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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요망한 구원자 (9)화 (9/123)

9화

“카티르, 신녀장 리비어입니다.”

리비어가 조심스럽게 마구스의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오게.”

특유의 무게감 있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리비어는 잠깐 심호흡을 한 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미 한밤중인 데다 오늘은 늦은 오후까지 비가 내렸던 터라 다른 날에 비해 그의 방은 더욱 어두침침했다.

노란 등불이 은은하게 빛을 발하는 가운데 침대에 등을 기대고 앉아 서류를 들여다보던 마구스가 방에 들어서는 리비어를 보고 협탁에 서류를 내려놓았다.

“왜 그러지?”

평상시와는 달리 리비어가 곧장 침대로 올라오지 않자 마구스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저, 그게……. 황제 폐하께서 오늘 밤도 성녀를 불러들였다고 합니다.”

“그래? 그것참 잘되었군.”

마치 남의 일처럼 웃는 마구스를 보고 리비어가 못마땅한 얼굴로 인상을 찌푸렸다.

“카티르께서는 지금 누구 편을 드시는 겁니……!”

“멍청하게 굴지 마라, 리비어.”

낮아진 마구스의 음성에 리비어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조곤조곤한 목소리와는 달리 그의 눈빛은 당장이라도 그녀의 목을 물어뜯을 것처럼 사나웠다.

“하, 하지만 카티르…….”

리비어가 차마 뒷말을 더 내뱉지 못하고 눈을 굴렸다. 어쨌든 그의 심기를 거슬러 좋을 건 없었다.

“성녀는 제국민들에게 상징적인 존재야. 떨어진 신전에 대한 평판을 높여 줄 좋은 도구가 나타났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나?”

마구스의 말에 리비어는 대꾸하지 못하고 입술을 짓씹었다. 신녀들이 보는 앞에서 샤로니아에게 창피를 당한 뒤로 리비어는 어떻게 하면 그녀를 끌어내릴 수 있을까만 고민하는 중이었다.

오늘 밤 어떻게든 마구스를 구워삶아 성녀를 타도할 방법을 찾으려 했건만. 날 선 기운을 뿜어내는 마구스에게 한 마디를 건네는 것도 무척 조심스러웠다.

그의 눈 밖에 났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신전에서 사라진 이들을 떠올린 리비어는 끓어오르는 속내를 애써 숨겼다.

“카티르께선 황제 폐하가 정말로 성녀에게 관심이 있다고 여기십니까?”

리비어의 물음에 마구스는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웃었다.

“관심이 있든 없든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같이 사라질 운명인데.”

신의 대리자, 신 중의 신이라 일컫는 아즈다를 섬기는 대사제장의 얼굴엔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악독함이 짙게 배어 있었다.

“아, 그렇군요.”

그제야 리비어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결국 마지막에 웃는 자가 진정한 승리자가 되는 법이지. 리비어는 샤로니아를 제 발 앞에 무릎 꿇릴 생각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내 정신 좀 봐. 카티르를 이렇게 오래 기다리시게 하다니.”

리비어가 살짝 과장된 표정을 지으며 빠르게 침대로 다가갔다. 걷는 걸음마다 그녀가 입고 있던 얇디얇은 옷감들이 하나씩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카티르, 제가 기분 좋게 해 드릴게요.”

마구스의 귓가에 속삭이는 리비어의 얼굴이 노란 등불에 물들어 요사스럽게 보였다.

* * *

“폐하?”

“그래. 말하게, 테오르.”

미간에 잔뜩 주름을 잡은 채 저를 바라보고 있는 테오르를 보고 키언이 하던 말을 계속해 보라고 손짓했다.

“정신이 사나워서 오늘은 도저히 못 하겠습니다.”

테오르가 서류철을 탁, 소리가 나게 덮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째서?”

키언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테오르는 저도 모르게 울컥했다.

“폐하께서! 그렇게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시는데 어떻게 업무를 볼 수 있겠습니까?”

목소리가 높아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기 때문에 그의 목소리가 살짝 갈라지게 흘러나왔다.

“흠, 그런가?”

어디론가 송두리째 생각을 빼앗겨 버린 듯한 키언의 모습에 테오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얼마나 남은 것입니까?”

“뭐가 말인가? 아아, 일이야 한정 없이 남았겠……!”

“아니요, 성녀님 오실 시간 말입니다.”

예리한 테오르의 질문에 키언이 왔다 갔다 하던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짐이 성녀를 기다리고 있다고?”

키언이 턱을 매만지며 오히려 질문하자 테오르는 헛숨을 내뱉으며 눈을 부릅떴다.

“그걸 모르셨다고요?”

“…….”

기다리고 있다는 자각도 없이 저런 행동을 하고 있다면 큰일이다. 대답을 못 하시는 걸 보니 정말 자각을 못 하셨나 본데.

“저는 일단 물러가겠습니다. 좋은 밤을 보내시고 다시, 업무에 집중할 수 있길 고대하겠습니다.”

꽤 충격을 받았는지, 아니면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건지 키언이 굳어 버린 것을 보고 테오르는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항상 예민하고 날이 서 있던 황제가 저런 모습을 보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테오르는 키언이 자신을 보든 안 보든 상관없이 예를 갖추어 인사한 뒤 방에서 나왔다.

‘내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고?’

키언은 테오르의 말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샤로니아가 오늘 밤 침실로 자신을 불러달라고 말한 뒤로 이상하게 하루가 더디게 흐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걸 기다린 거라고 단정 짓는 건 좀 아니지 않나?

달칵, 문이 여닫히는 소리에 키언이 재빨리 말했다.

“이봐, 테오르. 짐은 기다린 게 아니……!”

키언이 말을 하다 말고 입을 꾹 닫았다. 그가 돌아본 곳에는 충직한 보좌관은 온데간데없고 이전처럼 가슴골이 보일 정도로 앞이 깊게 파인 드레스를 입은 샤로니아가 서 있었으니까.

“누굴 기다리세요?”

샤로니아가 천진하게 되묻는 말에 키언은 하마터면 혀를 씹을 뻔했다.

“아니, 아무도.”

고개를 살짝 치켜들고 뻔뻔하게 답한 키언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그녀를 맞았다. 아마 그 자리에 테오르가 있었더라면 물고기처럼 입을 뻐끔거리며 뒷목을 잡았을 것이다.

“다행이네요. 저 말고 다른 선약이 있으신 게 아니라서.”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것인지, 모르는 척을 해 주는 것인지 눈매가 접히도록 웃으며 다가오는 그녀를 보니 키언은 마음이 복잡해졌다. 더군다나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옷감이 사그락사그락 스치는 소리가 묘하게 귓가에 착 감겨든다.

“다른 건 몰라도 난 내 입으로 한 약속은 철저히 지키는 편이라.”

키언이 어깨를 으쓱하는 것을 바라본 샤로니아는 픽 웃었다. 처음에는 까칠하고 재미없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그를 만날수록 생각이 바뀌는 중이었다.

‘잘생긴 목석이라고?’

황궁에서 쉬쉬하며 그를 부르는 별명을 떠올린 샤로니아는 다시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잘생긴 건 확실하지만…….’

결이 좋아 보이는 은빛 머리칼은 손을 뻗어 만져 보고픈 충동을 일으켰다.

‘목석은 아닌 것 같은데?’

샤로니아는 관찰하듯 키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표정이 꽤 다채로웠기에 키언은 저도 모르게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왜 그러지?”

키언의 미간에 골이 생기는 것을 바라본 샤로니아는 문득 생각했다.

‘인상을 써도 잘생겼네?’

그러는 사이 둘의 간격은 가까워졌다.

“아, 오늘 밤은 어쩌실 건가 해서요.”

키언은 그녀의 말이 제대로 이해되지 않았다. 오늘 밤 뭘 어쩐다고?

키언의 미간의 골이 더욱 깊어지자 샤로니아가 설명을 덧붙였다.

“어제처럼 그냥 잠만 잘 건지, 아니면 저를 취하실 것인지를 여쭙는 거였어요.”

하? 정말 겁도 없이!

키언은 들끓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녀의 손목을 잡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아무리 남자를 몰라서 하는 말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도발하면 안 되는 거다. 왜 안 되는지를 친절하게 가르쳐 주고 싶어지니까.

“그런 건 함부로 묻는 게 아냐.”

짓씹듯 낮게 으르렁거리는 음성에 겁을 집어먹기는커녕 샤로니아는 말간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정말 아니네.”

“뭐가 아니지?”

키언이 서늘하게 내뱉는 말에 샤로니아는 잠시 머릿속으로 할 말을 골랐다. 아무리 그녀가 거짓말을 못 한다고는 하나 그래도 황제의 앞에서 그가 목석이 아닌 것을 확인했노라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무례하게 느끼셨다면 용서하세요. 그리고 제가 신전에서 교육받아왔다는 것 또한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조곤조곤 내뱉는 그녀의 말에 키언은 잠시 허탈해졌다. 도대체 신전에서는 뭘 배우면 그녀처럼 이토록 초연해지는 걸까.

“좋아, 샤로니아. 하지만 남자란 족속은 그렇게 도발하면 안 되는 거야.”

“어째서요?”

깊이를 알 수 없는 푸른 눈이 말끄러미 저를 올려다보자 키언은 움찔했다. 그녀가 자신의 말에 반문할 줄은 몰랐으니까.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키언은 고개를 삐딱하게 꺾고 그녀를 관찰하듯 찬찬히 내려다보았다. 아직까지 서로 몸을 붙이고 있었던 까닭에 지나치게 얼굴이 가까웠다.

‘설마, 정말로 밤을 보내길 원하는 건가?’

그녀의 태도를 그렇게밖에 해석할 길이 없었던 키언은 가장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욕망이 꿈틀거림을 느끼곤 미간을 찌푸렸다.

한 발만 헛디디면 추락할 낭떠러지를 아슬아슬하게 걷는 것처럼 그녀라는 존재가 그의 잠재된 욕망을 자꾸만 건드린다. 복잡한 심경으로 그녀를 응시하던 키언은 지나치게 부드러운 그녀의 몸을 의식하곤 퍼뜩 뒤로 물러났다.

“일단 자리를 옮기도록 하지.”

그가 집무실에서 침실로 연결된 문을 벌컥 열며 황급히 사라졌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본 샤로니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황제라는 호칭에 어울리지 않게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 주는 그가 싫지 않았다.

그녀가 보아온 지배 계층은 언제나 제멋대로에 강압적이었다. 가장 기본적인 양심조차 없는 벌레만도 못한 모습을 하도 봐 와서 그런지 몰라도 키언이 화를 내도 무섭지 않았다. 그가 그러는 이유가 어쨌든 저를 배려해서라는 걸 알았으니까.

설핏 웃은 샤로니아가 키언이 사라진 문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겨우 문 하나를 통과했을 뿐인데 집무실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침실이 나타났다. 어제는 침실로 곧장 들어와서 그 차이를 몰랐었는데, 집무실을 통해 침실로 들어오고 보니 그 차이가 더욱 명확하게 보였다.

샤로니아가 마치 처음 와 본 사람처럼 침실 풍경을 눈에 담는 동안 성큼성큼 걸어간 키언이 탁자 앞에 섰다.

“저녁은 먹었나?”

그가 특유의 무심한 말투로 불쑥 물으며 정복의 단추를 툭툭 풀었다.

“네, 먹었어요.”

샤로니아의 목소리가 별로 또렷하지 않았기 때문에 키언은 단박에 그녀가 저녁 식사를 거의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내가 씻고 올 동안 먹도록 해.”

그가 탁자 위에 놓인 빵과 디저트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언제 이걸 다……. 너무 많은데요?”

“짐은 다 먹으라고 한 적은 없는데?”

샤로니아는 키언이 시종들의 도움 없이 셔츠 단추를 푸는 것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아, 신경 쓰지 마. 나는 목욕할 때 거의 혼자 하는 편이니까.”

그가 어서 먹으라고 손짓을 한 뒤 욕실로 이어지는 통로로 들어서는 것을 샤로니아는 잠시 멍하니 응시했다.

‘황제씩이나 되면서 시중드는 사람 없이 혼자 목욕을 한다고?’

그런 생각에 빠져 있는데 배 속에서 꼬르륵, 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 말도 안 돼. 샤로니아는 제 배 속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며 실소했다. 그녀는 신전에 있으며 음식을 즐겨본 적이 없었다. 음식은 그저 살기 위한 방편에 불과했으니까.

‘이러면 나 때문에 일부러 준비한 것 같잖아.’

탁자 위에 즐비한 디저트를 바라보는 샤로니아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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