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진짜 미치겠군. 키언이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등불에 반사된 은빛 머리카락이 반짝거리며 사르륵 내려오는 것을 샤로니아의 시선이 뒤좇았다.
“예뻐요, 정말.”
그녀가 홀린 듯의 그의 머리카락 쪽으로 손을 뻗다가 허공에서 멈추었다.
“죄송해요. 너무 부드러워 보여서 그만.”
“그다지 부드럽진 않아.”
그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답하며 시선을 돌렸다.
잠깐이었지만 이성이 끊겼던 것이 꽤 충격이었는지, 키언은 그녀와 더 이상 접촉하는 걸 피해야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폐하는 잘생기셔서 좋으시겠어요.”
샤로니아가 한 말의 뜻을 파악하려 키언이 고개를 획 돌려서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거짓을 말하고 있지는 않은 듯 그녀의 눈은 곱게 휘어져 있었다.
‘설마 유혹하는 건가?’
진즉에 요망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렇게만 평하기엔 뭔가가 부족했다.
‘요망하고 요망한.’
그래, 그 정도는 되어야 할 것 같다. 키언이 두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자 샤로니아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나쁜 뜻은 아니에요. 저는 꽤 솔직한 편이라서 거짓말을 잘 못 하거든요. 폐하를 본 사람이라면 객관적으로 잘생겼다고 말하지 않겠어요?”
어떻게 저렇게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낯간지러운 말을 할 수가 있지? 키언은 그저 크흠, 크게 헛기침을 내뱉었다.
키언이 무안한 것과는 별개로 샤로니아는 부러움을 담아 한 말이었다. 그녀가 가진 흑발은 그의 눈부신 은발과는 정반대로 저주받았느니, 특이하다느니 하는 말만 무성했으니까.
하지만 키언은 그 말을 조금 다르게 받아들였다. 본래 칭찬은 상대방에 대한 호감을 일깨워 주기 마련이다.
“객관적으로는 그렇지.”
키언은 뻔뻔한 얼굴로 자신이 잘생겼다는 것을 수긍했다.
겸손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그의 태도에 샤로니아가 쿡,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가 말갛게 웃는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키언이 툭 던지듯 말했다.
“너도, 그래. 객관적으로.”
웃던 샤로니아의 얼굴이 일순 굳었다.
“제가요?”
칭찬을 그대로 돌려주었건만 상처받은 얼굴을 하는 여자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짙어졌다.
도대체 이제껏 무슨 말을 듣고 자랐으면 저런 반응을 보일 수 있을까.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 모아 쥐었다.
“부드럽군.”
결 좋은 머리카락은 좀처럼 놓아주기 싫을 정도로 감촉이 좋았다. 계속해서 키언이 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자 샤로니아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그런 말, 처음 들어요.”
그녀의 푸른 눈을 바라본 키언은 마치 끝도 없이 펼쳐진 망망대해를 바라보는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지독한 고독이나 외로움과도 비슷한 것이었다. 그가 황제라는 자리에서 항상 느껴야 했던 그런 감정들 말이다.
“저주를 믿나?”
그녀의 머리카락을 놓아주며 키언이 물었다. 아마도 꼬리표처럼 그녀를 따라다니는 말을 떠올리고 묻는 듯했다.
“글쎄요. 저는 제 자신만 믿어요.”
샤로니아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성녀치고는 꽤 어울리지 않는 대답이었지만 키언은 수긍하듯 픽, 웃었다. 그 누구도 믿지 않고 자기 자신만 믿는 것은 그도 다르지 않았기에.
“인제 보니 우린 공통점이 꽤 많군.”
“그런가요? 영광이네요.”
둘은 마주 보고 한차례 웃었다.
“피곤하실 텐데 이제 주무셔야죠. 무례한 제 요구를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그녀의 인사에 키언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욕망을 채우기에만 급급했던 저에게 감사 인사라니.
“그런 인사는 앞으로 하지 마.”
“네? 어째서요?”
“아무튼 하지 마.”
키언은 괜히 얼버무렸다. 안 그러면 종전의 행동에 대해 일일이 설명해야만 할 것 같았다. 잠시 이성의 끈을 놓쳤던 정황에 대해서도.
그의 불친절한 언사 때문인지 대화가 끊어졌다. 가만히 있던 키언이 이제 모든 일과가 끝났다는 듯이 등불을 껐다. 까만 어둠 속에서 그녀가 이불 안으로 파고드는 것이 느껴졌다.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어떤 상황에서도 제가 해야 할 말은 꿋꿋이 다 하는 그녀였다.
키언은 뭐라고 대답을 하려다가 결국은 입을 꾹 다물었다. 생각할수록 기가 막혔다. 이 짧은 시간 동안 그녀에게 얼마나 휘둘렸는지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다.
하아, 긴 숨을 내쉬며 그도 자리에 누웠다. 하지만 아무리 잠을 청해 봐도 정신은 더욱 또렷해지기만 할 뿐이다.
‘성녀라……. 이 루하르에 성녀가 나타났다고?’
그는 어둠 속에서 눈을 깜박이다가 그녀가 누워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은 그녀의 모습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때마침 창을 통해 들어온 노란 달빛이 침실을 밝혔다.
‘벌써 잠들었나?’
키언은 고른 숨을 내쉬는 그녀를 보고 헛웃음을 웃었다. 정말 제 약조를 믿나? 아무리 황제라고는 하나 처음 만난 낯선 남자의 침실에서 편안하게 잠이 들다니.
여러모로 복잡한 심경을 안겨 주는 여자를 보며 키언은 어둠 속에서 제 턱을 문질렀다.
새하얀 얼굴 위로 길게 늘어진 속눈썹이 달빛을 받아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꽤 오랫동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던 키언은 곧 묘한 기분을 느끼며 몸을 돌려 천장이 보이게 누웠다.
‘잠자긴 글렀군.’
그의 입가에 괴로운 듯, 즐거운 듯 오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다음 날, 샤로니아가 눈을 떴을 때 침대는 텅 비어 있었다.
“일어나셨어요? 황제 폐하께서 성녀님이 일어나실 때까지 깨우지 말라고 하셔서요.”
언제부터 대기하고 있었는지 엘런이 침대 쪽으로 가까이 다가오며 말했다.
“그래?”
샤로니아는 키언이 머물다 간 자리를 흘끗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나가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잠을 푹 잤다는 것이 너무 놀라웠다.
그녀는 메르헨의 죽음 이후 잠을 설치는 일이 잦았다. 그래서 낯선 침실에서, 그것도 황제의 옆자리에서 깨지 않고 숙면을 취했다는 것이 꽤 충격이었다.
하지만 그런 내색을 하지 않은 채 그녀는 엘런이 건네는 가운을 입었다.
“성녀님이 앞으로 머무실 궁이 준비되었다고 합니다.”
20년 동안 비어 있던 궁을 손보느라 많은 일손이 분주하게 움직여야 했다.
“목욕물을 준비해 놓으라 일러놓았으니 목욕부터 하시고 아침 식사를 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그 말을 하는 엘런의 얼굴이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아마도 샤로니아에게 남아 있던 붉은 자국이 여러모로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 듯했다.
“그렇게 하도록 해. 아, 그리고 어제 내 목욕 시중을 들던 신녀들을 다시 불러 줘.”
예상치 못한 샤로니아의 분부에 엘런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 * *
“그러면 그렇지, 우릴 내치고 그 답답한 신녀를 싸고도는 게 이상하긴 했어.”
“뭘 어떻게 하면 하루 만에 질리게 만들 수 있는 거지?”
다시 불려온 신녀들은 대놓고 서로 속삭였다. 마치 일부러 들으란 듯이 조잘거리는 소리에 엘런의 턱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때, 샤로니아가 욕실로 들어섰다. 전날 시끄러운 소리를 내었다가 쫓겨난 전적이 있던 터라 신녀들은 눈치껏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샤로니아가 옷을 벗자 몸에 난 자국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것을 본 신녀들이 서로 기민하게 눈빛을 주고받았다.
“목욕을 길게 하고 싶지 않으니 서둘러 줘.”
샤로니아의 말에 신녀들이 의미심장하게 대답했다.
“그럼요, 기운이 없을 때 목욕을 길게 하면 좋지 않지요.”
“오늘 하루는 푹 쉬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샤로니아는 그 말을 듣고도 표정 변화가 없었다. 별다른 답변이 없었기 때문에 신녀들은 그녀가 무척 피곤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서둘러 목욕 시중을 들었다.
목욕을 마치고 나오자 샤로니아가 신녀들을 향해 말했다.
“쉬고 싶으니 이만 물러가도록 해.”
“네, 알겠습니다. 성녀님.”
어제와는 달리 신녀들이 고분고분하게 대답했다. 마치 어디론가 달려가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우르르 몰려나가는 무리의 끝에 엘런이 시무룩하게 따라 나가는 것을 발견한 샤로니아가 그녀를 불렀다.
“엘런.”
“아, 네, 성녀님.”
샤로니아가 자신을 부를 줄 몰랐는지 엘런이 당황해하며 멈추어 섰다. 자연스럽게 문이 닫히고 침실 안에는 샤로니아와 엘런만이 남았다.
“내 머리를 예쁘게 빗겨 주지 않을 거야?”
빙긋 웃으며 건네는 샤로니아의 말에 엘런이 멍하게 입을 벌렸다.
“아, 아니요. 네! 비, 빗겨 드려야죠.”
엘런이 횡설수설하며 빠르게 다가왔다. 신녀들의 말대로 샤로니아가 더 이상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 줄 알았다. 이제껏 많은 사람이 그래왔듯이.
“아까 부른 신녀들은 신경 쓰지 마. 이제 더 이상 부를 일은 없을 테니까.”
거울 앞에 앉은 샤로니아가 하는 말을 들은 엘런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어, 어째서요?”
그 이유를 묻는 엘런의 손이 살짝 떨렸다. 존재감이 너무도 미미했던 그녀는 평생 하급 신녀로 살 운명이었다. 제사를 드릴 자격조차 얻지 못해 평생 허드렛일과 잡일만 담당해야 하는 그런 하급 신녀로만 말이다.
그런 제가 성녀를 지척에서 모실 수 있는 전담 신녀가 되었다는 사실에 얼마나 들떴던지. 하지만 아까 비아냥거리던 다른 신녀들의 말을 듣고 나니 비로소 현실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자신이 뭔가 착각을 해도 단단히 한 건 아닐까? 고귀한 성녀님이 나 같은 사람을 곁에 두실 리가 없지. 그렇게 속으로 자조하고 있는데 샤로니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그저 소문을 물어 나를 방편에 불과해. 너와는 전혀 다르지.”
엘런의 눈빛이 급격히 흔들렸다.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수긍하기보다는 ‘왜?’라는 물음이 더 크게 머릿속을 점령해 버린 탓이었다.
거울에 비친 엘런의 표정을 본 샤로니아가 설핏 웃으며 이어 말했다.
“메르헨을 기억해?”
샤로니아는 제 친구가 죽던 날을 똑똑히 기억했다.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던 어느 날, 시신이 부패한다는 이유로 애도할 시간도 주지 않고 하루 만에 화장해 버린 가련한 친구의 마지막을 어찌 기억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날 그녀를 위해 울어 준 것은 엘런밖에 없었어.”
“아…….”
엘런이 잠시 침음을 흘렸다.
온갖 추잡한 일이 벌어지는 신전답게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은 별로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하도 여러 차례 그런 일이 벌어지다 보니 모두들 감정이 죽은 괴물이 되어 버린 것이다.
죽은 자를 위해 애도하며 슬퍼하기는커녕 신전의 치부가 드러날까 두려워하며 어떻게 하면 시신을 빨리 처리할지 고민하는 것이 신전의 현실이었다.
“나는 부패한 신전을 뒤엎으려 해. 물론 위험이 뒤따르겠지. 그래도 괜찮다면 엘런이 나를 좀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엘런이 빨개진 눈을 들어 거울 속의 샤로니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신전이 부패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반기를 들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저 제 몸을 사리는 데 급급했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이기주의와 생명의 존엄을 잊은 지 오래되어 양심은 돌보다 더 딱딱하게 굳었을 뿐이었다.
“제가 과연 도움이 될, 까요?”
조심스럽게 되묻는 엘런의 목소리가 떨렸다.
오랜 시간 동안 사람이 아닌, 물건 취급을 당해왔기에 낮은 자존감은 언제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네가 그러겠다고 마음만 먹는다면 물론 많은 도움이 될 거야.”
진지하게 눈을 마주쳐오는 샤로니아의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 눈빛을 보는 순간, 엘런은 생각했다.
도움이 되든 안 되든 상관없이 당당한 그녀의 모습을 닮고 싶다고.
못 박힌 듯 묶여있는 이 진흙탕에서 이제는 움직이고 싶다고.
비록 그것이 한 걸음밖에 뗄 수 없어 아무런 표시도 나지 않는 작은 변화라 할지라도 좋았다.
앞으로 나아갈 수만 있다면.
“그럴게요. 저는 무조건 성녀님의 편이 되어, 성녀님을 도울게요.”
너무도 결연했던 나머지 엘런이 손에 들고 있던 빗이 부르르 떨렸다.
“고마워, 엘런.”
샤로니아가 싱긋 웃을 때였다. 토독토독, 창문을 두드리는 낯선 소리에 둘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비예요! 비가 내려요!”
엘런이 한달음에 창가로 달려갔다.
금세 굵어진 빗방울이 쏴아아, 소리를 내며 쏟아져 내렸다.
성녀가 탄생하고 첫 제사를 올린 후 내리는 비는 그 의미가 남달랐기에 엘런의 목소리가 한껏 높아져 있었다.
“정말, 비가 오네.”
샤로니아가 창밖을 내다보며 짙어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물의 여신은 신전의 멸망을 간절히 원하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절묘한 타이밍에 비가 내릴 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