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2화
호텔에 들어와 키를 받고 스위트룸으로 올라가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문이 닫히자마자 누구랄 것도 없이 동시에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키스하고 싶어 죽는 줄 알았어.”
“키스는 어제도 했잖아요.”
“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못 했잖습니까.”
입술이 자비 없이 빨리며 타액이 뒤섞였다. 깊이 쏟아지는 숨결에 서흔은 어지러웠다. 그녀는 그의 목에 제 팔을 걸며 그에게 매달리듯 발끝에 힘을 주었다.
입술이 뜯겨 나갈 것처럼 강렬한 키스였다. 강한 힘에 뒤로 밀려가는 파도처럼 서흔이 그에게 휩쓸리던 중 구두가 벗겨졌다.
“자, 잠깐.”
한순간에 중심을 잃은 그녀를 번쩍 건욱이 안아 들었다.
“잠깐은 무슨.”
단 일 초도 기다릴 수 없다는 듯 그가 다시 입술을 맞붙여 왔다. 걸음을 옮겨 침대 위에 고이 눕혀질 때까지 뜨거운 체온이 후끈 그녀를 뒤덮었다.
“유서흔.”
“응?”
그녀를 부르는 입술에 짙은 정염이 가득했다. 입술만 그럴까. 그녀를 향한 눈빛은 마주하기 두려울 정도였다.
“우리 결혼 전에 혼수 먼저 마련할까?”
“무슨 혼수요?”
“요즘은 다들 그렇게 한다던데.”
건욱이 그녀의 얼굴 곳곳에 가느다란 숨결을 흩뿌렸다. 얼굴으로만 만족할 수 없는 그가 면적을 조금씩 넓혀 갔다.
가느다란 목덜미와 하얀 살결, 팔과 다리. 그의 숨결이 온몸에 닿을 때마다 서흔은 혼이 쏙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하아…… 그래요?”
“응.”
“으응.”
서흔의 입에서 달뜬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래를 지분거리는 손길에 그녀는 사실, 지금 그가 무슨 소리를 늘어놓는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럼…… 그렇게 하기로 한 거다?”
“…….”
건욱이 그녀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서흔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눈빛이 무섭게 빛났다.
* * *
한바탕 까무룩 잠이 들었다 깬 서흔은 어둠이 내려앉은 창문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서흔은 빨리 서울로 돌아가자 했지만 건욱은 이왕 이렇게 늦은 거 저녁을 먹고 가자고 했다.
결국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던 서흔은 그와 함께 분위기 좋은 강변 옆의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은 뒤, 깜깜한 밤이 되어서야 서울로 출발할 수 있었다.
“도 실장님이 당신 대신에 너무 고생해서 어떡해요. 미안해서 어쩌죠.”
“도 실장 생각할 시간에 나와 함께 있는 이 시간을 즐겨야 하는 거 아닌가.”
“너무 즐겨 문제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늦게 돌아가는 건데.”
서흔이 콧잔등을 찡그리며 말했다. 도 실장과는 제대로 인사를 나눈 적도 없는데 그에게 알 수 없는 마음의 짐이 자꾸만 차곡차곡 쌓여갔다.
“도 실장은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그의 능력과 노고에 대한 보상은 언제나 넘칠 만큼 충분히 하고 있으니까. 오늘 몇 시간 일정이 밀렸다고 해서 처리 하나 못 할 사람이 아니야.”
처음부터 도 실장은 오후에 출근하느니 하루 푹 쉬고 내일 출근하라고 몇 번이나 이야기했었다.
차 회장의 사람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인물이었지만 도 실장은 어쩐 일인지 건욱이 회사에 사표를 던진 후 그의 사람으로 완전히 돌아섰다.
아마도 차 회장이 건욱의 곁에 사람 한 명쯤은 두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닌지 추측하고 있지만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설사 도 실장이 그런 의미로 건욱의 곁에서 머문다 해도 건욱은 상관없었다.
건욱은 도 실장과 업무적 합이 잘 맞아서 일하는 것뿐, 차 회장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건 아니었다.
“그건 알죠.”
“그럼 됐어.”
“정말 도 실장님한테 결혼 준비 도와 달라고 할 거예요? 왠지 도 실장님한테 도와 달라는 말 안 하면 계속 당신한테 잔소리 들을 것 같은 예감이 드는데.”
“잘 아네.”
건욱이 피식 웃었다.
“부담 느낄 필요 없어요. 내가 소식을 전달한 순간부터 도 실장은 이미 준비 시작했을걸. 만약 당신이 도움을 거절하면 오히려 자신의 능력에 대한 불신이라고 받아들일 사람입니다.”
“…….”
“그리고 차건욱의 아내가 될 사람이라면 타인에게 도움을 받는 것에 대해 관대해질 필요도 있어요.”
차건욱이 그런 남자니까.
건욱의 아내가 된다는 건 그 정도의 짐은 가뿐히 짊어질 만한 사람이 되어야 했다.
“……알았어요.”
서흔이 고개를 끄덕이자 건욱이 그녀의 볼을 귀엽다는 듯이 손가락으로 쓸었다.
“참 건욱 씨, 아까 그게 무슨 말이었어요?”
“응?”
“아까 혼수 준비 뭐라고 했던 것 같은데. 미리 준비해야 할 게 있어요?”
기억이 가물가물한 서흔이 물었다.
“아니. 당신이 준비할 건 없어요. 내가 다 알아서 할게.”
“알았어요.”
서흔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서울이었고, 그녀의 집 앞이었다.
“헤어지기 싫다.”
“나도.”
서흔은 건욱과 맞잡은 제 손을 빼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가야죠. 얼른 쉬어야지 내일 출근하죠. 운전하느라 피곤했을 텐데.”
마음은 그에 대한 걱정으로 한가득인데도 손이 떨어지질 않았다. 발조차도 자동차에 딱 붙어 있는 것처럼 내릴 생각을 못 했다.
“출출하네. 집에 라면 있어요?”
“……컵라면이요?”
“응.”
“자꾸 컵라면 먹으면 여사님한테 혼날 텐데.”
“미래 와이프가 주는 컵라면은 괜찮지 않을까?”
“컵라면 없어요. 원래 집에 잘 안 사다 놔. 인스턴트 별로 안 좋아해서.”
“우리 같이 회장님 집에서 지낼 때는 잘 먹었던 것 같은데?”
“그때는 상황이 좀 특수했잖아요.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고.”
“그래서 컵라면은 없다는 거네요.”
잔뜩 실망한 건욱이 그의 표정을 숨길 생각도 없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떡볶이는 안 좋아해요? 나 떡볶이 금방 잘 만드는데. 쌀 떡볶이 어때요? 나는 밀떡보단 쌀떡 파. 건욱 씨는요?”
서흔이 괜히 부끄러워져 말이 길어졌다.
“좋아해요. 떡볶이. 쌀떡, 밀떡 뭐든 안 좋을까.”
유서흔이 주는 거라면 뭐든.
건욱이 그녀의 입술에 쪽하고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 두 사람은 같이 차에서 내려 둘이 지내기엔 너무나 좁아 꼭 붙어서만 자야 하는 작은 집으로 들어갔다.
* * *
“휴가는 잘 다녀오셨습니까.”
건욱이 출근하자마자 도 실장이 인사를 꾸벅했다.
“덕분에 잘 다녀왔습니다. 별일 없었습니까.”
“네, 별일 없었습니다. 정수민 양이 찾아와 당장 본부장님을 만나게 해 달라는 소동을 벌였고, 고소장을 받은 임진수가 <플로라유>를 찾아가 난동을 피우려고 하는 걸 막느라 바빴던 것만 빼면요.”
“별일 없었네요.”
건욱이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가 재킷을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건욱과 서흔이 강원도 여행을 떠난 사이, 도 실장은 호텔 업무 말고도 바쁜 일이 많았다.
준비해 왔던 정수민의 폭로 기사를 터트렸고 임진수에게는 여러 종류의 고소장을 날렸다.
“정수민은 기사 터져서 당분간 잠잠할 겁니다. 기사 막느라 바쁠 테니까요.”
“다행이네요.”
정수민이 사립 고등학교 재학 시절 학교 폭력을 일삼았다는 폭로 글이 올라오고 난 뒤, 피아니스트로서의 커리어 역시 순수한 실력이 아닌 돈으로 만든 것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인터넷의 익명 글로만 이어지던 학교 폭력에 관한 폭로는 정운그룹 쪽에서 일관적으로 묵살했기 때문에 파급력이 적었다.
하지만 건욱이 준비한 언론의 심층 취재로 정수민에 대한 폭로가 완전한 사실로 드러나면서 그녀는 각계각층의 비난을 받아야 했다.
얼핏 자살 시도를 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쇼라는 게 정설이었다.
“임진수는 그 이후로 잠잠합니까?”
임진수 고소의 내용은 차용증 위조뿐 아니라 <플로라유>의 재물 손괴와 그녀에 대한 결혼 협박, 스토킹까지 합쳐 꽤 많았다.
“유서흔 씨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조치 취해 두었습니다.”
“수고했습니다. 어차피 발악해 봤자 죄만 늘어날 테니까.”
“초범인데 집행 유예가 나오지 않을까요?”
“내가 겨우 임진수가 집행 유예 선고받는 꼴을 보려고 형사 전문 대형 로펌에 의뢰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최소한 징역형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아닙니까.”
“…….”
싸늘해진 건욱의 눈빛에 도 실장은 오랜만에 긴장했다.
재판이 어떻게 진행될지 법 관련 문외한인 도 실장으로서는 알 수 없지만, 이 사건의 의뢰인인 건욱의 뜻은 확고했다.
“로펌 측에 명확히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건욱이 고개를 끄덕이며 주소가 적힌 메모지 한 장을 내밀었다.
“그리고 도 실장님, 여기 이 주소지 땅 소유주 한번 찾아 주시죠.”
“땅이요? W호텔 새 지점 계획입니까?”
건욱이 땅 관련 업무를 맡길 때는 언제나 W호텔 새 지점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자세한 면적이나 상황은 지적도 및 등기부 등본을 확인해 봐야겠지만 강원도에는 이미 W호텔의 지점이 있는 상황이라 도 실장은 의아했다.
“아니요,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어서요.”
“네.”
“부탁드립니다.”
“알아보겠습니다.”
도 실장이 메모지를 확인할 때, 건욱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그의 눈빛이 사르르 녹더니 전화를 받는 목소리 또한 부드러워졌다.
“응, 서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