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하급 신녀가 안내하는 방으로 들어갔더니 여러 명의 신녀가 목욕 준비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신전에서 여러 명이 사용하던 평범한 욕실이 아닌, 귀한 대리석이 깔린 화려하고 지나치게 넓은 욕실이었지만 샤로니아에게는 별 감흥을 주지 못했다.
‘말이 좋아 황제 알현이지.’
그녀는 감탄하는 대신 코웃음을 쳤다.
일반 신녀들이 귀족들이나 평민들을 대상으로 한 제사에 참여한다면, 성녀는 오로지 황제의 제사에만 참여하는 것이 신전의 규율이었다.
제사를 명목으로 황제의 침실을 차지할 수 있는 존재, 그것이 곧 권력을 쥘 수 있는 또 다른 방편이 되었기에 모두들 성녀의 자리에 목숨을 거는지도 몰랐다.
“피부가 정말 고우세요.”
“성녀님은 견습생 시절부터 범상치 않다고 생각했어요. 이렇게 성녀님으로 선택받을 줄 알아본 거죠.”
입에 발린 소리를 해대는 신녀들을 보고 샤로니아는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그녀가 아부를 더 원한다고 생각했는지 서로 눈치를 주고받은 신녀들이 있는 말, 없는 말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분명히 황제 폐하께서 성녀님을 마음에 들어 하실 거예요.”
“장차 신전에서 제일가는 권력을 가지실 게 분명해요.”
어떻게든 제 눈에 들려고 노력하는 모습은 가상했지만, 그녀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더 들어주기엔 속이 매스꺼웠다.
“그만.”
욕조에 몸을 담근 샤로니아가 가볍게 손짓을 하자 그녀의 주위로 흩어져있던 꽃잎들이 물 위를 이리저리 맴돌다 멈추었다.
신녀들은 샤로니아의 말에 영문도 모른 채 입을 닫고 눈을 굴렸다.
“엘런.”
샤로니아가 그들 중 한 신녀의 이름을 불렀다.
“예, 성녀님.”
엘런이 깜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아까 대신전에서부터 샤로니아를 안내했던 하급 신녀였다.
재잘대며 아부하기 바빴던 다른 신녀들과는 달리 욕실에 들어온 뒤로 그녀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었다.
“혼자서도 충분히 내 목욕 시중을 들 수 있겠지?”
“네…… 네?”
샤로니아의 말뜻을 뒤늦게 깨달은 엘런이 황망한 표정으로 급하게 고개를 들었다.
“다른 사람은 필요 없으니 다 나가도록 해.”
샤로니아가 무심한 얼굴로 손을 흔들자 신녀들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주춤거렸다.
“언제부터 다 가는귀가 먹었지?”
샤로니아의 목소리에 언짢은 기운이 묻어나자 결국 버티지 못한 신녀들이 고개를 숙인 뒤 우르르 욕실을 빠져나갔다.
“이제야 좀 나아졌네.”
샤로니아가 조용해진 욕실을 둘러보며 욕조에 깊숙이 몸을 담갔다.
“어, 어째서 저만…….”
엘런이 손끝을 꼼지락거리자 샤로니아가 픽 웃으며 말했다.
“그냥, 난 시끄러운 건 질색이라.”
엘런은 예전부터 어딜 가나 주목을 받았던 샤로니아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그녀와는 정반대로 언제나 있는 듯 없는 듯 주목받지 못했던 삶을 살았던 자신이 곁에 남게 되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목욕을 마무리하고 밖으로 나온 샤로니아가 황당하다는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하? 정말 이따위 것만 걸쳐야 한다고?”
차라리 아무것도 입지 않는 게 낫겠네. 샤로니아가 제 의상을 보고 이죽거렸다.
속이 훤히 비치는 얇은 튜닉은 누가 보더라도 그 의도가 명백했다.
“제사에 가장 적합한 의상으로 알고 있습니다.”
엘런이 민망한지 뺨을 붉히며 작게 대답했다.
샤로니아가 입은 붉은 속옷이 얇은 튜닉 위로 여과 없이 드러났다. 같은 여자가 보기에도 마른침이 꼴깍 넘어갈 정도이니 남자가 보기엔 훨씬 더 아찔할 것이다.
엘런은 어색하게 웃으며 샤로니아의 머리 모양을 매만졌다. 루하르에서 보기 드문 흑발은 윤기가 흘렀고 실크처럼 부드러워 손가락 사이로 사르륵 빠져나가는 느낌이 참 좋았다.
엘런은 샤로니아의 옆머리를 땋아 뒤로 살짝 묶어 늘어뜨린 뒤 황금으로 만든 장신구를 꽂아 주었다.
그리고 그것과 세트로 만들어진 귀걸이를 그녀의 귀에 달아 주었다. 반달 모양의 황금에 정교하게 문양을 새겨 넣고 비취와 루비로 꽃 장식을 더한 귀걸이는 화려한 빛을 발하며 샤로니아의 흰 피부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어 주었다.
“다 되었습니다.”
샤로니아는 엘런의 말에 허전한 목 언저리를 손으로 매만지며 쓴웃음을 지었다.
깊이 파인 튜닉은 어깨를 훤히 드러내 아무 장식도 걸지 않은 목 부분을 더 돋보이게 했다.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샤로니아가 엘런이 내민 로브에 팔을 끼워 넣었다.
“가자꾸나.”
샤로니아의 얼굴에 잠시 결연한 빛이 스쳤다.
아침과 저녁이 이토록 극명하게 다를 수 있을까. 아침에만 해도 신녀 견습생에 불과했던 자신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저녁엔 성녀가 되어 있었다.
만일 진짜로 여신이 존재한다면 자신에게 원하는 것은 하나일 것이다. 바로 신전의 멸망.
그래서 자신을 선택한 것이라고 샤로니아는 굳게 믿었다.
* * *
“폐하, 신전에서 알려오길 새로운 성녀가 선택되었다고 합니다.”
“성녀가?”
복도를 걸어가던 키언이 보좌관 테오르의 말을 듣고 멈칫했다. 그는 성녀라는 존재를 아예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성녀가 나타난 것이 몇 년 만이지?”
“거의 20년 만입니다.”
키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즉위한 지 이제 고작 2년. 과거 20년 전에 나타났다던 성녀의 존재는 그다지 그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오늘은 이만 쉬고 내일 보지.”
벌써 밤이 깊었다. 하루 동안 여러 가지 골치 아픈 문제들을 해결하느라 분주했던 키언은 관자놀이를 꾹 누른 채 침실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자, 잠시만요. 폐하.”
“왜? 아직 할 말이 남았나?”
여간해서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테오르가 큰소리를 냈다. 키언은 테오르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충직한 보좌관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는 것을 보니 무슨 일이 있긴 있는 모양이었다.
“저기, 그 성녀가 와 있습니다.”
“성녀가 와 있다고? 어디에?”
“폐하의 침실에요.”
마치 죽을죄를 저지른 것처럼 테오르의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졌다. 그는 황제의 잘생긴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 두 눈을 질끈 감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말했다.
“성녀가 선택된 날 밤엔 반드시 제사를 올려야 한다는 규율이 있지 않습니까? 신전에서 막무가내로 진행하는 바람에……. 막지 못해 죄송합니다.”
하아, 키언이 긴 한숨을 내쉬며 마른 얼굴을 쓸어 올렸다. 망할 신전 놈들!
사사건건 황실 문제에 개입해서 황권을 누르려고 하는 신전에 이골이 난 키언은 속으로 욕을 중얼거렸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그만 가 봐. 성녀 외의 신전 놈들은 본궁 근처에 얼씬도 못 하게 하고.”
“예, 폐하.”
테오르는 키언의 눈치를 한 번 본 뒤 고개를 숙이고 빠르게 물러 나왔다. 그는 두 번 말하는 것을 싫어했다.
‘성녀는 무슨. 신전의 하수인이겠지.’
키언은 비릿하게 웃으며 침실에 들어섰다.
평상시 보이지 않던 캐노피가 침대 위로 겹겹이 늘어진 채 바람에 살랑거리고 있었다.
‘하? 진짜 가지가지 하는군.’
그는 실소를 내뱉으며 저벅저벅 걸어 침대의 정면에 섰다. 낯선 실루엣이 캐노피 너머 보였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캐노피 커튼을 휙, 젖혔다.
“늦으셨네요.”
침대 헤드 쪽에 기댄 여자 하나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보시다시피 형편이 이래서 일어서서 예를 갖추지 못함을 용서해주세요.”
그녀가 설핏 웃으며 손가락으로 겨우 자신의 손을 가리켰다. 그녀의 손목은 천장에 고정된 얇은 레이스 줄로 묶인 상태였다. 마치 그에게 바쳐진 제물처럼.
“얼마나 기다렸지?”
“한 2시간 정도?”
여자의 새파란 눈동자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친 키언은 미간에 주름을 잡은 채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녀에게선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와 같은 기운이 느껴졌다. 날 것 그대로의 눈빛을 가감 없이 드러낸 그녀가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 보자 키언의 입가에 비틀린 웃음이 떠올랐다.
“성녀라고 해서 신전 놈들과 똑같은 눈을 가지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군.”
성스러운 사제복을 입은 자의 더러운 탐욕과 욕망에 점철된 눈동자는 보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났다. 겉으로는 선하고 의로운 척하면서 속으로는 온갖 추잡한 짓을 일삼는 이들에게선 시궁창보다 더한 악취가 진동했다.
“폐하께서 싫어하시는 그 ‘신전 놈들’을 저 또한 경멸하거든요.”
샤로니아가 마치 오늘의 날씨를 이야기하듯 여상한 말투로 이야기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키언의 눈에 호기심이 서렸다. 성녀가 신전을 경멸한다니. 참으로 재미있지 않은가.
“제가 성녀가 되려던 목적이 신전의 멸망 때문……. 아, 그런데 일단 이것 좀 풀어 주시면 안 될까요?”
샤로니아가 제 손목을 가리키며 미간을 찌푸리자 자연스럽게 키언의 시선이 그녀의 의상을 향했다.
지나치게 얇디얇은 의상은 그녀의 실루엣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데도 얼굴을 붉히거나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다.
“그러지.”
그녀의 말대로 움직인 것은 거의 호기심이었다. 처음 본 유형의 여자를 판단할 만한 자료가 그의 머릿속에는 없었으니까.
그녀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커다란 침대 위로 올라간 키언은 지나치게 푹신한 쿠션감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자신의 침대가 이렇게 푹신한 줄은 미처 몰랐는데. 줄을 풀기 위해 손을 뻗자 그녀와 몸이 금방이라도 맞닿을 듯 가까워졌다.
이름 모를 꽃향기가 그녀에게서 진동했다. 가까이에서 본 그녀의 눈동자는 아주 깊은 바닷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오묘했다. 자꾸만 들여다보고 싶게 만드는 퍽 기묘한 느낌의 눈동자였다.
보기 드문 흑발에 새하얀 피부,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와는 달리 눈빛이 꽤 흉흉한 여자. 곱상한 외모와는 상반된 눈빛이 그의 호기심을 부추겼다.
사락, 그가 매듭을 당기자 끈이 쉽게 풀어졌다.
“감사합니다.”
샤로니아는 싱긋 웃으며 키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황제의 눈을 이렇게 대놓고 보아도 되는지 알 수 없었으나 뭐 어때? 지금은 예법을 운운하며 잔소리해 댈 ‘신전 놈들’은 아무도 없는데.
빛나는 은발에 황금색 눈동자. 마치 신전처럼 찬란한 외모를 지닌 남자를 보며 샤로니아는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신전의 멸망을 위해 반드시 손을 잡아야 할 황제가 이토록 그림 같은 외모를 지니고 있다는 게 반칙처럼 여겨졌다. 사람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한 외모는 어쨌든 경계하는 것이 옳았으니까.
“신전을 없애고 싶습니다.”
그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샤로니아가 불쑥 말했다.
“성녀가 신전을 없애고 싶다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키언이 눈살을 찌푸렸다.
“마구스가 피눈물 흘리는 것을 꼭 봐야 하거든요.”
그녀의 눈동자에 살기가 스쳤다.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노련한 기사이기도 한 키언은 단박에 그 살기를 읽어 냈다.
마구스, 대사제장이자 ‘카티르’라 불리며 황권을 위협하는 신전의 수장. 그가 피눈물을 흘리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
“그런 말을 짐에게 하는 이유는?”
“폐하께서도 신전을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아서요. 아시다시피 저 혼자의 힘으로 마구스를 제거하는 건 무리니까요.”
“그래서, 힘을 보태 달라?”
“말이 잘 통하시네요.”
금방이라도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처럼 사나운 눈빛을 한 여자가 봄에 핀 꽃처럼 화사하게 웃었다. 그 이질감에 키언은 헛웃음을 뱉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