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약혼녀가 아니야 (69)화 (69/74)

에필로그 6화

“저기 귀신 나온대요. 제발 같이 가 줘요.”

“아니, 거긴…….”

건욱이 거절의 말을 하기도 전에 서흔이 건욱을 팔을 잡아끌었다.

“제발……. 나 진짜…….”

이제 서흔의 눈에는 눈물까지 맺혀 있었다.

“바지에…… 쌀 순 없잖아요…….”

서흔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그 얼굴에 건욱은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을 옮겨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10년 동안 한 번도 발을 들여놓지 않았던 이 건물에 여자아이의 손에 잡혀 끌려 들어왔다.

‘이렇게 간단한 일이었나.’

건욱은 빌라 동 안에 들어와 있는 자신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 순간 세상이 무너지지도, 흔들리지도 않았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서흔은 그를 끌고 화장실 앞까지 갔다. 그러고는 급하게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다급하게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와 함께 서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간 거 아니죠?”

“안 갔어.”

“나 두고 가면 안 돼요. 진짜요!”

“아, 알았어.”

건욱이 얼굴을 문지르며 대답했다.

“근데요!”

“왜?”

“귀 좀 막으면 안 돼요? 가지는 말고요! 혹, 혹시 소리가…….”

서흔이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변기 뚜껑을 여는 소리가 다급히 들렸다. 건욱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노래를 재생했다.

♬♪♩♬♪♩♬♪♩♬♪♩♬♪♩♬♪♩

올드 팝송이었다. 아버지가 어머니께 청혼할 때 틀었다는 음악은 건욱이 즐겨 듣는 노래였다.

빈 건물에 커다란 팝송이 한동안 오래도록 울려 퍼졌다.

* * *

서흔은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날의 일은 잊고 싶은 창피한 일이었지만 자꾸만 그가 틀어 줬던 노래가 떠올랐다.

그날 그녀에게 손목을 잡혀 준 그의 팔의 온기와 끝까지 기다려 주던 그의 얼굴도.

“오늘 서흔이가 기분이 좋은가 보네.”

노래를 부르는 듯 흥얼거리면서 계란프라이를 부치는 서흔의 모습을 본 아저씨가 냉장고에서 두부를 꺼내다 슬쩍 지란에게 속삭였다.

“그러게. 며칠 전부터 계속 저 노래를 흥얼거리네요.”

지란이 미소 지었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계란프라이를 하면 계란이 다 타겠어, 안 타겠어?”

냉장고에서 두부를 꺼낸 아저씨가 두부를 썰어 된장찌개에 투하하며 서흔에게 농을 걸었다.

“안 태우거든요. 저 계란프라이 마스터예요, 모르셨어요?”

“어, 몰랐는데. 하지만 한 가지는 정확히 알고 있지. 우리 서흔이가 음치라는 거.”

“뭐라고요?! 내가 왜 음치예요?”

“그 노래는 말이야, 음이 그게 아니거든.”

아저씨가 허밍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서흔은 자신도 모르게 그 노래에 빠져들어 한참 동안이나 노래를 들었다.

“어때, 이 아저씨의 노래 솜씨가.”

“아, 꾹 참고 억지로 듣느라 정말 내 귀가 고생했네요. 어디 가서 절대 노래 잘하신다는 소리 하지 마세요. 아니, 노래의 ‘노’ 자도 꺼내지 마세요. 엄청 실례니까. 아셨죠?”

티격태격하면서도 사이좋게 농담을 주고받는 두 사람의 모습은 어느 누가 봐도 꽤 가까운 사이였다.

지란의 마음이 감동으로 넘실거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흔은 아저씨를 무척 어색해했다. 사춘기의 끝자락에 머무는 딸이 아버지 또래의 낯선 남자와 친해지기 어려운 게 당연했지만 지란은 제 선택에 딸을 희생시키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그런 지란의 걱정은 기우라는 듯이 서흔이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이후 두 사람은 친아빠와 딸처럼 가까워지고 있었다.

“다 됐다, 앉자.”

아저씨가 끓인 된장찌개와 서흔이 만든 계란프라이, 지란이 만들어 놓은 밑반찬들이 합쳐져 소박하지만 푸짐한 아침상이 완성되었다.

“잘 먹겠습니다!”

세 사람이 동시에 외치곤 아침 식사를 시작했다.

“나, 오늘도 나가 봐야 할 것 같아.”

“주말인데요?”

갑작스러운 아저씨의 말에 서흔이 따끈한 된장찌개 국물을 후루룩 마시며 콧잔등을 찡그렸다. 지란도 의아한지 입을 열었다.

“오늘은 원래 쉬기로 한 날 아니었어요?”

“그랬는데. 미안해, 여보.”

“미안하긴요, 갑자기 호텔에 무슨 일 생긴 거예요?”

“A하우스 조경을 빨리 마무리해야 해서 안 그래도 일정이 촉박한데 갑자기 나무를 뽑으라고 하지 뭐야.”

“어떤 나무를요?”

서흔이 고개를 들었다. 혹시, 라는 생각에 귀가 번쩍 뜨였다.

“A하우스에 있는 회화나무.”

놀란 서흔이 물었다.

“그 나무를 왜 뽑아요?”

“소문을 듣자니, 얼마 전에 조용히 굿을 했다나 봐. 무당이 그 나무에 돌아가신 차주태 대표님의 혼이 붙어 자꾸 W호텔의 성장을 막는다고 했다고 나무를 치워 버려야 한다는 거야. 완전 헛소리지. 그 대표님만큼 W호텔에 헌신적인 분이 없었는데.”

아저씨는 쯧쯧, 아쉬운 마음에 혀를 찼다.

“우리야 뽑으라니 뽑아야겠지만 그렇게 오래 산 나무를 함부로 그러면 안 되지. 보호수로 지정해도 모자랄 판에.”

“차주태 대표님이 살아 계셨으면 무척 속상해하셨겠어요.”

지란도 그 나무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러게.”

아저씨는 차주태의 집 정원에 있던 회화나무를 관리하며 처음 그를 만났다.

회화나무는 좁은 면적에 뿌리가 많이 상해 있었다. 크게 자라려면 뿌리가 넓게 뻗을 수 있는 큰 터가 필요했다.

그의 의견에 따라 차주태는 W호텔의 상징과도 같은 A하우스로 회화나무를 옮기기로 결정했다.

그때 차주태와의 인연으로 그는 지금까지도 W호텔의 조경 작업을 이어오고 있었는데 그 시작이었던 회화나무를 벌목해야 한다니 씁쓸할 수밖에 없었다.

“……아저씨, 저도 같이 가도 돼요? 방해 안 하고 그냥 멀리서 지켜보기만 할게요.”

서흔이 조심스레 물었다. 단숨에 그녀의 마음을 온전히 빼앗아 버린 회화나무의 마지막을 지켜보고 싶었다.

“그래, 같이 가 보자.”

“감사해요, 아저씨.”

서흔은 먹먹한 마음을 애써 누르며 수저를 놀렸다.

* * *

오늘 W호텔은 주말이라 그런지, 나무 뽑는 일 때문인지 무척 분주했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가운데 서흔은 조용히 서서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크기 위해 몇십 년, 아니 몇백 년의 세월이 필요했을 나무의 마지막이 오늘 하루에 끝난다는 생각에 허무한 마음이 들었다.

‘기분이 어떨까…….’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서흔은 고개를 떨구었다. 코끝이 찡해지며 눈언저리가 뜨거웠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입술을 깨물며 감정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는데 무언가 이상한 게 눈에 들어왔다.

‘뭐지…….’

작은 비닐 같은 것이 땅에서 불뚝 솟아 올라와 있었다. 끌리듯 다가가 자세히 바라보니 그 부분만 흙을 파낸 흔적이 있는 것처럼 주변의 것과 색이나 명암이 달랐다.

서흔은 모종삽을 찾아와 조심스레 슬슬 파 보았다. 처음엔 아무것도 없는 것 같더니 조금 더 깊이 파 보니 무언가 삽에 툭 하고 걸렸다.

‘뭔가 있어.’

서흔은 알 수 없는 확신을 가지고 삽으로 주변을 에둘러 팠다. 삽에 비닐이 걸려 찢어졌다.

‘역시!’

비닐은 작은 상자를 보호하듯 꽁꽁 감싸고 있었다.

서흔은 급한 숨을 몰아쉬며 삽을 내려 두고 손으로 주변 흙을 팠다. 모서리만 보였던 상자가 점차 완연한 모습을 드러냈다.

타임캡슐처럼 몰래 숨겨둔 것 같은 작은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 있을지 궁금했다.

땅속에서 완전히 상자를 꺼낸 서흔은 흙 묻은 손을 대충 털어 내고 그 자리에 털썩 앉았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상자를 열자 그곳에는 오래되었지만 관리가 잘된 가죽 표지의 노트 한 권이 있었다.

‘이걸 열어 봐도 될까…….’

어떤 내용이 담긴 노트인지도 모르는데 마음대로 봐도 될지 살짝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이왕 파낸 거 주인이라도 찾아 주려면 확인은 해 봐야 했다.

서흔은 조심스레 노트를 열어 스르륵 살펴보았다. 맨 앞장에는 ‘차주태’라는 이름이 적혀 있고 노트 안에는 날짜와 함께 간단한 줄글이 적혀 있었다. 아저씨가 이야기했던 ‘차주태’의 일기장인 듯했다.

서흔은 차마 남의 일기를 읽어 보기가 껄끄러워 일기장을 덮었다.

“이걸 어떻게 하지.”

“뭘 어떻게 해?”

“앗, 깜짝이야!”

갑자기 들려온 낮은 음성에 서흔이 뒤로 넘어갈 듯 숨을 멈췄다. 고개를 들어 보니 그 남자였다. 항상 이 회화나무를 전세 놓은 듯이 누워 있던 싸가지.

“뭔 나쁜 짓을 했길래 그렇게 놀라?”

“나쁜 짓 한 거 없거든요!”

“없기는. 손에 든 건 뭔데?”

“……몰라도 돼요.”

서흔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엉덩이에 묻은 흙을 탈탈 털었다. 소중한 것을 숨기듯 일기장을 제 품에 안은 채였다.

그녀는 발걸음을 돌리려다 건욱에게 입을 열었다. 항상 이곳 아래 누워 있던 그가 소식을 알고 있을지 궁금했다.

“이제 여기 누워서 책 못 보겠네요. 오늘 나무 뽑는다고 하던데.”

“오늘 아니야.”

싸늘한 표정의 건욱이 회화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일주일 미뤄졌어.”

“그래요? 왜요?”

“내가 일일이 너한테 그런 것까지 알려 줘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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