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4화
10년 전.
“와! 드디어 끝이다!”
서흔과 다경은 서둘러 교문을 벗어났다. 오늘은 기말고사를 끝낸 기념으로 서흔의 집에서 밤새 영화 보기로 작정한 날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계획은 서흔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서흔의 엄마, 지란이 그들의 앞길을 막아섰기 때문이었다.
서흔과 다경은 교복도 갈아입지도 못한 채 W호텔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와! 나 W호텔 처음 가봐. 완전 설레.”
“다경이, 너는 참 긍정적이다.”
“넌 왜 그렇게 반항적인데?”
반항이라는 두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진 서흔의 이마를 다경이 꾹꾹 눌렀다.
“아저씨가 어린애야? 점심 한 끼 정도 아무거나 먹을 수 있잖아. 꼭 도시락을 가져다줘야 해? 내가 뭐 놀아?”
“놀잖아. 우리 오늘 밤새 놀기로 했잖아.”
“야!”
파르르 떠는 서흔에 다경이 어깨를 토닥이며 그녀를 달랬다.
“간단한 심부름인데 뭐.”
“어쨌든 너까지 갈 일은 아니니까.”
서흔은 창피했다. 직원 식당의 밥값도 아까워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니는 아저씨나, 싸 주는 엄마나, 이렇게 김치 냄새가 폴폴 나는 도시락을 들고 있는 자신도.
“괜찮아. 뭐 어때. 이런 기회가 아니면 우리가 언제 호텔에 가 보겠어. 나 완전 궁금했단 말이야.”
다경이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서흔은 그녀의 웃음에 붉어진 마음을 숨기며 고개를 돌렸다.
엄마와 아저씨가 재혼한 지 3개월이 지났다. 계절은 봄에서 어느덧 한여름으로 바뀌어 있었다.
서흔을 혼자 키우느라 고생하던 엄마는 재혼 후 편안해 보였다. 하지만 서흔은 아직도 아저씨가 어색하기만 했다.
조경 관련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아저씨가 W호텔로 일주일째 출근 중이라는 것도 오늘에서야 알게 됐다.
언덕을 오른 버스가 정류장에 정차했다. 버스에서 내린 서흔은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길게 신호음이 이어지고 아저씨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서흔아?
서흔의 전화가 반가운지 격양된 목소리가 휴대폰을 타고 넘어왔다.
“……엄마 심부름 왔는데요.”
-심부름?
“도시락 가져다 드리래서요.”
-아! 도시락을 잊어 버렸구나. 그것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야? 오늘 기말고사 끝났을 텐데. 미안하네.
미안해 어쩔 줄 몰라 하는 아저씨의 얼굴이 목소리만으로도 상상이 되었다. 서흔이 아저씨를 어색해하는 만큼 아저씨도 서흔을 어려워했다.
“지금 호텔 앞 버스 정류장인데요. 어디로 가면 돼요?”
-어……. 거기서 바로 보이는 건물이 호텔 본관인데. 그 건물을 가로질러 나오면 본관이랑 빌라 동 사이에 A하우스라고 있거든. 그곳으로 오면 돼.
“네. 알겠어요.”
-잘 모르겠으면 호텔 직원들한테 물어 봐. 아저씨가 데리러 가고 싶은데 지금 움직일 수가 없어서.
“네. 걱정 마세요.”
서흔은 전화를 끊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커다란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가자.”
서흔와 다경은 호텔로 향했다. 회전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자 커다란 로비가 나타났다. 넓고 넓은 로비는 출입구도 여러 곳으로 나 있어 어느 곳으로 나가야 A하우스로 가는지 찾기 어려웠다.
몇 번 직원들을 붙잡고 묻고 나서야 두 사람은 A하우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와! 여기 뭐야?”
호텔 여기저기를 고양이 같은 눈망울로 살펴보고 다니던 다경이 감탄했다.
다른 곳도 화려하고 아름다웠지만 꽃과 나무가 어우러진 야외 정원은 그 깊이가 달랐다.
나무를 따라 올라간 넝쿨 식물은 연주황 꽃을 피우고 있었고 푸른 초록의 나무들은 햇볕을 받아 더욱 싱그럽게 빛났다.
가장 장관은 A하우스 옆에 자리 잡은 커다란 나무였다. 오랫동안 자라온 듯한 키가 큰 나무는 한겨울의 눈을 맞은 것처럼 하얀 꽃이 가득 피어 있었다.
“이 나무 멋있다. 꼭 눈 온 것 같지 않아?”
“어……. 진짜 아름다워.”
서흔은 고개를 끄덕이며 높은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하얀 꽃들이 눈처럼 쏟아져 내릴 것 같았다. 나무가 그녀의 눈을 앗아간 것처럼 눈길을 떼기 어려웠다.
“서흔아. 나, 사진 찍어 줘.”
이런 건 꼭 사진으로 남겨야 한다며 다경이 포즈를 잡기 시작했다. 서흔은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 주었다.
“이쪽에서도 찍어 줘. 사선으로 아래에서 위로. 꽃도 같이 나오게.”
“오케이.”
서흔이 각도를 잡기 위해 휴대폰을 들고 뒷걸음질 쳤다. 나무 둘레를 돌며 휴대폰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는데 덜컥 발에 무언가 걸렸다. 서흔이 그대로 벌러덩 뒤로 넘어졌다.
“악! 안 돼!”
서흔은 휴대폰을 꼭 쥐었다. 아직 할부도 많이 남은 휴대폰이 박살 났다간 엄마가 그녀를 가만두지 않을 터였다.
쿵! 소리와 함께 서흔이 자빠졌다.
“서흔아!”
놀란 다경이 다가오다 급히 걸음을 멈췄다. 동공 지진이 난 그녀의 눈동자가 서흔과 서흔의 뒤를 오갔다. 다경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괘, 괜찮아?”
“어…….”
서흔은 대답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넘어진 이후 정신이 없었다.
“다행히 휴대폰은 무사해!”
서흔은 손에 꼭 쥐고 있는 휴대폰을 흔들었다. 하지만 다경의 시선은 여전히 서흔의 뒤를 향해 있었다.
“괜찮으세요?”
“비켜.”
낮은 목소리와 함께 커다란 손이 그녀의 팔을 잡고 옆으로 밀었다. 털썩 바닥에 엉덩이가 닿았다.
“앗!”
그제야 서흔은 자신이 남자의 다리에 걸려 그 위로 넘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덧없이 흔들리는 다경의 눈동자는 자신 때문이 아니라 뒤의 남자 때문인 것 같았다.
“……!”
건욱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무슨 봉변인가 싶었다.
어쩐지 아침부터 일진이 좋지 않았다. 학교를 땡땡이치려다 최 실장에게 잡혀 억지로 학교에 끌려간 것부터가 시작이었다.
하필 기말고사 기간이라 시험지는 백지를 내고 도망쳤다. 도망쳐도 갈 곳은 없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백지 소식을 들은 이 집사의 잔소리를 한 바가지 들어야 했다.
겨우 도망 나와 회화나무 아래 누웠다. 이곳에 누워 책을 읽는 건 그의 유일한 취미이자 숨구멍이었다.
하지만 책을 읽다 잠시 깜빡 잠든 게 잘못이었을까.
갑자기 몸을 짓누르는 무게에 놀라 잠에 깬 그의 위에 어떤 여자아이가 앉아 있었다.
‘이건 또 뭐야.’
부드럽게 자신을 내리누르는 몸에 건욱은 여자아이를 옆으로 밀어 버렸다.
“하…….”
건욱이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서흔은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소년을 지나 어른 그 어느 사이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처럼 교복을 입고 있는 걸로 보아 고등학생 같았다. 서흔의 눈이 얼굴부터 시작해 그가 입고 있는 교복을 천천히 훑었다.
어느 학교인지 짐작해 보려던 눈빛이 바로 당황으로 물들었다.
“헉!”
“흡!”
서흔과 다경이 동시에 숨을 들이마시며 입을 막았다. 두 사람의 반응에 건욱의 얼굴이 아래로 내려갔다.
그의 하얀 교복 상의에 빨간 김치 국물이 번져 있었다. 마치 핏자국처럼.
서흔은 놀라 들고 있던 도시락 가방을 보았다. 뚜껑이 꽉 닫히지 않았는지 김치 국물이 새어 나와 그녀의 교복 상의와 하의도 물들이고 있었다.
“미, 미안해요. 다, 닦아 줄게요.”
당황한 서흔이 말을 더듬었다. 그녀는 휴지나 손수건이 있나 가방을 뒤졌지만 그런 게 들어 있을 턱이 없었다. 처음부터 갖고 다니지 않았으니까.
“다, 다경아? 휴지 없어?”
“어, 없는데…….”
다경도 말을 더듬었다. 그만큼 붉게 번진 김치 국물은 충격적이었다.
서흔은 벌떡 일어나 맨손으로 남자의 상의에 손을 댔다. 김치 국물을 지워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만지지 마.”
“하지만.”
김치 국물은 세탁해도 잘 안 빠질 텐데.
서흔은 입술을 깨물었다.
단 두 벌밖에 없는 교복 여름 상의는 하나가 망가지면 절망이다. 그건 그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빨리 빼야지 아니면 안 지워진단 말이에요. 우선 화장실로 가요.”
서흔의 머릿속엔 당장 옷을 벗어 손빨래를 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커다란 나무 뒤쪽으로 건물이 보였다. 그 안에 화장실이 있을 거란 생각에 서흔은 무작정 남자의 손목을 잡았다. 그가 이끌리듯 움직였다.
“…….”
건욱은 잡힌 손목을 바라보았다. 빼려면 쉽게 뺄 수 있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가만히 따라갔다. 왜인지 그도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괴이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들자 시커멓게 입을 벌리고 있는 빌라 동이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가 사라졌던 빌라 동이.
오랫동안 비워져 있는 빌라 동은 일하는 인부들만 화장실 이용을 위해 사용하는 건물이었다.
건욱은 갑자기 목이 졸리는 기분이 들었다.
“됐어. 필요 없어.”
그가 거칠게 서흔의 손을 떼 버렸다. 그러곤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아, 아니 옷 빨아 준다니까요!”
됐다는 듯 그는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나중에 딴소리하기 없기에요!”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는 사람의 뒤에 대고 서흔이 소리쳤다. 건욱은 그저 뚜벅뚜벅 걸어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