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10화
“다경아. 나는 괜찮은데.”
다경의 심상치 않은 반응에 서흔이 흠칫했다. 서흔이 다경을 말리기 위해 팔을 잡았지만 다경을 진정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아니 입어 보는 건 자유인데 너무 말투가 명령조잖아. 듣는 내가 기분이 나쁜데. 넌 안 그래, 유서흔?”
“응?”
“사모님 기분이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만, 지금 입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미안한 기색이라곤 없는 사과의 말을 건네면서도 도 실장은 제 뜻을 굽히지 않았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서흔이 다경과 도 실장 사이에서 난감해하자 쇼퍼가 다가와 자연스럽게 그녀를 피팅 룸으로 이끌었다.
“원래 이렇게 제멋대로예요?”
서흔이 피팅 룸으로 가는 모습을 보고 난 다경이 다시금 도 실장을 노려보았다.
도 실장도 다경의 눈빛을 모르지 않을 텐데 전혀 거슬리지 않는다는 모습으로 서흔을 기다렸다.
괜히 다경은 더 이가 갈렸다. 첫인상부터 별로라서 그런지 보면 볼수록 아주 별로인 남자였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신경에 거슬렸다.
“내가 너무 늦었습니까?”
그때, 갑자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숍 안으로 차건욱이 들어왔다.
“오랜만입니다.”
“안녕하세요.”
다경과 건욱이 서로 맞인사를 했다.
“가까스로 시간 맞춰 오셨습니다. 곧 드레스 입고 나오실 겁니다.”
도 실장은 이미 그의 등장을 알고 있었는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고생했어요. 이만 들어가 봐요.”
“네, 수고하십시오.”
도 실장이 꾸벅 건욱에게 인사를 한 뒤 멀찍이 서서 가만히 있는 다경에게 다가갔다.
“왜 그렇게 쳐다봐요?”
“계속 여기 있을 겁니까.”
그럼, 뭐 내가 어디 있을까.
부루퉁한 표정의 다경이 얼굴로 그의 뜻을 전달하는데 도 실장이 옅은 한숨을 쉬었다.
“같이 나갑시다.”
“아니, 내가 왜 그쪽이랑 나가요?”
다경이 커다란 눈망울을 사납게 굴리며 도 실장을 바라보자 그가 더욱 가까이 그녀의 귓가로 입술을 내렸다.
“눈치 없다는 소리, 못 듣나 보죠? 두 분이 결정하시도록 자리 피해 줘야 겠다는 생각 못 합니까.”
다경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별다른 생각 없이 서흔을 기다려서가 아니었다.
솜털이 바짝 일어날 만큼 가깝게 숨결이 닿았던 그 1초에 완전히 얼어붙은 것이었다.
“대표님, 우리는 먼저 들어갑니다.”
도 실장은 마지막 인사를 하고는 완전히 굳어있는 다경을 조심스레 이끌어 숍을 나갔다. 숍에 나와서야 정신을 차린 다경이 그의 팔을 쳐냈다.
“이 봐요, 도, 도……. 이름이 뭔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도 실장님.”
“도성훈.”
“네, 도성훈 씨. 이렇게 멋대로 끌고 나오는 게 어디 있어요?!”
“사죄의 의미로 밥 사죠. 뭐 좋아합니까? 한식? 양식? 중식? 아니면 밥 대신 술?”
“……술이요. 아주 비싼 술.”
“좋습니다. 갑시다.”
전투력이 넘치는 대답에 피식 웃은 도 실장은 스마트 키로 차 문을 열었다.
당연히 운전석으로 향할 줄 알았던 도 실장은 조수석 문을 열곤 다경을 보았다.
“타시죠.”
에스코트하듯 서 있는 도 실장의 모습에 다경은 혼란스러움을 느끼며 차에 올라탔다.
* * *
“신부님, 옷 어떠세요? 혹시 불편하신 곳은 없으세요?”
“허리가 좀 남네요. 조금만 더 조정해 주시겠어요?”
“네, 혹시 너무 답답하시면 말씀하세요.”
쇼퍼는 있는 힘껏 허리끈을 잡아당겨 드레스를 매무새를 만졌다.
“괜찮으세요, 신부님?”
“괜찮아요.”
“네, 그럼 나가실게요.”
“네.”
마지막으로 거울을 보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쓱 훑어본 서흔이 괜한 긴장을 떨쳐 내며 고개를 들었다.
그녀를 가리고 있던 커튼이 걷히고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깜짝 놀란 서흔이 기쁨으로 가득 찼다.
“건욱 씨! 오늘 못 온다고 했잖아요!”
“어떻게든 와야지. 우리 신부 드레스 입은 모습을 놓칠 수야 있나.”
건욱이 환하게 미소 지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너무 아름다운데.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건욱의 깊어진 눈동자가 서흔에게 고정되었다. 서흔은 괜히 부끄러워져 눈동자를 내리떴다.
“웨딩드레스라 그런지 예쁘죠?”
“누가 드레스가 예쁘대? 유서흔이 예쁜 거지.”
“건욱 씨.”
그러지 말라는 듯 서흔이 말했지만 얼굴 가득 미소가 피어나는 건 어찌 숨길 수가 없었다.
“이 드레스 어때요?”
전반적으로 고혹적인 실크 소재의 드레스였다. 입술 라인으로 슬림한 어깨를 드러내고 허리부터 골반, 허벅지까지 여성스러운 라인을 그대로 드러내는 머메이드 라인의 드레스는 그녀를 위한 단 하나의 드레스처럼 완벽하게 어울렸다.
“이걸로 할까 고민 중이에요.”
그녀가 망설이고 있는 드레스는 지금 입고 있는 머메이드 라인과 벨 라인 두 가지였다.
날씬해 보이면서도 섹시하고 여성스러운 이미지를 강조하는 머메이드 라인으로 할지, 풍성하고 화려하면서도 귀여운 벨 라인으로 할지 도저히 결정하기가 어려웠다.
“글쎄…….”
“……별로예요?”
“별로라기보다는.”
건욱이 말을 아꼈다. 실제 본식에서 입으려면 앞으로 두세 달은 더 지나야 했다.
혹시라도 저 드레스가 너무 타이트하게 허리를 압박하는 건 아닐지 걱정이 되었다.
“……다른 거 입어 볼게요.”
그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서흔은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곤 조용히 벨 라인의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새로운 드레스를 입고 나타난 서흔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의 미묘한 변화를 눈치 챈 쇼퍼가 분위기를 띄우며 입을 열었다.
“우리 신부님 너무 아름다우시죠~! 대표님이 보기엔 어떠세요?”
“괜찮네요. 당신도 마음에 들면 이걸로 할까?”
“……그렇게 해요.”
서흔은 쌩하니 뒤돌아 커튼 뒤로 숨어 버렸다.
숍에서 나온 뒤부터 서흔은 말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늦은 저녁을 먹는 것임에도 입맛이 없어 손도 거의 대지 않다시피 했다.
건욱이 그녀를 신경 쓰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냈지만, 그녀는 겨우 호응만 할 뿐이었다. 서흔의 머릿속은 단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드레스 입은 모습이 그렇게 별로였나.’
그녀가 처음 골랐던 머메이드 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보고 난감해하던 건욱의 얼굴이 지워지질 않았다.
일정을 무리해서 그녀를 보러 숍에 온 그를 보고 반가웠던 마음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저 너무 서운했다.
“아까부터 기분이 별로인 것 같네.”
서흔을 내려 주기 위해 집 앞에 차를 정차한 건욱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아무 일 없었어요.”
“그래?”
건욱은 서흔이 저녁 내내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명 그를 숍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행복한 미소를 숨기지 못했던 그녀였는데. 저녁 먹을 때부터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그가 알던 그녀는 감정 변화가 빠른 스타일이 아니었다. 서흔은 평정심이 커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짝 안 했다.
서 회장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침착하게 할 말은 다 하던 그녀가 아니었던가.
그런 서흔이 기분이 갑자기 안 좋아진 원인이 뭔지 고민해 봐도 드레스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설마 드레스 때문일까 싶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입을 열었다.
“혹시 아까 드레스가 마음에 안 들었어? 드레스는 당신 마음에 드는 걸로 다시 골라요.”
“내 마음에 들면요? 내 마음에만 들면 되는 거예요?”
“응?”
“내 마음에만 들면 뭐 해…….”
서흔의 턱이 파르르 떨렸다. 입술마저 떨리는가 싶더니 눈동자가 붉어지면서 눈물이 금방이라도 툭 떨어질 것 같았다.
“서흔아.”
“당신 눈에 이상한 거잖아요. 드레스 입은 내 모습…… 완전 별로인 거잖아. 그 드레스가 그렇게 안 어울렸어요?”
서러움이 목 끝까지 차오르자 목이 메었다.
“드레스는 너무 예쁜데, 다른 신부들은 다 여신처럼 예쁜데, 나만…… 나만…… 나만! 신랑 눈에도 별로인 거잖아요.”
결국 서흔이 울음을 터트렸다. 세상 모든 서러움을 껴안은 것처럼 꺼이꺼이 울자 건욱은 무척 당황했다.
“누가 그래? 당신이 드레스 입은 모습이 별로라고?”
“건욱 씨가…….”
그녀를 품에 끌어와 토닥여 주었다. 서흔은 꺽꺽 울면서도 건욱이라 콕 집어 말했다.
“내가? 내가 언제?!”
혹시 첫 드레스 입은 모습에 걱정하는 모습을 오해한 건가?
그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아니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설명할 수 있는 건가.
건욱이 제 이마를 손으로 매만지며 난감해하는 사이 목이 넘어갈 듯 서럽게 울던 서흔이 갑자기 그를 밀어냈다.
“우욱!”
입을 급하게 손으로 틀어막은 서흔이 구역질을 하며 차 문을 열고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