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약혼녀가 아니야 (74)화 (74/74)

에필로그 11화

“서흔아!”

놀란 건욱 역시 급하게 문을 풀쩍 열고 나갔다. 서흔은 자동차 바로 옆 화단에서 구역질을 했다.

우욱. 먹은 것도 없어서인지 속이 쓰리기만 할 뿐, 밖으로 토하는 건 없었다. 그럼에도 계속 토할 것처럼 역한 느낌이 끝없이 밀려왔다.

“서흔아, 괜찮아?”

“저, 저리 가요!”

서흔은 그가 바로 달려 나와 그녀의 등을 두들기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런 모습을 건욱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손사래를 쳤지만 건욱은 그렇다고 계속 구역질을 하는 그녀의 곁을 떠날 수 없었다. 건욱은 안절부절못하며 등 뒤에서 빙빙 돌았다.

“하아.”

속이 좀 진정되었는지 더 이상 구역질이 나오지 않았다. 기운이 쏙 빠진 서흔이 깊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그만, 핑글 머리가 돌았다.

“서흔아!”

그녀는 그대로 건욱의 품 안으로 떨어지며 기절했다.

* * *

한참이나 푹 잠을 잔 서흔이 눈을 떴다. 몸이 무언가 개운하면서 끊임없이 시원한 에너지가 들어오는 기분이 들었다.

얼얼한 팔을 들어 올리자 링거 줄이 꽂힌 게 보였다.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와 바쁘게 돌아가는 분위기가 단번에 느껴졌다.

서흔은 몸을 살짝 일으키려다 여전히 기운이 없어 다시 풀썩 누웠다.

잠깐 기절했다고 링거까지 맞을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기운이 없는 걸 보니 링거를 맞길 잘한 것도 같았다.

물론, 그녀가 결정했던 일은 아니지만.

‘건욱 씨는 어디 갔지.’

병원까지 그녀를 데리고 왔을 건욱이 보이지 않았다.

서흔이 주변에 혹시 제 가방이 있나 찾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포기하고 가만히 누워있었다.

십여 분이 흐르고 건욱이 병실로 들어왔다.

“더 자지는 깼어?”

“건욱 씨, 나 입원했어요? 여기 병실 같은데.”

“입원은 아니고 링거 맞는 동안 잠깐 편하게 있으라고. 저녁도 많이 못 먹어서 먹을 것 좀 사 왔어. 앉아서 조금만 먹어 봐.”

건욱이 과일과 샐러드, 샌드위치, 김밥, 만두 등등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종류별로 다 사 와 하나씩 꺼내 놓았다.

건욱의 마음이 고마워 연한 미소를 짓고 있던 서흔의 얼굴이 조금씩 사색으로 변했다.

역한 냄새가 한꺼번에 코끝으로 들어오더니 다시 구역질이 올라왔다.

서흔은 몸을 급하게 일으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우욱’거렸다.

건욱이 급하게 의료 호출을 누르곤 음식들을 황급히 다시 포장해 병실 밖으로 내보냈다.

시도 때도 없이 구역질이 올라오는 병은 대체 무엇인지 그의 미간이 깊게 파였다.

똑똑 소리와 함께 김 박사가 병실로 들어왔다.

“박사님, 또 구역질을 하는데 검사 결과는 언제 나옵니까.”

“허 거참, 성격도 급하구만. 안 그래도 검사 결과 알려 주러 내 직접 왔잖아.”

“네.”

굳은 표정의 건욱이 피가 마르는 심정으로 김 박사를 바라보자 김 박사가 서흔을 보며 말했다.

“유서흔 씨, 축하해요. 임신이에요.”

“?!”

놀란 건욱보다 서흔의 눈동자가 튀어나올 듯 커졌다.

“……임신이요?”

서흔이 얼마나 놀랐는지 구역질은 멈추고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생리를 두 번 건너뛰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결혼 준비로 신경을 많이 써서 그런 줄 알았다.

예비 신부들 사이 생리 불순은 의외로 흔한 일이라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임신일 줄이야!

건욱은 크게 웃으며 김 박사의 손을 잡았다.

“감사합니다, 박사님!”

“이보게, 자네가 감사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예비 신부지. 난 이만 나가 볼 테니 두 사람끼리 대화 나누도록 해요.”

헛구역질은 그저 입덧일 뿐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김 박사가 나갔다.

건욱은 김 박사가 사라진 것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달려가 그대로 안아 버렸다.

“서흔아.”

두근두근 격하게 뛰는 건욱의 심장이 그녀에게 전달되었다.

“고마워, 고마워, 서흔아.”

“……좋아요?”

“당연하지!”

건욱은 화통하게 웃으면서 그녀를 꽉 안았다가 갑자기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왜 그래요?”

“이렇게 꽉 안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아기가 놀라지 않았을까?”

심각한 고민에 빠진 사람처럼 잔뜩 미간을 좁힌 건욱에 서흔은 자신도 모르게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지 말고 나 안아 줘요.”

서흔이 손을 뻗자 그가 주춤주춤하면서 다가왔다. 그러더니 주먹 하나를 들어갈 만한 틈을 만들어 놓곤 조심스레 그녀를 안았다.

서흔이 웃으며 그의 어깨에 얼굴을 비비자 그가 옅은 한숨을 쉬고는 조금 더 그녀를 끌어안았다.

“이렇게 갑자기 아이가 올 줄 몰랐어요.”

“갑자기는 아닌데.”

“응?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가 강원도에서 혼수 먼저 준비하자고 했잖아.”

“아……!”

서흔은 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 말이 이런 뜻이었어요?”

“응.”

“진짜, 건욱 씨 못 말려요.”

서흔이 당해 낼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왜 웃지? 난 그때도, 지금도 진지한데.”

건욱이 인상을 찌푸렸지만 서흔은 계속 미소 지었다.

“아까 당신에게 사무치게 서운했던 것도, 갑자기 눈물을 쏟아 내며 헛구역질했던 것도 다 호르몬 때문이었나 봐요.”

“그렇게 서운했습니까?”

잔뜩 심각한 표정으로 묻는 건욱에 서흔이 작게 말했다.

“……드레스가 별로라고 했잖아요.”

“처음 입었던 드레스 말인가? 그건.”

건욱은 웃음을 터트리며 줄곧 그가 기대했던 아이에 대해 설명했다.

“예비 신부들은 결혼식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소리를 들었어. 당신이 배가 나온 티가 확연히 나는 드레스를 입는 걸 좋아할 것 같진 않아서. 물론, 나만 보고 싶은 광경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고 싶지도 않았고.”

“그런 거였어요? 내가 임신할 줄 어떻게 알고요.”

“그냥 느낌이랄까.”

다시금 눈물이 차오르는 서흔에 건욱은 그녀의 눈물을 입술로 훔쳤다.

“그만 울어요. 우리 아기가 벌써 아빠가 엄마의 눈물에 약한 걸 알았나. 왜 자꾸 눈물을 흘리지. 그래도 아가야, 엄마 자꾸 울면 눈이 퉁퉁 부어 아무것도 안 보일 거라고 좀 전해 줘. 물론, 그 모습마저도 아빠는 사랑하지만 말이야.”

건욱이 얼굴을 그녀의 배에 딱 갖다 붙이곤 진지하게 말했다. 그 모습에 서흔은 눈물을 그치곤 웃었다.

웃었다 울었다 아주 난리를 피우는 도중, 다급한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번쩍 열렸다.

“서흔아!”

급하게 뛰어왔는지 얼굴이 벌게진 다경이 서흔에게 다가왔다. 그 뒤로 도 실장이 따라 들어왔다.

“너 임신했다며!”

“어, 어.”

“축하해, 이 기집애야!”

다경이 와락 그녀를 안았다. 목을 조른다고 오해할 만큼 서흔을 꽉 껴안자 건욱이 못마땅하게 두 사람을 쳐다보다 이내 다경의 팔을 떼어냈다.

그러곤 한다는 말이.

“임신부는 절대 안정해야 합니다.”

“건욱 씨, 나 괜찮아요.”

“당신은 괜찮을지 몰라도 아가는 아니야.”

단호한 건욱에 서흔이 민망해했지만 그를 말릴 수가 없었다. 그런 건욱과 서흔을 황당하게 쳐다보던 다경이 덥석 건욱의 손을 잡았다.

“건욱 씨, 서흔이 평생 잘 부탁해요. 이런 거 보면 내가 더 이상 우리 서흔이 걱정할 필요 없을 것 같네요.”

딸자식 시집보내는 엄마의 마음처럼 다경이 벅차오르는 가슴을 꾹꾹 눌렀다.

“손은 떼고 말씀하시죠.”

도 실장이 건욱의 손을 잡고 있는 다경의 손을 쓰윽 떼어 내며 음산하게 읊조리자 다경이 움찔했다.

“임신 축하드립니다.”

“감사해요, 도 실장님.”

도 실장이 깍듯하게 서흔을 향해 인사말을 건넸다. 서흔은 인사를 하면서도 다경과 도 실장을 번갈아 힐끗 보았다.

살짝 흐트러진 다경의 옷은 그녀가 급하게 온 탓이라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도 실장 셔츠 깃에 묻은 여자의 립스틱을 보니 두 사람 사이에 무언가가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도 실장, 축하는 충분하니 이제 그만 돌아가지? 손다경 씨도 집에 모셔다드리고.”

건욱은 내쫓듯이 도 실장과 다경을 병실에서 내보냈다. 그러고는 서흔의 베드로 올라와 그녀를 등 뒤에서 꼭 껴안았다.

“수액 다 맞을 때까지만 이러고 있자.”

그냥 편하게 앉아 있으라 말하려던 서흔은 따스한 체온에 긴장을 풀고 푹 기댔다.

“당장 신혼집을 구해서 같이 살자. 당신 혼자는 불안해서 못 보내.”

“응, 그래요.”

건욱의 말에 서흔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그의 생각이 전적으로 옳았다. 서흔은 아직은 어떠한 느낌도 없는 배를 매만졌다.

“실감이 안 나요. 정말 내가 임신을 했다는 게.”

“사실은 나도 그래. 그런데도 이렇게 행복한 걸 보면 이건 모두 우리의 아기 덕분이야.”

건욱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서흔과의 결혼, 그리고 두 사람 사이의 아이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그가 꿈꿔 온 완벽한 가정이 그려졌다. 건욱이 배 위에 올려진 그녀의 손등을 덮었다.

“우리 행복하게 살자.”

그 누구도 우리의 행복을 침범할 수 없을 만큼 견고한 행복을 두 사람에게 선물해 주고 싶었다.

“사랑해.”

서흔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아교가 맞물리듯 서로를 찾는 시선에는 따스한 사랑밖에 없었다.

“사랑해요.”

가슴을 살랑이게 만드는 고백에 건욱이 그녀의 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놔줬다. 한 번 더, 그리고 한 번 더.

끝없이 입맞춤을 날리는 병실에는 오랫동안 두 사람의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에필로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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