샤로니아의 눈이 저절로 커졌다.

그녀가 의외로 자신의 입맛에 맞는 빵들을 종류별로 조금씩 맛보는 동안 키언이 목욕을 마치고 나왔다.

실크 가운만 걸친 채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아 낸 키언은 기민하게 탁자 위를 살폈다. 그의 기준에는 턱없이 부족했지만 그래도 빵이 조금 줄어들어 있었다.

“제국에서 가장 실력 있는 파티셰가 구운 빵인데 나름 괜찮지 않나?”

“맛있었어요.”

샤로니아가 마치 책을 읽듯이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들으며 키언은 실소했다. 쯧, 표현력하고는.

성큼성큼 다가간 그가 그녀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녀의 눈에 의뭉스러운 빛이 떠오르자 그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아무래도 그녀는 표현하는 법이 서툰 것이 틀림없었다.

“맛있게 먹었다니 다행이군.”

그가 손끝으로 샤로니아의 입술을 슬쩍 훑었다. 그녀의 입술에 붙어있던 부스러기를 떼어 낼 작정이었는데 어쩐지 분위기가 야릇해졌다.

덜 말린 머리카락 끝에 매달린 물방울이 똑 떨어지며 벌어진 가운 사이로 흘러들어 갔다. 샤로니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 물방울을 따라 키언의 가슴팍을 향했다.

정말 신이 존재했더라면 이렇게 불공평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섬세하게 빚어진 이목구비와 잘 짜인 근육은 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뱉어 내게 만들었다.

샤로니아가 계속해서 제 가슴팍을 뚫어져라 바라보자 키언의 눈썹이 요동쳤다.

아직까지 그녀의 입술이 자신의 손끝에 닿아 있는 상황. 괜히 손을 댔나, 하는 후회가 몰려왔다. 시선을 돌리려 노력해 보아도 달싹거리는 그녀의 입술에서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으니까.

“상처가, 있으시네요.”

샤로니아가 가운 안으로 손을 뻗어 그의 상처 부위를 한 차례 어루만졌다. 그는 찬물을 맞은 사람처럼 정신이 번쩍 들어 그녀의 손목을 탁, 낚아챘다.

“아……. 죄송해요.”

순식간에 날 선 기운을 드러내는 키언을 보고 샤로니아는 의뭉스러운 속내를 감춘 채 사과했다.

제기랄, 키언은 욕설을 중얼거리며 꽉 움켜쥐었던 그녀의 손목을 놔주었다. 저도 모르게 과민한 반응을 보이고 말았다. 도대체 언제쯤 이 상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지…….

“짐을 아르다시스로 만들어 준 영광의 상처야.”

그의 입매가 비뚜름하게 뒤틀리는 것을 본 샤로니아의 눈빛이 짙어졌다.

소문은 들어 익히 알고 있었다. 사생아였던 그가 아르다시스 공작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

‘배다른 형제들을 다 죽였다 했던가?’

샤로니아가 생각에 잠긴 것을 본 키언이 퍽 사나워진 눈빛으로 눈을 마주쳐왔다.

“왜? 너도 뒤에서 떠들어 대는 자들처럼 잔혹한 이야기가 궁금한가?”

“잔혹한 이야기가 맞긴 한가요?”

되돌아온 그녀의 질문에 키언은 맥이 탁 풀렸다. 이제껏 뒤에서 쉬쉬거리며 숙덕거릴 줄은 알았지, 그의 앞에서 대놓고 그런 질문을 한 것은 그녀가 유일했으니까.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서로의 얼굴을 응시하며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진짜 잔혹한 이야기는 지금도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었다. 샤로니아는 신전에서 수많은 목숨이 꺼져 가는 것을 보았고 살기 위해 얼마나 무참히 양심을 저버리는지 똑똑히 보아왔다.

그래서 그런지 키언은 나쁜 사람 같지가 않았다. 그냥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진짜 나쁜 사람이라면 이토록 상처받은 표정을 지을 리가 없을 테니까.

텅 빈 키언의 눈동자에 짙은 분노와 회한이 썰물처럼 지나갔다.

사람을 베고 베도 끝이 없는 전장, 그곳으로 밀어 넣은 것이 소위 말하는 ‘가족’이었다. 아주 잠깐이나마 그들을 가족으로 생각했었다는 걸 떠올리면 지금도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다.

“아니, 당연한 이야기일 뿐이야.”

그는 과거의 잔상을 몰아내듯 담백하게 답했다.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은 언제나 당연한 이치이다. 그래, 잔혹한 이야기가 아니라 당연한 이야기일 뿐이다.

키언은 날카로워진 시선을 갈무리하며 그녀의 얼굴을 꼼꼼히 훑었다. 참으로 신기한 여자. 황제로 즉위하고 2년간 그 누구에게도 틈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는 제 평정심을 뒤흔들었다.

마른세수를 한 그가 아직 물기가 남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그러다가 감기에 걸리시겠어요.”

샤로니아가 키언을 끌어다가 벽난로 앞의 의자에 앉혔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가느다란 그녀의 팔에 거대한 제 몸뚱어리가 속절없이 끌려가는 것을 보면 말이다.

샤로니아가 능숙하게 수건으로 그의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아 냈다.

“이런 일은 하지 않아도 돼.”

키언의 미간에 금이 간 것을 보고 샤로니아가 피식 웃었다.

“맛있는 빵에 대한 답례라고 생각하세요. 정작 제가 해야 할 일은 할 수 없으니까요.”

그 할 일이 ‘제사’, 즉 남녀 간의 은밀한 일을 지칭하는 것임을 깨달은 키언이 헛숨을 내쉬었다.

“이봐, 자꾸 그러면 후회하게 되는 수가 있어.”

“후회요?”

키언은 그녀의 말간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아주 불순해 보여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래, 후회하게 될 거야. 미리 알려 주는 거니까 마음에 새기도록 해.”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샤로니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언젠가는 겪어야 할 일 아닌가요?”

그녀의 표정은 지나치게 담담해서 그녀가 순진한 것인지 아니면 모든 것을 초월한 것인지 헷갈렸다.

그래도 그렇지. 이성과 상식의 범위 안에 있는 자신을 몰아세우는 태도는 좋지 않았다.

“그대는 좀 더 자신을 소중히 여길 필요가 있어.”

가만히 그의 말을 곱씹어 생각하던 샤로니아가 불쑥 대답했다.

“노력해 볼게요.”

신전에서 물건 취급을 당하던 신녀가 자신을 단박에 소중히 여길 수 있을 것 같진 않았지만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왠지 노력해야 할 것만 같았다.

“하핫, 그래, 노력. 그거참 좋은 방법이네.”

불현듯 그가 웃음을 터트리자 샤로니아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내 말 어디가 웃긴 걸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웃음 포인트가 전혀 없는데.

한바탕 웃고 난 키언이 손끝으로 그녀의 미간을 살살 문지르며 말했다.

“짐도 노력하지.”

이성을 잃고 날뛰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쳐놓은 경계선을 넘어가지 않도록.

하지만 키언이 뒷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기에 알아듣지 못한 샤로니아의 미간에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그걸 본 키언이 쿡쿡거리며 웃었다.

“우리는 꽤 좋은 동맹 관계가 될 수 있을 거 같아.”

키언이 웃을수록 기분이 나빠진 샤로니아가 불퉁하게 대꾸했다.

“글쎄요?”

혼자서 자꾸 웃으면 곧 관계가 깨질 것 같은데요.

그녀의 표정에서 드러난 생각을 읽은 키언은 더 이상 웃지 않으려고 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그녀의 못마땅한 미소를 보고 귀엽다고 생각하는 게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은 고삐 풀린 제 생각을 제어할 수 없었다.

타닥타닥, 벽난로 안에 장작이 타오르며 황금색 불빛이 그녀의 얼굴 위로 어른거렸다. 어두운 흑발과 심연을 연상시키는 푸른 눈 위로 마치 붉은 노을이 내려앉은 것 같다.

아주 오랜만에 따뜻하다는 생각이 드는 밤이었다.

‘좀 곤란한데.’

그 누구에게도 곁을 내주지 않고 삭막하고 건조한 생활을 하면서도 전혀 아쉬움을 느끼지 않았었다. 그래서 불현듯 느껴진 따뜻함은 굉장히 생소했고, 또 그만큼 놓치기 싫었다.

‘아무렴 어때…….’

뭐, 어쨌든 이 온기가 사라지지 않도록 붙잡아 두면 될 일이 아닌가.

“인제 그만 자러 갈까?”

낮은 저음의 목소리가 지독하리만치 매혹적인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키언이 샤로니아를 바라보며 매끄럽게 웃었다.

두 번째로 함께 누운 침대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그리 넓다는 생각은 들진 않았다. 그녀의 존재를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다는 방증 같아서 키언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이만 자지.”

등불을 훅 불어 끈 키언이 어색한 동작으로 침대에 몸을 뉘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낮게 가라앉은 그녀의 음성이 아까 느꼈던 따뜻한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어두움이 몰고 온 묘한 분위기에 젖어 생각에 빠져들었다. 절대로 그녀를 취할 일은 없을 거라는 말은 왜 한 걸까. 우습게도 그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어제도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해 몹시 피곤한 상태였지만 어쩐지 정신은 더 또렷해졌다.

‘미치겠군.’

이제껏 살면서 후회로 밤을 지새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건만. 아무래도 오늘이 그날인가 보다.

“어디 아프신 건 아니죠?”

서늘한 손이 이마 위에 내려앉자 키언이 놀라 움찔거렸다.

“열은 없으신데?”

샤로니아가 키언의 이마에 올린 손을 떼어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분 좋던 서늘한 감촉이 떠나가자 키언은 하마터면 그녀의 손목을 낚아챌 뻔했다.

얼마 남지 않은 인내심을 닥닥 긁어모아 간신히 그런 상황을 모면한 그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짐이, 아픈 것 같나?”

“아, 자꾸만 한숨 소리가 들려와서요.”

샤로니아의 대답을 들은 키언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한숨을 내쉬었다고? 내가?

특별히 그랬단 생각이 들지 않는 걸 봐서는 무의식중에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는 것인데. 그게 사실이라면 큰일이다. 그 말인즉슨 점점 조절 불가 상태로 치닫고 있다는 뜻이 되니까.

“아아, 신경 쓰지 마. 버릇이야.”

대충 답한 키언은 입술을 한차례 깨물었다. 할 말이 그거밖엔 없었냐? 바보같이.

“그러시군요.”

자조하는 키언과는 달리 샤로니아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덤덤해서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한숨을 쉬면 축복이 멀리 날아가 버린대요.”

하지만 이어진 샤로니아의 말이 자신을 염려해 주는 것이어서 키언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떠올랐다. 자신이 내쉰 한숨은 그녀가 걱정할 만한 종류가 전혀 아니었으니까.

“의외네. 신은 믿지 않는다더니 그런 말은 믿나 보지?”

“어릴 때, 어머니께서 자주 하던 말씀이었어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어머니’라는 단어에 키언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어머니가 있었나? 신전에 흘러 들어온 이들은 대부분 부모가 없는 이들로 알고 있는데.”

“맞아요. 지금은 계시지 않죠. 살아생전에 자주 하시던 말씀이었으니까.”

제기랄! 키언은 또다시 욕설을 중얼거리며 마른세수를 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은 남을 배려하며 대화하는 기술이 부족했다.

어쩌면 황제에게는 그것이 당연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순간 자신에게 배려심이라는 것이 눈곱만큼이라도 있었으면 하고 바랐다.

“괜찮아요. 지금은 괜찮아졌어요.”

샤로니아가 어둠 속에서 쿡쿡거리며 웃었다.

지나치게 말끔하고 칼같이 날이 선 것 같은 남자는 의외의 면이 있었다. 자신의 말이 끝나자마자 푹푹 내쉬던 한숨이 깊은 들숨으로 바뀐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귀엽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데…….’

샤로니아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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