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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약혼녀가 아니야 (71)화 (71/74)

에필로그 8화

한창 과거의 추억에 홀딱 빠져 있던 서흔의 정신이 화들짝 든 건 갑자기 나타난 임진수 때문이었다.

“야, 넌 또 여기 왜 왔어!”

서흔보다도 더 먼저 튀어 오른 건 다경이었다. 그녀는 임진수가 차용증을 조작하여 서흔에게 되도 않는 결혼을 하자고 협박했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의 일처럼 분노했다.

차용증이 아니더라도 <플로라유>를 한 번 뒤집어엎고 사라진 임진수에게 좋은 감정은 있을 수가 없었다.

“서흔아.”

핼쑥한 표정의 임진수가 터벅터벅 서흔 앞까지 걸어왔다. 갑자기 그가 털썩 바닥에 주저앉더니 무릎을 꿇었다.

“나 좀 용서해 줘라.”

“……!”

“내가 다……. 다 잘못했어. 서류 위조해서 네 도장 찍은 것도, 따라다니면서 결혼하자 협박한 것도, <플로라유> 집기들을 함부로 짓밟은 것, 모두 다. 다 내 잘못이야.”

진수의 떨리는 목소리에 서흔과 다경의 놀란 눈동자가 허공에서 부딪쳤다.

남자는 자존심이라며 현금만 다발로 가지고 다니는 애가 무릎을 꿇은 것만으로도 기가 막히고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 진수가 스스로 이제껏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실토하며 용서를 구한다는 게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서흔은 침착하게 진수를 쳐다보았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무릎 위에 양손을 올리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정말 나한테 미안한 걸까.

용서를 구하러 온 사람인데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고 싶지 않지만, 이제껏 진수가 살아온 세월을 잘 아는 서흔이었다.

진수는 제 잘못을 겸허히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할 사람이 아니다.

“갑자기 이렇게 찾아온 이유가 뭐야?”

차용증과 더불어 그가 난동을 피웠던 것이 몇 달 전이었다.

그동안 잠자코 있던 그가 불쑥 나타난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말했잖아, 서흔아! 나 좀 제발 용서해 줘라.”

진수의 날카로운 눈이 희번덕거리며 치켜 올라갔다. 꾹 참느라 힘을 잔뜩 준 허벅지에 쥐가 날 것 같았다.

‘참아야 해, 이런 썅.’

고소장을 처음 받은 이는 엄마였다. 엄마는 제게 말 한마디 없이 아버지에게 그 고소장을 넘겼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노발대발했다. 그러곤 완전히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엄마가 아무리 눈물을 흘리며 하나밖에 없는 자식 도와 달라 소리쳐도 소용없었다.

도리어 아버지는 다 큰 성인이니, 제가 싼 똥은 스스로 치울 수 있다며 절대 돈 한 푼 도와주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한평생 아버지에게 꽉 잡혀 살기만 한 엄마는 결국 눈물만 찍어댈 뿐, 그에게 도움 되는 거라곤 하나도 없었다.

결국 온전히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신세가 된 진수는 여기저기 수소문해 변호사를 가까스로 선임했다.

진수는 그가 얼마나 억울한 상황인지 설명을 했고, 그 이야기를 다 들은 변호사는 한마디를 했다.

[정상 참작이라는 게 있습니다. 사과를 하시고 합의하세요.]

사과라는 말에 머리끝까지 화가 뻗쳐올랐지만 감정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로봇 같은 변호사는 반드시 용서를 받아 와야 한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아무리 진수가 억울하다고 말을 해도 소용없었다. 사기죄로 고소를 당한 상황에서 증거들은 모두 다 그에게 불리하니 조금이라도 형량을 낮추려면 그 방법뿐이라고 했다.

그러니 그는 참아야 했다. 무조건 이 상황을 견뎌야 했다.

“미안하다는 사과가 아니라 용서를 해달라는 거네? 왜 내 용서가 필요한데?”

“필, 필요하긴 누가 필요하대! 그냥 진심으로 너한테 용서를 구하고 싶다는 거지.”

“야, 임진수! 그렇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게 미안해하는 사람의 입장이냐? 어디 와서 또 난동이야? 경찰 부른다!”

무섭게 윽박지르는 진수에 지지 않고 다경이 달려들어 똑같이 소리쳤다.

“나는 미안해서 그러지.”

진수가 다경을 무섭게 노려보면서도 서흔의 눈치를 잔뜩 보며 입을 열었다.

어차피 무릎까지 꿇어가며 사나이의 자존심이고 뭐고 다 버렸는데, 합의마저 하지 못하는 상황이면 이도 저도 밥도 안 된다.

“진수, 네가 뭘 잘못했다고?”

“차용증에 손댄 거.”

“또.”

“너 따라다니면서 결혼하면 빚 없애 준다고 협박한 거.”

“또.”

“<플로라유> 화분 파손한 거.”

인상을 심하게 구기면서도 진수는 제가 했던 일을 읊었다. 고소장에 적힌 말 그대로, 토씨 하나 틀리지 않았다.

“그래서 넌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뭘 어떻게 해?”

“나한테 말로만 사과하고 끝낼 거야? 아니면 앞으로 내 인생에서 꺼져 줄 거야?”

“…….”

진수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무릎을 꿇을 때도 이 정도로 수치스럽지 않았는데 인생에서 꺼지라는 서흔의 말은 쉬이 넘길 수가 없었다.

“그럴 마음이 없나 보네. 그럼 나도 용서 안 하고.”

서흔이 진수의 앞에서 몸을 비켜 자리를 뜨려했다. 그때, 진수의 머릿속에 변호사의 말이 쩌렁쩌렁 울렸다.

[용서를 받으세요. 합의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세요. 그게 싫으면 징역이든 벌금이든 나오는 대로 받아들이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다급하게 정신을 차린 진수가 제 감정을 가까스로 누르며 그녀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아, 아냐. 꺼져 줄게. 네가 원하는 대로 니 인생에서 꺼져 줄 테니까 나 용서해 줘!”

“전혀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는 것 같지 않은데.”

서흔이 잡힌 다리를 빼내며 시니컬하게 말했다.

“서흔아, 제발, 제발, 제발! 날 그만 용서하고 우리 영원히 이별하자. 응?”

곧 눈물이라도 쏟을 듯이 울먹이듯 말하는 진수의 얼굴을 보며 서흔은 훌훌 웃었다.

* * *

저녁을 함께 먹자고 열심히 노력한 건욱이건만 그는 야식을 먹을 시간이 되어서야 서흔을 만날 수 있었다.

“이 시간에 삼겹살이라니. 저녁 안 먹었습니까?”

“당신은 먹었어요? 괜히 먹었다는 거짓말 말고요. 나 도 실장님 연락처 있어, 알죠?”

거짓은 절대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의지가 눈에 보이는 서흔에 건욱이 먹었다는 말을 입 밖에 꺼내는 불상사는 없었다.

“삼겹살 맛있겠다.”

노릇노릇 구워지는 삼겹살을 보는 서흔의 눈이 반짝반짝했다.

“아, 우리 술 안 시켜요? 삼겹살엔 소주가 궁합이 찰떡이잖아요.”

“오늘은 별로 안 당기네요.”

“그럼 나만 시킬게요. 이모!”

“당신만? 우리는 이제 일심동체 아닌가.”

서흔이 손을 들기도 전에 건욱이 그녀의 손을 움켜잡았다.

“응? 언제부터 우리가 일심동체였어요?”

“청혼 허락했을 때부터.”

건욱답지 않게 단호한 말투에 서흔의 눈동자가 의아함을 가득 담았다.

그는 옅은 헛기침을 내뱉곤 손수 고기를 뒤집다가 익은 고기 한 점을 그녀의 그릇에 놓았다.

“고기 먹어요.”

“와! 진짜 맛있겠다.”

서흔이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기를 입바람으로 후후 불어가며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입안에 넣었다.

“유서흔, 솔직히 나랑 데이트를 하려고 이곳에 온 게 아니라 삼겹살을 먹으러 온 거죠?”

“일석이조라는 말 몰라요?”

“그래서 어디가 더 비중이 클까.”

“그건 탑 시크릿. 알면 죽어요. 그러니까 묻지 말기. 알았죠?”

서흔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편하게 웃는 그녀의 얼굴을 보니 처음 데이트했던 날의 포근했던 감정이 다시 몽글몽글 올라오는 것 같았다.

“자주 오는 집이라 했던가.”

“네. 한 달에 한 번은 다경이랑 회식하는 장소예요.”

“나랑 오고 난 뒤에도 자주 왔겠네.”

“아니요. 그때 이후 오늘이 처음이에요.”

“왜?”

“음. 당신이 날 기만했다고 오해한 뒤로는 여기 근처만 지나가도 화가 나서요.”

서흔이 미안한 마음에 입술을 물었다.

순수하게 인간으로서의 건욱에게 반하게 되었던 날의 감정과 분위기, 맛까지 모두가 다 완벽했다.

그 완벽했던 것들이 산산조각 났을 때의 상실감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하마터면 삼겹살까지 싫어하게 될 뻔했네요.”

“다행히 그 전에 오해가 풀렸어요. 이제는 여기만 지나가도 당신이 떠올라서 행복한 마음만 가득이고요.”

“그래?”

“네.”

서흔의 대답에 건욱의 얼굴이 자연스레 풀어졌다.

“다음번엔 손다경 씨도 불러서 같이 회식합시다.”

“그럴까요? 안 그래도 다경이랑 한 번 만나게 해 주고 싶었거든요. 두 사람 제대로 인사한 적은 없잖아요.”

매번 다경은 건욱이 오면 자리를 피해 주거나 이야기를 전해 듣는 입장이었다.

건욱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두 사람은 스치듯 인사한 게 거의 전부라 할 수 있었다.

“나중에 날짜를 한번 잡아 봅시다.”

“응, 좋아요. 아, 참. 아까 매장에 임진수 왔었어요.”

서흔이 문득 생각나 그 이야기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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