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3화
-건욱 씨. 출근 잘했어요?
“응. 가게 오픈 했습니까?”
-네. 이제 막 가게 들어왔어요.
“그럼 가게 들어가자마자 내 생각이 난 건가. 떨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간지러운 말들을 쏟아 내는 건욱에 도 실장은 입을 꾹 다문 채 조용히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오늘 아침에 보니까 당신 손목시계를 두고 갔더라고요.
“그랬나.”
-네. 저번에도 그러더니. 잘 챙겨야죠.
“챙길 정신이 어디 있어? 당신 안을 때마다 풀기 바쁜데.”
-으아, 아침부터!
“아침부터 뭐?”
-그런 야한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시계 풀어 놓는 게 야하다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 진짜!
부끄러움과 당했다는 생각이 뒤섞여 씩씩거리고 있을 서흔을 떠올리며 건욱이 웃었다.
매번 관계를 가질 때마다 풀어 놓는 시계는 어느 순간부터 그녀의 집에 들어서자마자 풀어 두는 일이 잦아졌다.
그렇지 않고선 저녁이고 아침이고 시도 때도 없이 그녀를 안을 때마다 너무 거추장스러웠다.
“당신이 내 시계 좀 챙겨 줘요.”
-나도 챙겨 주고 싶은데 아침엔 정말 너무 힘들다고요.
오늘도 그가 나가는 순간까지는 겨우 눈을 뜨고 있었지만 문이 닫히는 순간, 지친 듯 쓰러져 잠든 그녀였다.
“유서흔이 이렇게 체력이 약한지 몰랐어.”
-나도 원래는 체력 하면 자신 있던 사람이었거든요!
“그래?”
처음 듣는 소리라는 듯이 건욱의 목소리에 놀리듯 웃음기가 묻어났다.
-당신만 자고만 가면 내가 맥을 못 추는 거라고요. 밤에도 잠을 푹 못 자고 하니까.
“행복하다는 소린가? 당신 애인이 힘이 넘쳐서?”
-하아. 내가 말을 말아야지.
서흔의 깊은 한숨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아마도 얼굴이 잔뜩 붉어져선 손부채질로 열기를 쫓으려 부산히도 움직이고 있을 터였다.
“또 안고 싶다.”
-으, 짐승!
“그 짐승에게 매달려 헐떡이던 사람 누구더라?”
-아니, 회사에서 이렇게 음담패설 늘어놓아도 되는 거예요?
“응. 돼. 내가 대표니까.”
-와, 이 뻔뻔함.
“말했잖아. 당신이 이유라면 어떠한 일도 할 용의가 있다고. 이런 달콤한 말쯤이야.”
-너무 진지하게 말해 주지 말래요? 진짜 그럴 것 같아 걱정된단 말이에요.
“난 언제나 진지해요. 알잖아요. 유서흔에게 진지하기만 한 남자인 거.”
-알죠.
“오늘 저녁에 끝나고 밥 먹읍시다.”
-오늘 일찍 퇴근할 수 있어요?
“최대한 해 보고. 안 되면 야식으로 변경?”
-난 야식 좋아해요. 그러니까 괜히 무리하지 말고요. 알았죠?
“응. 알았어요. 사랑해.”
-……나도요.
수줍게 속삭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건욱은 허전한 손목을 손으로 훑었다. 이제 이 손목을 볼 때마다 유서흔이 떠오르게 생겼다.
“미치겠네, 진짜.”
건욱은 웃음을 터트리며 결재 서류를 펼쳤다.
* * *
“손다경, 요새 일 없는데 너무 자주 나오는 거 아니야? 나 이런다고 월급 못 줘.”
서흔은 오늘도 말없이 출근한 다경을 보며 말했다.
“알아. 누가 돈 때문에 나오니? 이제 너 결혼하면 자주 못 볼 것 같으니까 아쉬워서 그런 거지.”
“나 결혼하는 거지 죽으러 가는 거 아니거든? <플로라유>도 계속할 건데.”
“차건욱 씨가 <플로라유> 계속해도 된대?”
“이게 허락받아야 하는 일이야?”
“차건욱 와이프로 네가 사회생활을 하는 것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는 거지. 현실적으로.”
“현실적으로?”
“응. 차건욱 씨는 우리와 살던 세상이 다르잖아. W호텔 대표의 부인이 작은 꽃집을 운영한다, 여기까진 괜찮아도 대표가 부인한테 외주를 주었다? 그건 좀 꼬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어. 그건 고대로 차건욱 씨에게 마이너스가 될 거고.”
“아! 외주. 그건 네 말이 맞다. 건욱 씨와 얘기 한번 해 봐야겠네.”
다경의 말이 일리가 있었다. 서흔은 결코 <플로라유>를 접을 생각은 없지만, 외주 작업은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했다.
“어쨌든 반지나 다시 보여 줘 봐. 어쩜 이 반지는 보면 볼수록 이렇게 예쁘니.”
다경은 서흔의 손가락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반지를, 이렇게 보고 저렇게 보면서 끝없이 감탄했다.
“다경아, 나 좀 민망해.”
서흔은 부끄러움에 자꾸만 오그라드는 손을 숨기고 싶을 지경이었다.
다경은 서흔이 프러포즈 받고 온 후부터 그녀의 반지에, 그들의 사랑에 지극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하여간, 유서흔 너도 참. 남들은 자랑하지 못해 안달일 텐데. 뭘 그렇게 부끄러워해?”
“그냥. 상황이 복잡했으니까. 이렇게 행복해도 괜찮은 걸까. 자꾸 그런 생각이 들어.”
마냥 행복해하기엔 마음이 불편했다.
“차민협과의 약혼은 해프닝이었다고 잘 마무리됐잖아. 건욱 씨가 알아서 잘 처리했는데 복잡할 게 뭐 있어.”
W호텔에서의 차민협과 서흔의 만남은 패션쇼 프로젝트 계약을 위한 공식 미팅이었다고 해명되었다.
몇몇 약혼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선물과 함께 메시지가 전달됐다. 내용은 정중했지만 안에 담긴 경고는 분명했다.
“하지만 차 회장님이나 집안 어른들은 이해하시긴 힘들 거야. 그래서 너무 죄송하고. 건욱 씨한테는 미안하고 그래.”
소식을 전해 들은 차 회장은 거품을 물었다고 했다. 당장이라도 서흔을 찾아와 야단할 것 같던 차 회장은 건욱의 철저한 보호로 그녀에게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차 회장이 그녀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지는 뛰어난 상상력이 없어도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이게 옳은 선택인가 싶기도 하고.”
“당연히 옳은 선택이지. 여러 가지 사건들이 얽혀 들었지만 결국은 이렇게 맺어질 인연이었던 거야. 난 솔직히 신기하고 놀랍기만 하다. 이게 보통 인연이니?”
인연. 맞다. 두 사람은 인연이었다.
스쳐 지나가 완전히 기억 속에 묻혀 버렸던 건욱이 10년 후 다시금 튀어나와 이제는 그녀의 미래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다경아. 너, 17살 때 첫눈에 반했었던 그 오빠 기억나?”
“갑자기 고릿적 이야기는 왜 꺼내고 그래? 17살이면 10년 전인데 내가 기억을 할까?”
금방 사랑에 빠지기로 유명했던 다경은 사랑에 빠지는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사랑에서 빠져나왔다.
“왜 우리 그때 W호텔에 엄마 심부름 갔다가 마주쳤던 잘생긴 오빠 있잖아. 기억나?”
“아!”
다경이 무언가 떠오른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기억났다. 나 그때 그 오빠 때문에 무척 서글프고 안 좋았는데. 유서흔 씨, 좋고 행복했던 기억도 많은데 굳이 이제 와서 그 아팠던 기억을 끄집어내는 이유가 뭘까요?”
“그 오빠가 건욱 씨야.”
“뭐?!”
투덜거리던 다경의 눈동자가 커졌다.
“말도 안 돼! 정말 그 오빠가 차건욱 씨라고? 진짜야?”
“응. 진짜야.”
그 시절의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 반갑고 놀라운 서흔과 달리 다경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오 마이 갓!! 서흔아, 차건욱 씨 말이야. 설마 그때 일 기, 기억하는 건 아니겠지?”
“뭘?”
“네가 대신 전해 줬던 내 러브레터 말이야.”
“아! 그런 일도 있었지? 나 완전히 새까맣게 잊고 있었어. 다경이, 네가 러브레터 하나는 진짜 끝내주게 잘 썼는데. 왜, 너 애들한테 천 원씩 받고 대신 써 주기도 했잖아.”
그때의 기억의 새록새록 솟아나 서흔은 웃음을 터트렸다.
“야, 너는 지금 이 상황에 웃음이 나와? 난 지금 목이 졸리는 기분인데!”
다경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뭘 그렇게까지 생각해, 학창 시절에 흑역사 하나 없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와, 유서흔 돌려 까기 솜씨가 아주 많이 늘었네. 그러니까 지금 내가 그때 차건욱 씨한테 러브레터 준 게 흑역사라는 거야?”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고. 건욱 씨도 딱히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으니까 크게 신경 쓰지 말라는 거지.”
“그래? 확실해? 건욱 씨, 기억 안 난대?”
“그렇지 않을까?”
건욱은 그녀가 주었던 일기장 이야기만 했었다. 서흔조차도 다경이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는 완전히 잊고 있던 해프닝이었다.
“‘그렇지 않을까?’ 이건 모른다는 소리잖아.”
“…….”
솔직히 아리송했다. 건욱이 과거의 일 중 어느 한 조각만 기억하지 못할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별다른 말이 없으니.
“내가 슬쩍 물어볼게. 기억하나, 안 하나.”
서흔이 휴대폰을 꺼내려 하자 다경이 손을 내저었다. 다경은 크게 한숨을 푹 쉬더니만 이내 체념했다.
“아냐, 됐어. 그냥 모른 척하는 게 가장 속 편해. 기억해도 어쩔 거야, 이미 지나간 일인데. 이제 와 바꿀 수도 없고.”
“……다경아, 그렇게 흑역사는 아니야. 우리 그때 엄청 재밌었던 것 같은데.”
“너는 러브레터 전달만 해서 그런가 보다. 나는 그거 써서 대차게 차일 때까지 얼마나 마음이 조마조마했었는데. 아휴.”
“나도 전달하기만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딱히 좋은 기억은 아니었던 것 같아.”
“왜?”
“그때의 건욱 씨는 몇 달 전 다시 만났을 때보다 훨씬 싸가지가 없었거든.”
서흔은 자연스럽게 처음 건욱을 만났던 10년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