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7화
아, 이 싸가지.
지난번 화장실에 같이 가 줬던 때만 해도 서흔은 그를 나쁘게만 생각했다고 후회했다. 사실은 노래까지 틀어 줄 정도로 다정한 사람인데 그녀가 오해했다고.
하지만 오늘 보니 그건 그녀의 착각이었던 듯했다.
무슨 수가 뒤틀렸는지 세상 까칠하게 말하는 그를 보니 다시 정이 뚝뚝 떨어졌다.
서흔은 걸음을 옮기지 않고 쓸데없는 말을 지껄인 제 입을 사정없이 때리고 싶었다.
어쩜 다경이는 이런 남자를 좋아할 수가 있는지, 외모라면 그저 오케이하고 보는 그녀의 취향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튼 너 가.”
“오빠가 뭔데 가라, 마라예요?”
“그래서 안 갈 거야?”
가늘어진 그의 눈빛이 우주 밖까지 그녀를 쫓아내고 있었다.
“갈 거야, 갈 건데요. 이건 오빠가 가라고 해서 가는 게 아니고 내가 가고 싶어 가는 거예요. 그거는 확실히 알아 두세요!”
서흔은 흥, 콧대를 세우곤 그에게서 멀어졌다. 건욱은 괜히 멋대로 삐쳐 쿵쿵 발을 구르며 멀어져 가는 서흔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정말 이걸 뽑을 건가.’
자꾸만 심장에 물이 차는 것처럼 먹먹했다. 회화나무는 그에겐 아버지나 다름없었다.
이 나무를 없애 버린다는 건, 이제 이 집안에서 차주태의 모든 것을 없애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
아무리 작은아버지가 줄곧 주장했어도 할아버지만큼은 이 나무를 지켜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건욱은 눈을 꾹 감았다.
다 제가 어린 탓이었다. 아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미성년인 게 잘못이었다.
그의 의견은 물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 어른들이 증오스러웠다.
과학적 근거도 없는 오로지 감언이설로, 이지를 현혹시키는 미신으로 나무마저도 뿌리째 뽑아내려는 어른들이 끔찍했다.
건욱은 다시금 회화나무를 눈에 담았다. 결코, 이 회화나무를 없애려 한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시선을 거둔 채 그 자리를 벗어났다.
* * *
서흔은 침대에 앉아 땅속에 묻혔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 말끔한 일기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괜히 가져왔나. 이걸 어쩌지.”
일기를 읽어 볼 것도 아닌데, 그때 그 오빠를 만나는 바람에 당황하여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갑작스럽게 일정이 미뤄지는 바람에 한참 준비만 하던 아저씨도 시간만 버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똑똑. 노크 소리와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흔아, 잠깐 들어가도 되니?”
“네, 아저씨. 들어오세요.”
“아직 안 잤어?”
“네.”
“너 엄마한테 조경 일 하고 싶다고 했다면서.”
“아. 들으셨어요?”
몇 번 아저씨를 따라 W호텔을 오가며 서흔은 조경 일에 흠뻑 빠졌다. 지금껏 특별한 생각 없이 학교만 다니던 그녀가 처음으로 직업으로 갖고 싶은 일이었다.
자연을 돌볼 수 있다는 건, 생각만으로도 가슴을 설레게 만드는 일이었다.
“응. 그런데 말이야. 아저씨 생각엔 조경 쪽보다는 플로리스트 쪽이 어떨까 싶어서.”
“플로리스트요?”
아저씨는 조곤조곤 그의 생각을 이야기해 주었다. 조경 일이 생각보다 험하다는 것, 남자들의 세계다 보니 여자들이 무시를 당하거나 부당한 취급을 받는 일도 많다는 것, 무엇보다도 아저씨는 딸 같은 서흔이 고생을 조금 덜하면 좋겠다는 것까지.
“당장 마음을 결정하라는 건 아니고 한번 생각해 보라는 거야. 평생의 직업이라는 게 단순히 며칠의 고민만으로 결정할 수는 없잖아.”
“네, 곰곰이 고민해 볼게요.”
“그래. 생각해 봐.”
아저씨가 일어나려는데 서흔이 물었다.
“아저씨, 저 하나만 여쭤볼게요. 그…… 차주태라는 분이요.”
“응.”
“혹시 가족은 없어요? 부인이라든가, 자식이라든가.”
“왜?”
“저 사실은.”
서흔은 아까 우연히 일기장을 찾은 이야기를 간략히 설명했다.
“아무래도 이렇게 땅속에 묻어둔 거면 일부러 그러신 것 같은데, 함부로 제가 가지고 있기가 좀 그래서요.”
“매일 회화나무에 앉아서 책 보고 있던 학생 있지? 그 친구가 대표님의 아들이야. 너랑 잘 지내는 것 같던데, 몰랐어?”
“네? 몰랐어요. 진짜 그 오빠가 아들이에요? 말도 안 돼. 그 대표님이라는 분은 점잖고 신사답다면서요.”
그 오빠는 완전 싸가지에 재수탱이인데. 믿을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잔뜩 구긴 서흔에 아저씨가 껄껄 웃었다.
“아무래도 그 일기장은 그 학생에게 전달해 주는 게 좋겠다.”
“……네, 그래야겠네요.”
“그럼 쉬어.”
아저씨가 방을 나가고 서흔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침대에 누웠다.
아저씨가 거짓을 말할 사람은 아니니 일기장 주인의 아들이 그 오빠라는 건 맞았다.
“하, 씨 괜히 일기장을 파냈네.”
아무래도 그녀의 업보 같았다. 서흔은 깊은 한숨을 쉬며 이불을 뒤집어썼다.
* * *
오늘은 아르바이트를 쉬는 날이었지만 서흔은 아저씨의 도시락을 들고 W호텔로 향했다. 평소 같았으면 도시락 심부름에 또 골이 났겠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계속 그에게 일기장을 전달해 줘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기장을 주운 이후 꼭 해야 할 청소를 안 해서 먼지가 조금씩 쌓여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오늘은 만나야 하는데.”
계속 그녀가 일기장을 보관하고 있을 수만은 없으니 꼭 그가 있기를 바라며 서흔은 언덕을 올랐다.
로비를 지나 A하우스로 들어서니 아직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회화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주변에 있어야 할 그는 보이지 않았다.
“찾으니 없네, 하여간 청개구리 같으니라고.”
서흔은 우선 아저씨에게 도시락을 전달하기 위해 휴대폰을 꺼내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시 휴게실에서 쉬고 있다는 말에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남자가 본관 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저기요!”
그녀의 목소리를 못 들었는지 그대로 걸음을 옮기는 남자에, 서흔은 급하게 뛰어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저기, 내 말 안 들려요?”
“놓고 말해.”
더러운 것이라도 몸에 닿은 것처럼 싸늘하게 말하는 그에, 서흔이 옅은 한숨을 쉬었다.
“내가 불렀는데 못 들었어요?”
“불렀다고?”
“저기요, 라고 불렀잖아요.”
“그 ‘저기’가 나라는 생각은 못 했는데.”
하. 들었는데 그냥 갔다는 거네.
서흔은 깊은 빡침을 느꼈지만 꾹 참았다. 오늘은 좋은 마음으로 왔으니 끝까지 좋은 마음으로 있다가 집에 가고 싶었다.
“차주태 대표님 아들이라고 들었는데, 맞아요?”
“……그건 어디서 들었어?”
건욱의 눈빛이 날카롭게 그녀를 베일 듯이 노려보았다.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요. 그래도 확인해야 해요. 맞아요?”
“……내가 왜 너한테 확인해 줘야 해?”
“맞네요. 파르르 떠는 걸 보니.”
서흔은 옅은 한숨을 쉬며 가방에서 일기장을 꺼냈다.
“받아요.”
“이게 뭔데.”
그의 말을 무시하며 서흔이 입을 열었다.
“이거 오빠 아버지의 일기장 같아요.”
“……!”
놀란 건욱의 눈동자가 둥그레졌다. 아버지의 일기장이라니! 이런 것이 존재하고 있는지조차 몰랐다. 건욱은 마른침을 삼키며 일기장을 건네받아 펼쳐 보았다.
차주태, 라고 정자로 적힌 글자는 그가 종종 보았던 아버지의 글씨체가 맞았다.
떨리는 손으로 한 장, 한 장 조심스레 넘겨보는데 일기의 첫 시작은 건욱의 탄생 이야기였다. 정말 아버지의 일기장이 맞았다.
탁.
건욱이 일기장을 덮고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심장이 미친 듯이 뛰며 머리가 둥둥 울리는 것 같았다.
“너.”
“…….”
뚱한 표정의 여자애가 왜 부르냐는 반항적인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고마워.”
“네?”
소스라치게 놀란 서흔의 입이 쩍 벌어졌다.눈동자가 커다랗게 반짝였다. 건욱은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고맙다고, 정말.”
건욱은 서흔의 손을 잡았다. 작지만 따스한 손을 잡자 그녀의 눈동자가 갈 길을 잃은 것처럼 정처 없이 흔들렸다.
“이 은혜는 꼭 갚을게. 정말 고마워.”
건욱은 다시 한번 아이에게 말을 건넨 뒤, 급하게 자리를 떴다. 당장 이 일기장을 읽어야 된다는 생각에 나중엔 뛰다시피 그 자리를 벗어났다.
“……뭐가 지나간 거지?”
혼자 황망하게 로비에 남은 서흔은 떨리는 제 손을 바라보았다. 방금 덥석 제 손을 잡았던 커다란 손은 너무나 부드럽고, 또 따뜻했다. 자신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 그 얼굴은 마치 왕자님처럼…….
하아.
갑자기 서흔의 얼굴에 열감이 확 퍼졌다. 숨이 막힐 것처럼 쿵쾅거리는 심장에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고마워.’
성우 뺨치는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심장을 사정없이 때리고 있었다. 서흔은 제 볼을 두 손으로 감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