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약혼녀가 아니야 (72)화 (72/74)

에필로그 9화

“이번엔 조용히 지나갔나?”

“어떻게 알았어요?”

“당신의 눈빛, 말투, 어조, 손짓이 그렇게 말해 주는데.”

“뭐야. 난 또 와서 보기라도 한 줄 알았잖아요.”

사실 직접 보진 못했지만 간접적으로 본 셈이었다. 서흔이 부담스럽지 않게 멀리서 지켜보는 경호를 쓰는 터라 서흔은 몰랐지만, <플로라유>에서 일어나는 일들 전부 그에게 보고되었다.

“당신 애인이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 아니라서요. 그놈은 왜 왔답니까.”

“용서를 해 달라고요. 당신이 나 대신 고소 진행한 거예요? 그럼 그때 그 서류가.”

“임진수에 관한 건 내가 처리하기로 했으니까.”

“그러기로 했는데 음…….”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걸 그랬나.”

“건욱 씨, 제발 농담을 진담처럼 하지 말아줄래요?”

“왜 자꾸 내 진담을 농담이라 받아들이는 건지 모르겠네.”

“고마워요, 건욱 씨.”

끝까지 살벌한 농담을 놓지 않는 건욱에, 서흔이 콧잔등을 찡그리면서도 웃었다.

“당신 덕분에 오늘 임진수가 무릎 꿇는 것도 보고 이제 앞으로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는 맹세까지 했어요.”

아마 그녀였다면 그저 임진수 자체를 머릿속에서 쓱쓱 지워 버리는 걸로 끝냈을 터였다.

그걸 잘 아는 건욱이 일부러 나서서 고소까지 진행했을 터였다.

“당한 걸 되갚아 주는 게 이렇게 속 시원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살 뻔했어요. 당신 아니었으면.”

“임진수를 고소한 건 당신이 당했던 괴롭힘에 대한 보복이 아니야. 어쩔 수 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던 당신에 대한 위로이고, 이제는 더 이상 쉽게 건들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야.”

“…….”

“나 또한 속이 시원한 것도 있고.”

건욱이 가볍게 웃었다.

“당신의 손목을 잡고 끌고 가려고 했던 임진수를 봤을 때부터 그대로 멱살 잡고 경찰서로 끌고 갈 뻔했으니까.”

“응.”

“임진수 이야기는 그만하고 고기 먹어요. 내일 아침에는 내 시계 챙겨 줘야지.”

사랑스러운 눈길로 건욱이 그녀의 그릇 앞에 고기를 착착 대령했다.

“어? 오늘도 당신 집에 안 들어갈 거예요?”

서흔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피곤한데 좀 쉬어야죠.”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은 언제나 행복하지만 그는 그녀의 집에 머무는 동안 충분히 쉴 수 없었다.

그는 끝없이 그녀를 탐했고 그러다 보면 하룻밤이 금세 지나갔다.

밤을 지새우다시피 하룻밤을 보낸 뒤, 어떻게 회사에서 일을 하는지 그녀로선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당신과 함께 있는 게 쉬는 거야. 몰라?”

“그래도요.”

“나 집 없잖아.”

절대 오늘 그녀의 집에 머물지 않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호텔 스위트룸은 대표에게 제공되는 숙박 시설일 뿐, 그에게 집은 아니었다.

“건욱 씨가 집 없다고 하면 누가 믿냐고요.”

“내가 집이 있었으면 좋겠어?”

“당신이 퇴근하고 편히 쉴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당신이 집처럼 생각되는 공간이 없으면 우리 신혼집이라도 빨리 구하면 어때요?”

“당장 같이 살자고?”

“당신 먼저 들어가요.”

“싫은데. 신혼집에 혼자 들어가서 살라니, 신종 고문이야?”

“결혼 전까지는 연애하고 싶어요. 헤어지는 아쉬움도 계속 느껴 보고, 매일 매일 함께 있고 싶다고 간절히 바라 보기도 하고. 얼굴 못 봐서 영상 통화도 해 보고 메시지 하나, 전화 한 통 기다려 보기도 하고요.”

아직은 꿈같은 연애에서 깨고 싶지 않았다. 현실이 될 결혼을 또 다른 사랑으로 채워 갈 만한 시간이 필요했다.

“……하. 유서흔을 이기기란 너무 어렵네.”

건욱은 결국 서흔의 뜻을 받아들였다.

“대신 오늘 밤은 당신 집에 갈 거야.”

“응. 나도 당신이 간다고 하면 서운할 뻔했어요.”

수줍어하면서도 서흔은 건욱의 손을 꼭 잡았다.

* * *

-도 실장이 신혼집 리스트 보냈다던데 확인해 봤어요?

아침부터 서흔은 <플로라유>에서 노트북을 켜고 도 실장이 마련한 PPT 자료를 보고 있었다.

“네, 저는 다 좋아요.”

-그럼 다 구매하지 뭐.

“아니! 제 말은 절대 그런 뜻이 아니고요!”

태연하게 말을 하는 건욱에 화들짝 놀란 서흔이 손사래를 쳤다.

“도 실장님이 보내 주신 목록 중 마음에 들지 않는 곳이 하나도 없으니 건욱 씨가 선택한 집으로 해도 될 것 같다는 뜻이었어요.”

-도 실장이 무조건 당신의 뜻에 따라 구매를 추진한다는 코멘트를 안 달았나?

“있었어요.”

-고민이 되면 몇 군데만 추려 봐요. 직접 같이 가서 보자.

“바쁘지 않아요?”

-바빠도 해야 할 일은 해야지.

“그럼 딱 두 군데로 추려 볼게요.”

-급하게 고르지 말고 천천히 고민해 봐요.

“알았어요.”

서흔은 우선 노트북을 닫았다. 결정 장애가 온 건지 쉽게 선택을 못 하겠으니 오후에 다경이 출근하면 의논할 생각이었다.

-오늘 헤어와 메이크업을 알아보러 숍에 간다고 했던가.

“네, 그건 다경이랑 같이 가 보려고요.”

-같이 못 가서 미안해요. 대신, 도 실장이 <플로라유> 방문할 거야. 내가 종종 이용하는 숍에 이미 이야기해 뒀으니 함께 다녀와요.

웬만하면 결혼 준비를 같이하려고 하는 건욱이었지만 시간을 내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서흔은 그런 그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 자잘한 준비는 다경과 함께 하고 있었다.

“아니, 안 그래도 되는데.”

-이따 드레스 고르고 사진 찍어 보여 줘.

“……알았어요.”

-이따 연락할게요.

“네.”

전화를 끊은 서흔은 괜히 머쓱해 목을 매만졌다. 그가 일부러 안 오는 건 아니었다. 서운해할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와의 통화로 오늘따라 그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흔은 괜히 이래저래 복잡해지는 생각에 다경이 빨리 오기를 바랐다.

그리고 몇 시간 후.

<플로라유> 문 닫는 시간에 맞춰 도 실장이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하셨어요.”

“고생 아닙니다. 덕분에 입사 후 손에 꼽는 칼퇴 했습니다.”

“지금부터 다시 야근이시잖아요.”

“이런 야근이면 매일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럼 가실까요?”

“아, 저 잠깐. 제 친구인데 같이 가도 되죠?”

“안녕하세요, 손다경입니다.”

다경이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도 실장은 힐끗 보더니 고개를 아주 살짝 까딱이곤 서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네, 같이 가셔도 됩니다. 그럼 타시죠.”

예의를 차리다 못해 차갑게 느껴지는 태도로 인사를 한 도 실장이 운전석에 올라탔다.

그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보던 다경이 뒤 목을 잡았다.

“유서흔, 저 사람 뭐야? 어떤 사람이야?”

“어…… 사실은 나도 잘 몰라. 매번 인사만 했던 사이라서.”

서흔도 당황스러운 도 실장의 태도에 혼란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건욱의 이야기를 들었을 땐 일을 잘한다는 이야기 말곤 특별한 게 없었다.

“우선 타자. 숍도 약속이 되어 있는 거니까 시간은 지켜야지.”

“그래, 가자.”

다경은 도 실장이 운전하는 차에 올라타 자신도 모르게 그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왠지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것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각 하나하나를 세워 입은 슈트도 영 제 취향이 아니었고, 특히 사람을 무시하는 데 특화된 듯한 눈빛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꼭 제 마음에 들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첫인상이 이렇게 최악인 사람은 너무 오랜만이라 신선함을 뛰어넘어 경악에 가까웠다.

“지금 가시는 숍은 W호텔에서 행사가 있을 때마다 전담으로 쇼퍼를 해 주는 곳입니다. 사모님께서 원하시는 스타일을 말씀하시면 다 맞춰 주실 겁니다.”

“네.”

건욱이 굳이 이 숍을 고른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 서흔은 숍에 도착해서도 마음을 푹 놓았다.

“혹시 어떤 스타일을 추구하실까요?”

이미 준비를 완벽히 하고 있던 쇼퍼는 서흔의 앞에 다양한 드레스와 헤어, 메이크업 스타일을 쭉 늘어놓았다.

서흔이 해야 할 일이라곤 감탄을 뱉어 내며 수많은 선택지 가운데 한 가지를 고르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다 마음에 드는데 어떡하죠?”

“음, 그럼 몇 가지를 픽해 보시겠어요?”

“아. 그럴까요?”

서흔이 집중하여 스타일을 고르는 동안 다경은 삐딱한 자세로 계속 도 실장을 노려보았다.

한 번 상한 기분은 전혀 돌아오지 않았고 그의 존재만으로도 신경이 거슬리는 것이 아주 맘에 들지 않았다.

“다경아, 이거 어때?”

“좋아.”

“이건?”

“예뻐.”

“이거는?”

“최고야.”

다경의 기계적인 반응에 서흔이 한숨을 푹 쉬었다.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던 도 실장이 힐끗 시간을 확인하더니 입을 열었다.

“직접 입어 보시는 것이 어떠시겠어요?”

“아, 그럴까요?”

“당신이 뭔데 서흔이한테 입어 보라 마라, 명령이에요?”

갑자기 다경이 부르르 분에 차 일어서 도 실장 앞에 탁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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