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5화
고등학생이 되고 처음 맞는 여름 방학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알바 한다고?”
“응. 내일부터 아저씨 따라서 일 한번 배워 보고 싶어. 나무랑 꽃 만지는 거 해 보고 싶었거든.”
일주일 전에 보았던 A하우스의 전경과 나무를 잊지 못했다. 아저씨가 알려 주어 그 나무 이름이 회화나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흔은 계속해서 그 회화나무가 떠올랐다. 눈을 감으면 하얀 꽃이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
[아저씨, 부탁이 있는데요……. 저 방학 동안 아저씨 일하시는 데 따라다니면 안 될까요? 일 배워 보고 싶은데.]
처음 꺼낸 서흔의 부탁을 아저씨는 흔쾌히 들어주었다.
“나도 알바 하고 싶다.”
다경은 이번 여름 방학 동안 영수 방학 특강에 매인 몸으로 아르바이트는 꿈도 꿀 수 없었다.
“나도 호텔 또 가고 싶단 말이야. 그 오빠도 보고 싶고.”
“그 오빠?”
“김치 국물 오빠.”
“아, 그 재수탱이.”
다경의 말에 서흔은 제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고 가던 남자의 등이 떠올랐다.
“그 재수탱이가 오빠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내가 검색해 봤는데 그 교복, 하람고 교복이래. 공부 진짜 잘하나 봐.”
“그래서?”
“우리보다 어리지는 않다는 거지. 그리고 네가 뭘 몰라서 그러는데. 그렇게 잘생기면 다 오빠야.”
서흔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금사빠인 다경이 그날 사랑에 빠졌다는 걸 보지 않아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가면 또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어떻게 다시 만나. 호텔에서 사는 사람도 아니고. 그게 가능하겠냐?”
하루, 이틀 머물다 떠나는 곳이 호텔 아니었던가.
“잊어. 다시 만날 일 없으니까.”
서흔은 호언장담했다. 그런데 그 말을 내뱉고 하루도 지나지 않아 남자가 떡하니 눈앞에 나타났다.
그는 여전히 회화나무 아래 누워 있었다. 책을 읽는 건지, 자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그 남자인 건 확실했다.
방학이라 그런지 김치 국물이 묻은 교복이 아닌 사복을 입고 있었다.
서흔은 교복은 괜찮은지 묻고 싶었지만 차갑던 그의 얼굴이 떠올라 몸을 돌렸다.
하지만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남자는 회화나무 아래 누워 있었다.
아르바이트를 다녀온 서흔은 다경과 빙수를 먹으며 며칠째 마주치는 남자에 대해 이야기했다.
“대체 뭐하는 사람이지?”
“장기 투숙객 아닐까? 호텔에 오랫동안 사는 사람들도 있대.”
서흔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비싼 호텔에 오랫동안 숙박하다니. 서흔이 심각하게 호텔비는 얼마나 나올까 고민하는데 다경이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배배 꼬며 말했다.
“있잖아…….”
“왜 이래 무섭게.”
“나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안 돼!”
서흔이 단번에 거절했다. 다경이 이렇게 나올 때 정상적인 부탁은 한 번도 없었다.
“내가 학원을 빠질 수 있으면 너한테 이런 부탁 하지도 않아. 학원 결석하면 나, 바로 죽음이야. 출결 바로 엄마한테 문자 가는 거 너도 알지. 거절 없어. 이거 전해 줘!”
서러움이 폭발한 다경이 다짜고짜 서흔의 손에 가방에서 꺼낸 편지를 쥐여 주었다.
“이거, 설마…….”
“맞아. 네가 생각하는 그거. 러브레터! 그 오빠한테 전해 줘.”
“뭐? 러브레터? 언제 봤다고 러브야? 몇 번 봤다고 러브냐고!”
“러브에 횟수가 뭐가 중요해? 순간이 중요한 거지. 나, 첫눈에 그 오빠한테 반했어.”
서흔이 고개를 흔들며 편지를 놓으려 했지만 다경의 악력은 당해 낼 수가 없었다.
“거절하면 우리 절교야.”
“야!”
“나 그만큼 진지해. 그러니까 부탁할게.”
다경은 단호한 어조로 서흔의 손에 편지를 꼭 쥐여 주었다.
* * *
다음 날, 아저씨를 따라 A하우스로 향한 서흔은 반바지 주머니에 편지를 넣고 앞치마를 둘렀다.
그러고는 돌길을 수정하는 인부 아저씨들 옆에서 잡초를 뽑았다. 밀짚모자를 쓰지 않았다면 얼굴이 발갛게 익을 만큼 더운 날씨였다.
아저씨가 잠시 회화나무 아래 가서 더위를 식히고 오라고 했지만 서흔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그를 만날 용기도, 편지를 전해 줄 용기도,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음이 찝찝했다. 숙제를 하지 않은 다음 날처럼 점심도 제대로 넘어가지 않았다. 체한 것처럼 가슴이 갑갑했다. 배도 살살 아픈 것 같았다.
하지만 어느새 해가 기울었고 작업이 끝났다. 인부 아저씨들이 돌아가고 아저씨는 호텔 관계자와 미팅을 하러 갔다.
아저씨를 기다리는 사이 서흔은 하는 수 없이 회화나무 아래로 다가갔다. 미룰 수 있을 만큼 미뤘지만 더 이상 미룰 시간이 없었다. 어서 해치우고 집에 가고 싶었다.
어쩌면 그가 돌아갔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회화나무 아래 도착했을 때였다.
누워 있던 남자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저번에도 느꼈지만 그는 꽤 키가 컸다. 그리고 다경의 말처럼 엄청 잘생겼다. 꼭 텔레비전에 나오는 배우 같았다.
남자와 서흔의 눈이 마주쳤다. 서흔이 어색하게 손을 들어 인사를 했다. 하지만 그는 인사를 받지도 않고 서흔을 지나쳤다.
“저기요.”
건욱이 자리에 서며 뒤를 돌아봤다.
“왜?”
잘생기면 뭐 해. 싸가지가 없는데. 저번에도 느꼈지만 그는 참 싸가지가 없었다.
“그, 그 교복은 어떻게 됐어요? 김치 국물 묻은 교복이요.”
“버렸어.”
“헐!”
비싼 교복을 버렸다는 그에 서흔은 놀란 얼굴로 입을 벌렸다.
“김치 국물 못 뺐으면 가져오지. 내가 빨아다 줄 수 있는데.”
“네가 어디 사는 줄 알고 그걸 가져와.”
“그러니까 여기로…….”
“다시 만날지는 어떻게 알고.”
“그건 그렇네요……. 아무튼 미안해요.”
서흔은 지갑을 찾기 위해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자신 때문에 교복을 버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냥 지나칠 순 없었다.
“교복 얼마에요?”
저번 주에 아저씨가 주신 알바 비로 가능할까 생각하며 손을 끄집어내는데 다경의 편지가 딸려 올라왔다.
가만히 서흔을 보고 있던 건욱의 눈동자가 흥미로운 듯 반짝거렸다. 건욱이 서흔의 손에 들린 편지를 낚아챘다.
“교복값은 미끼고 목적은 고백이야?”
헉! 서흔은 그의 손에서 나풀거리는 편지를 보여 숨을 삼켰다.
“아, 아니에요. 그건, 그러니까…….”
“손다경. 네 이름이야?”
서흔이 강력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난 손다경이 아니에요. 그건 내 친구가 전해 달라고 한 거예요.”
건욱의 눈이 가늘어졌다. 러브레터를 한두 번 받아 본 것도 아니고.
그의 차가운 반응을 본 여자애들 열에 아홉은 친구가 전해 달라고 했다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서흔은 그가 전혀 그녀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억울하고 억울한 서흔이 입을 열었다.
“진짜예요. 우리 지난번에 마주쳤을 때. 그러니까 오빠 발에 내가 걸려서 넘어져 가지고 도시락 쏟아서 교복에 김치 국물 흘린 그날 말이에요. 나랑 같이 있던 여자아이 못 봤어요?”
“…….”
“내가 휴대폰 들고 사진 찍고. 이렇게 저렇게 포즈 취하던 여자아이인데 생각 안 나요?”
“…….”
“그러니까 키는 나보다 이만큼 더 크고요. 머리는 단발인데 앞머리 없고, 나랑 똑같은 교복 입었고. 얼굴은 좀 까무잡잡하고 예쁘게 생긴 아이인데. 기억 안 나요?”
건욱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기억 안 난다고요?”
단호한 끄덕임에 서흔은 힘이 빠졌다.
“아무튼 나 아니에요. 진짜, 나 아니에요. 나는 오빠한테 진짜 하나도 관심 없고요. 그런데 오빠 맞아요? 나 열일곱 살인데 몇 살이에요?”
“열아홉.”
“그래요. 오빠 맞네. 아무튼 이 편지는 다경이가 전해 달랬어요. 그러니까 오해하면―”
꾸르륵. 열심히 변명을 하던 그때였다. 갑자기 서흔의 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점심때부터 살살 아픈 배가 요란한 신호를 보내왔다.
“왜 그래?”
“여, 여기 화장실이…….”
꾸르륵.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서흔이 빌라 동을 보다가 다시 본관을 바라보았다. 본관까지는 참을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오랫동안 비어 있던 빌라 동으로 혼자 갈 순 없었다. 거긴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돌았다. 매번 아저씨가 같이 가 주시곤 했는데 지금은 아저씨가 옆에 없었다.
거기다 점점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화장실은 저기 본관으로 가면 돼.”
건욱은 그 말을 뒤로한 채 몸을 돌렸다. 하지만 턱 하니 서흔이 붙잡은 손목에 다시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거기까지……. 못 가요.”
“그래서.”
“화장실 같이 가 주면 안 돼요?”
서흔이 빌라 동을 보며 말했다. 꾸르륵. 급한지 얼굴에 식은땀이 방울방울 맺히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