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1화
건욱은 서흔에게 프러포즈를 한 뒤, 지란에게도 다시 결혼 허락을 받았다.
지란은 기꺼이 두 사람의 뜻을 존중했기에 결혼 허락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그날 밤 세 사람은 늦도록 술잔을 기울였다. 기분이 좋아서 한 잔, 아저씨가 떠올라서 한 잔, 또 행복해서 한 잔, 축하하는 의미에서 한 잔.
그렇게 마음만큼이나 깊은 잔이 쌓이고 새벽이 되어서야 잠들었다.
늦잠을 잔 서흔과 건욱이 일어나니 지란이 이미 고춧가루와 청양고추가 매콤하게 들어간 콩나물국을 끓여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푸짐한 아침 해장국을 먹은 뒤 두 사람은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조금 더 머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이미 없는 시간에 잠깐 틈을 만들어 여행을 온 건욱의 스케줄을 고려할 때 어려울 것 같았다.
서울로 향하는 차 안에서 서흔은 제 손에 묵직하게 자리 잡은 반지를 바라보았다.
“실감이 안 나네요.”
“뭐가?”
“우리 결혼이요. 지금까지는 한 번도 결혼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없거든요.”
“알고 보니 비혼주의자, 그런 겁니까?”
“아니요, 비혼이니 뭐니 그런 생각도 아예 없었어요. 그냥 결혼은 나와는 먼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지란의 삶은 서흔의 선택에 여러 영향을 주었다. 남자를 만나고 싶지 않았고, 사랑을 하고 싶지 않았고, 결혼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영광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결혼할 마음을 가져 준 거니까.”
“내가 영광이죠. 이런 나와 결혼을 하겠다고 프러포즈를 해 준 사람이 당신이니까요.”
“그럼 서로의 영광인 걸로?”
“네. 서로의 영광인 걸로.”
건욱이 웃으면서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서울 올라가면 천천히 결혼 준비 시작합시다. 도 실장에게 말해 뒀으니 도와줄 거야.”
“도 실장님, 아직 결혼 안 하지 않았어요?”
“응.”
“결혼도 안 한 남자한테 결혼 준비 도와달라고 한 거예요?”
“무슨 문제 있나요?”
“결혼식에 대해 상의할 만큼 도 실장님이랑 나는, 가까운 사이는 아니잖아요. 도 실장님께 신경 쓰지 말라고 전해 주세요.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어.”
“도 실장, 생각보다 능력 있는 비서입니다. 당신보다 훨씬 더 많은 걸 알고 있을걸.”
“왜 그렇게 자신해요? 혹시 도 실장님이 이전에도 당신 결혼 준비 맡아 하신 적 있는 거 아니에요?”
서흔이 가늘게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은 알지 못하는 그의 과거에 결혼식장 전까지 갔던 여자가 있을지 알 게 뭔가.
“왜, 아무 말도 없어요? 정말 결혼하려던 여자 있었어?”
갑자기 서흔은 얼굴도, 이름도, 정체도 전혀 모르는 미지의 여자에 대한 무한한 질투심이 팔팔 끓어올랐다.
“유서흔 씨, 기억 안 납니까.”
“무슨 기억이요?”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지만. 회장님이 준비 중이셨던 내 결혼.”
“아.”
뒤늦은 깨달음에 서흔이 입을 다물었다.
차 회장의 성격상 그녀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진행 사항이 있었을 터였다.
“아무튼 결혼 준비는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어요.”
“<플로라유> 운영하면서 W호텔 외주 작업도 하고, 결혼 준비까지 하려면 몸이 세 개라도 모자랄 텐데.”
“천천히 하면 되죠. 급할 것도 없는데.”
“난 급한데?”
“뭘 또 급하대.”
서흔이 살포시 웃었다. 한번 그녀에게 마음을 연 뒤로 옆을 가린 채 질주하는 경주마처럼 그는 브레이크가 없었다.
“천천히 하면 되죠. 한 번 하는 결혼인데 서둘러 준비하다가 아쉬움을 남기는 것보다 낫잖아요.”
“그 아쉬움이 결혼이 늦춰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보다 클까?”
“우리 아직 회장님한테 허락도 안 받았어요.”
“회장님의 허락은 필요치 않아요.”
불만으로 일그러지는 그의 미간을 살펴보며 서흔이 입을 열었다.
“솔직히, 나도 회장님의 허락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어차피 절 가족으로 받아들여 주실 것 같지도 않고요.”
건욱이 힐끗 그녀를 바라보았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왜 쓸데없이 차 회장을 언급했는지 의문이 깃든 눈빛이었다.
“내가 회장님 댁에서 받은 경멸과 무시를 생각하면 허락 따위 해 준다고 해도 내가 거절하고 싶은 생각이에요. 그런데.”
“…….”
“강원도에 와서 생각이 바뀌었어요. 차건욱, 당신 때문에요.”
“나 때문에?”
“당신이 나 몰래 엄마를 찾아 주지 않았다면 나, 절대 엄마 다시 안 봤어요. 그런데 당신이 나 여기 데리고 와 줬잖아요. 덕분에 엄마랑 오해 풀 수 있었고요.”
“나와 할아버지는 상황이 많이 달라요. 당신과 어머니는 중간에 오해가 있었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아.”
오해랄 게 없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결혼과 이혼에 관한 모든 진실은 아버지, 주태의 일기장에 다 적혀 있었다.
“우린 이미 각자의 평행선 위에 서 있고. 그 선은 절대 만나지 않을 선이야.”
“회장님에게 우리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애원하자는 게 아니에요. 한 마디라도 건네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 게…… 가족이잖아요.”
서흔은 건욱이 그의 가족을 모두 저버리는 게 안타까웠다.
그녀가 알지 못하는 그들만의 세상에서는 가족이 다른 형태일지 모르겠지만, 그에게도 따스한 정을 느낄 수 있는 가족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했다.
그녀에게는 비록 악인이었어도 차 회장의 행동에는 건욱을 향한 애정이 그 바탕에 깔려 있었다.
“당신에게도 가족이 필요하잖아요.”
“앞으로 내 가족은 당신뿐이야. 그걸로 충분하고.”
건욱이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끌어와 손등에 입을 맞췄다.
안타까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서흔의 얼굴을 힐끗 보곤 그가 입을 열며 말을 돌렸다.
“이번 여행에서 미리 예약하지 못하고 방문했던 숙소 어땠어요. 지낼 만했어요?”
“최고였어요. 강원도에 또 오게 되면 꼭 다시 묵고 싶어요.”
서흔은 일부러 말을 돌리는 그의 마음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아 환하게 웃었다.
2박 3일이 너무나 짧았다. 그가 그리 바쁘지만 않았다면 졸라서라도 며칠 더 묶고 싶었다.
“그건 결혼 후에나 가능하겠는데?”
“왜요? 특별한 이유라도 있어요?”
“각방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뭐예요, 그게.”
서흔이 볼을 붉히며 그의 팔을 찰싹 때렸다.
“나만 견디기 힘들었나? 그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어젯밤 기억 안 나요?”
“어젯밤이요? 무슨 일 있었어요?”
서흔은 눈에 띄게 모른 척하며 시선을 돌렸다. 건욱이 피식 웃더니 갑자기 핸들을 돌렸다. 차가 방향을 바꾸며 유턴했다.
“서울로 가려면 직진 아니에요?”
“맞아.”
“그럼 왜 차를 돌려요?”
“어젯밤이 기억 안 난다기에 기억을 좀 상기시켜줄까 싶어서.”
“어, 어젯밤이요?”
“응.”
서흔이 꿀꺽 침을 삼켰다. 이제 와 기억이 난다고 말하기도 어렵고, 계속 기억이 안 난다고 우길 수도 없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지금 어디 가는 건데요?”
“W호텔 강원 지점.”
“거긴 왜요?”
“명색이 W호텔 대표라는 사람이 강원도까지 와서 그냥 갈 수는 없죠.”
“일정에 없던 일이잖아요.”
“없는 일정도 만드는 게 대표 능력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응?”
“어젯밤 기억도 완벽히 되살릴 겸.”
“……농담이죠?”
“내가 농담하는 걸로 보여요?”
“당신, 지금 바로 회사 가봐야 하잖아요.”
“한 두세 시간은 여유 있어.”
“없는데!”
“말했잖아요. 없는 여유도 만드는 게 능력이라고. 당신 남자 그 정도 능력은 있어.”
아주 침착하고도 느긋한 얼굴로 건욱이 웃었다. 서흔은 두 손을 들었다.
“하아. 당신이 이겼어요. 나 생각해 보니까 어젯밤 일, 기억이 날 것도 같아요.”
“기억이 날 것도 같아?”
“기억나요, 기억나! 이제 됐어요?”
“아니.”
다시 서울로 향할 줄 알았던 차는 정말로 W호텔로 향할 생각인지 계속 경로를 이탈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 호텔 앞에 도착한 건욱이 차를 세웠다.
“정말 들어갈 거예요?”
“응.”
“여기 W호텔 아닌데.”
“W호텔로 가고 싶어? 그래도 되고.”
“아니, 그건 아니라.”
분명 건욱의 얼굴을 모르는 이가 없을 호텔에 가서 두 사람이 룸으로 올라가는 모습을 광고하듯 보여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건욱 씨, 정말 이럴 거예요? 어젯밤 일, 정말 생생하게 기억나요. 그러니까 우리―”
달칵. 안전벨트를 푼 건욱이 몸을 그녀 쪽으로 기울이며 서흔의 머리카락을 쓰윽 뒤로 넘겼다.
“그럼 잘 알겠네요. 내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그의 손이 그녀의 목을 살며시 잡나 싶더니 가려져 있다 드러난 볼에 그의 입술이 스치듯 닿았다.
서흔은 움찔 눈을 감았다. 귓불을 무는 선명한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퍼져 나갔다.
아랫배에 뭉근한 열기가 고였다. 그가 자신을 원하는 것만큼이나 그녀도 그를 원하고 있었다.
“건욱 씨, 늦으면 어떡해요.”
“걱정하지 마. 당신과 사랑 나눌 시간은 충분하니까.”
건욱이 웃으며 그녀의 안전벨트를 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