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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요망한 구원자 (3)화 (3/123)

3화

“왜 마구스를 없애려고 하는 거지?”

그에게 접근하는 사람은 많았다. 때론 달콤한 감언이설로, 때론 충성을 맹세하며 그의 신뢰를 얻고자 하는 사람들은 주변에 얼마든지 널려 있었다.

그녀는 이제껏 보아왔던 자들과 꽤 달라 보였지만 사람을 믿지 않는 그에겐 검증이 필요했다.

“그 개자식이 내 친구에게 손을 댔어요. 그래서 내 소중한 친구가 자살했죠. 아주 수치스럽게 죽어야 했어요. 더 웃긴 게 뭔 줄 아세요? 신전에서는 지금도 알게 모르게 그런 일이 버젓이 자행되고 있다는 거예요. 그것도 신의 이름으로.”

폭발 직전의 감정을 누르는 눈동자는 푸른빛을 내뿜으며 오히려 차갑게 얼어붙었다. 격양된 호흡을 고르느라 그녀의 가슴이 오르내리는 것을 키언은 잠시 흘끔 바라보았다.

이런 이야기를 하기엔 그녀의 의상이 매우 부적절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겼음을 깨닫고 속으로 조소했다.

“폐하께서 돕지 않으셔도 저는 반드시 복수할 거예요. 제 목숨을 걸고서라도 반드시 말이에요.”

샤로니아가 비장하리만큼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 이렇게까지 속을 내보이지 않으면 황제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한편으론 그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 두려웠지만 목숨을 내던져 복수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망설일 것은 없었다. 자신은 반드시 황제라는 패를 얻어야만 했으니까.

키언은 떨리던 그녀의 손이 주먹 쥐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약한 건지 강한 건지 알 수 없는 여자.

그는 사람을 믿지 않았지만 그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이해타산이 맞는다면 그녀의 요구를 수락해서 신전을 견제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었다.

“무얼 원하지? 짐의 도움을 원하나?”

키언의 눈빛이 긍정으로 바뀐 것을 보고 샤로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폐하의 도움이 필요해요. 그러려면 서로 긴밀한 관계가 되어야 할 거예요. 아, 겉으로 보기에 말이죠.”

“긴밀한 관계라…….”

키언은 그녀의 말뜻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긴밀한 관계’라는 꽤 점잖은 말로 표현했지만, 실상 황제와 성녀의 긴밀한 관계란 정부 수준의 총애를 달라는 말이었다.

과연 그것이 신전을 견제하는 데 얼마나 득이 될까. 이해득실을 따지는 키언의 눈빛이 예리하게 번뜩였다.

어쨌든 신전에 속한 자를 공식적인 제 편으로 둘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았다. 이 기회를 잘 이용한다면 꼴 보기 싫은 신전 놈들을 얼마든지 쥐락펴락할 수 있으리라.

“좋아, 그러지.”

그의 대답에 내심 안도한 샤로니아가 침실을 쓱 둘러보며 말했다.

“계약서를 써 주셨으면 좋겠어요. 뭐든 확실한 게 좋지 않겠어요?”

“원하는 대로.”

살랑거리는 레이스 천과 은은한 촛불이 그녀의 얼굴 위로 야릇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 * *

키언은 사람을 믿지 않았다. 사생아로 자란 그가 아르다시스 공작가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진 이후로 그는 쭉 사람을 믿지 않았다. 아니, 믿지 못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공작가에서 사생아인 자신을 받아들인 이유는 전쟁에 대신 내보낼 희생양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으니까.

목숨을 건 전투에서 살아남길 여러 번, 어느새 위협적인 존재가 되어 버린 사생아를 공작가는 두고 보지 않았다.

어느 전쟁터에서 돌아온 날, 그는 배다른 형제들이 어머니에게 몹쓸 짓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사생아 따위가 뭘 어쩔 건데?’

여느 때처럼 모욕과 조롱이 쏟아졌다.

‘너희가 착각하는 게 있어. 너희가 날 그렇게 대할 수 있었던 건 내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둬서이지, 너희에게 그런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거든.’

그날, 그는 자신의 손으로 형제들을 죽였다. 그리고 무력으로 아르다시스 공작위를 차지했다. 어머니를 지키기 위해선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에 벌인 일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몇 개월 후에 병환으로 허무하게 돌아가셨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그는 마음의 문을 완전히 닫아 버렸다. 사람은 믿을 수 없다. 그저 필요에 따라서 표면적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일 뿐.

그런데 오늘 처음 본 여자가 마음을 어지럽힌다. 털을 잔뜩 세운 고양이처럼 사람을 경계하는 것 같으면서도, 모든 것을 품는 드넓은 바다처럼 대범한 눈빛을 가진 여자.

어느 쪽이 그녀의 본모습일까. 그녀 덕분에 한동안 잊고 지냈던 옛 기억이 떠올라 버렸다.

잠시 상념에 사로잡힌 키언이 미간을 찡그리고 있을 때였다.

“종이와 펜이 어디 있죠?”

침대에서 내려온 그녀가 이쪽저쪽을 기웃거렸다.

“이봐, 그냥 가만히 있지.”

정신 산란하게 하지 말고. 그는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드러나는 실루엣을 보고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눈빛은 대범한 주제에 본인의 처지가 어떤지는 모르는 게 틀림없었다.

야하디야한 옷차림을 한 주제에 평상복을 입은 것처럼 아주 편안하게 침실 안을 활보하는 행태가 그저 기가 막혔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샤로니아 파르비즈예요. 제 이름. ‘이봐’가 아니라.”

그녀가 생긋 웃으며 탁자에 앉았다.

키언은 급격한 피로를 느끼며 종이와 펜을 들고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좋아, 샤로니아. 이 밤에, 내 침실에서, 우리가 이러고 있게 될 줄은 전혀 몰랐지만…….”

다시 생각해도 황당한지 그가 헛숨을 내뱉으며 실소했다.

이게 뭐 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 그의 인생에 이토록 충동적으로 움직인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

후계를 잇지 못하고 선대 황제가 서거하고 나자 황실은 황제와 가장 가까운 혈육 몇을 선택하여 황제 후보로 올렸다.

아르다시스 공작위를 가졌으나 사생아였던 그는 자신이 후보에 있다는 것 자체를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황제로 낙점되고 나서야 모든 전말을 알 수 있었다.

흠이 있는 황제를 세워 그를 쥐락펴락하려는 신전의 음모가 있었다는 것을.

황궁 대부분의 사람이 신전 쪽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던 까닭에 그는 즉위하고 2년 동안 사람을 걸러내는 데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

“뭐라고 적어야 할지 생각이 안 나시면 제가 해도 될까요?”

키언이 잠시 멍하게 생각에 빠져 있자 샤로니아가 펜을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그러든지.”

키언은 그녀가 과연 계약서에 뭐라고 적을 것인지 궁금해하며 펜을 넘겨주었다. 손이 살짝 스치는 감각에 키언의 한쪽 눈썹이 쓱 올라갔다.

그러든지 말든지 샤로니아는 신중하게 글씨를 써넣기 시작했다. 빠르게 손을 놀리는데도 불구하고 글자가 반듯하고 정갈했다.

그의 생각을 읽었는지 샤로니아가 중얼거리듯 대꾸했다.

“성년이 되지 않은 견습생은 대부분의 시간을 경전을 필사하며 보내거든요.”

“이제 막, 성년이 된 건가?”

키언이 의외라는 듯이 물었다.

“네, 성년을 맞은 신녀는 선택의 방에 들어갈 수 있는 권한을 얻거든요. 물론 저는 여신의 선택을 받았으니 굉장히 행운이었죠.”

생각보다 어리군. 키언이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의 장면이 꽤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이제 성년이 되었으리라곤 생각해 보지 못했다.

“그러는 폐하는 몇 살이신데요?”

샤로니아는 다시 한번 키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조각처럼 섬세하게 빚어진 이목구비는 아무리 보아도 자신과 크게 차이가 날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

감히 황제에게 나이를 묻는 당돌함이라니. 키언은 어이가 없었다. 도대체 자신을 뭐로 여기기에.

그가 대답을 하지 않자 샤로니아가 펜을 들고 계약서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서로에게 비밀을 만들지 않을 것…….”

“!”

하아, 이런 요망한 것 같으니라고. 키언은 헛숨을 내뱉으며 눈에 힘을 주었다.

눈매가 날카로워 조금만 힘을 주어도 다른 이들은 벌벌 떠는 시선을 샤로니아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받아 내었다.

오히려 생긋 웃으며 대답을 부추긴다. 그런데 어째서 그게 불쾌하지 않은 걸까. 마치 어려운 숙제를 떠안은 듯한 기분이다.

“스물여섯이다.”

겨우 짜내어 불퉁하게 대꾸했더니 그녀의 눈이 커졌다.

“어머, 그러셨어요? 꽤 동안이시네요?”

동안이라는 말에 키언은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뭐지? 날 농락하는 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나쁘지 않다.

‘완전히 말려들고 있군.’

그는 헛숨을 내뱉으며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그녀가 사람을 흔들어 대는 기술이 수준급인 건지, 아니면 오늘따라 자신이 이상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이 향기 때문인가?’

그녀에게서 풍기는 은은한 꽃향기가 이상하게도 정신을 산란하게 흔들어 댔다. 아니, 어쩌면 꽃향기 탓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눈앞에 어른거리는 새하얀 목덜미와 그 아래쪽으로 자꾸만 시선이 가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속물이 따로 없군.’

그는 자조한 뒤 일부러 계약서에 시선을 고정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항목은 삭제할 거야.”

일부러 더욱 엄한 목소리를 내며 그는 꼼꼼하게 계약서를 확인했다. 불필요한 계약 사항을 핑계로 한바탕 잔소리를 해 댈 생각이었건만. 반듯하고 깔끔하게 적힌 문장들은 의외로 흠을 찾을 수가 없었다.

대사제장의 몰락과 신전의 멸망까지 서로 긴밀한 동맹을 유지한다는 조건을 담은 계약서는 크게 문제 삼을 만한 내용은 보이지 않았다.

“호위를 내어달라?”

“네, 결의한 목적을 이루기 전에 제가 죽으면 곤란하잖아요.”

샤로니아는 마치 남의 일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죽음에 대해 말했다.

“필요한 인력이 있다면 얼마든지 제공하지. 호위든 시녀든 간에.”

키언은 비뚤어진 입매를 애써 바로잡으며 말했다. 죽음에 담담한 그녀의 모습이 왜 이렇게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누가 뭐라든 넌 아르다시스 가문의 사람이야.’

제 어깨가 아플 정도로 꽉 그러쥔 채 단호하게 말하던 어머니의 얼굴이 갑자기 떠올랐다. 그녀의 눈동자에 깃든 결연함이 어머니의 것과 많이 닮아서일까.

아니면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던가. 그는 묘한 기시감을 느끼며 눈을 가늘게 떴다. 불확실한 것에 휘둘리는 것을 질색하는 주제에 스스로 이런 생각을 떠올렸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단, 제 곁에 둘 사람은 제가 고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세요.”

샤로니아가 야무지게 덧붙이는 말을 들은 키언은 피식 웃었다. 막 성년이 된 것치고 그녀는 제 잇속을 챙기는 데 무척 탁월했다.

척박한 루하르의 땅과 아주 잘 어울리는 여자. 그녀의 푸른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키언이 느리게 답했다.

“그러지.”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샤로니아가 그에게 펜을 돌려주며 말했다.

“다 되었으면 여기 서명해 주세요.”

그녀가 가리키는 부분을 가만히 바라보던 키언이 계약서 하단에 무언가를 적어 넣었다.

‘서로의 합의 하에 계약 내용을 수정 또는 추가할 수 있다.’

“이러는 게 나중을 위해선 좋겠지?”

“뭐, 저는 상관없어요.”

샤로니아가 어깨를 으쓱하는 것을 본 키언이 설핏 웃으며 사인을 했다. 그리고 곧바로 펜을 든 샤로니아가 망설임 없이 그 밑에 사인을 했다.

“자, 이로써 계약 관계가 체결되었네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샤로니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굽히며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키언의 미간이 구겨졌다. 제발, 지금 입고 있는 의상에 대한 자각 좀 하지 그래?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겨우 삼킨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딘가에 술이 있을 텐데.’

절로 술 한 잔이 절실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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