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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약혼녀가 아니야 (63)화 (63/74)

63화

“자신은 없지만. 키스만.”

“키스만 하면 놔주는 거예요.”

서흔이 내건 조건이 못마땅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에 건욱이 취할 수 있는 답은 정해져 있었다.

건욱은 그녀가 까치발을 들고 고개를 들기도 전에 먼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물었다.

아. 이렇게 달콤할 일인가.

끝없이 파고들어도 늪에 빠진 것처럼 그는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깊숙이 입술을 물고 그녀의 목덜미를 잡아당기자 입안에서 아, 하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갈급한 욕망을 담은 혀가 그녀의 것을 샅샅이 탐하여 숨결을 앗아갔다.

노골적인 움직임에 놀란 서흔이 그의 어깨를 손으로 밀어내려 했지만 격렬한 욕망을 꺼뜨리기엔 역부족이었다.

타액과 타액이 섞이며 만들어내는 젖은 마찰음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내 빈자리를 눈치채고 엄마가 깨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불안한 마음만큼이나 쿵쿵 뛰는 심장이 그의 욕망을 더욱 부추기는 줄도 모르고 서흔은 그에게 매달렸다.

건욱은 억눌러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 번 입술을 내려 버린 잘못으로 속절없이 그녀에 흠뻑 빠져 버렸다.

“하아…… 그, 그만.”

그나마 이성을 붙잡고 있는 서흔의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그의 힘에 밀려 뒷걸음질 치다가 서흔이 벽에 쿵 하고 부딪치지 않았더라면,

그는 종국엔 그녀를 바닥에 눕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입을 뗀 건욱이 욕망으로 짙게 물든 눈을 감았다.

이토록 사리 분간도 못하고 서흔에게 달려들 정도로 그녀는 그의 본능을 건드린다.

“자장가는 나중에 들려줘요. 오늘은 안 되겠어요.”

서흔을 품에서 놓아준 건욱이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겼다.

“응, 오늘은 안 될 것 같아요.”

건욱만큼이나 욕망에 충실했던 서흔이 살짝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는 불편하지 않아요?”

“괜찮아요.”

어차피 잠 못 이룰 밤이라면 불편한 게 뭐 대수인가.

“가요, 방에 데려다줄게. 피곤하겠어요.”

건욱이 그녀의 손을 맞잡고 끌어당기자 서흔이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뺐다.

“나 혼자 갈게요. 다섯 발걸음도 걷지 않는데 데려다주는 거 웃겨요. 엄마가 깰지도 모르고요.”

서흔의 뜻은 확실히 후자였다. 건욱이 할 수 없이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잘 자요.”

서흔이 방 밖으로 나가려 할 때 건욱이 가볍게 그녀의 입술에 베이비 키스를 했다.

“잘 자요.”

건욱은 한 번 더 서흔을 꼭 안아 준 뒤에야 그녀를 완전히 놓아주었다.

서흔이 웃으며 방문을 열었다. 건욱은 옅은 숨을 내쉬며 벽에 기댔다. 눈치도 없이 바지 앞섶이 잔뜩 부풀어 있었다.

“하루라도 빨리 공식적으로 밤을 보낼 수 있도록 만들어야겠어.”

건욱은 머릿속의 계획을 촘촘히 수정하며 늦게 잠자리에 들었다.

* * *

다음 날 서흔은 지란, 건욱과 함께 아저씨의 묘로 향했다.

아저씨의 묘는 산 중턱에 있었다. 배산임수를 따져가며 고른 자리라 그런지 앞에는 작은 개천이 흐르고 시야가 탁 트였다.

뒤로는 산이 한 번 더 받쳐 주니 이보다 더 좋은 묫자리를 고르긴 어려웠다.

묘지는 관리가 잘된 티가 역력했다. 밭일을 하다가도 지란이 심심하면 올라와 잡초를 뽑곤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세 사람은 준비해 온 매트를 깔고 술과 안주를 올렸다.

서흔이 먼저 절을 하고 술을 따라 묘지 주변에 뿌렸다. 서흔은 건욱과 함께 서서 아저씨에게 인사를 했다.

“아저씨, 내 애인이에요.”

“차건욱입니다.”

건욱이 절을 올렸다. 그가 다시 일어서 서흔 옆에 섰다.

“아저씨, 옛날에 나한테 남자 친구 생기면 인사시키라고 했잖아. 좋은 놈인지, 나쁜 놈인지 아저씨 눈에는 한눈에 보인다면서.”

서흔의 말에 지란이 기억 속 추억을 더듬으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는 절대 소개 안 시킨다고 막 소리 질렀던 것 같은데 지금은 먼저 소개시켜 드리고 싶었어.”

완전히 사춘기를 벗어나기 직전이라서일까. 남자 친구의 ‘남’ 자만 들어도 뭔가 파르르 떨면서 말도 꺼내지 말라고 했다.

아저씨는 계속 껄껄 웃으며 서흔의 시도 때도 없는 변덕을 받아 주었기에 그녀의 기억 속엔 아저씨의 웃는 모습이 참 오래도록 남았다.

“어때요? 내 애인. 꽤 괜찮죠?”

서흔은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건욱을 소개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저씨 눈에도 나쁜 놈이라고 생각할 만한 사람은 아니라서, 아저씨가 흐뭇하게 자신과 건욱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버님, 서흔이 제가 아끼고 사랑하겠습니다. 아무 걱정 마시고 편히 쉬십시오.”

꾸벅 인사를 하며 싹싹하게 말을 하는 건욱에 지란은 진한 미소를 지었다.

어제 건욱의 마음이 너무 성급한 건 아닐지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리만큼 너무나도 든든한 사위가 될 것 같은 예감이었다.

“나는 잠깐 더 있다 갈 테니까 서흔이랑 건욱 씨는 내려가서 좀 쉬고 있어요.”

“그럼 저희 먼저 내려가 있겠습니다. 천천히 오십시오.”

서흔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건욱이 지란에게 인사를 하고는 그녀를 데리고 산을 내려갔다.

“건욱 씨, 왜 그렇게 급하게 내려가요?”

서흔은 의아한 눈빛으로 건욱을 보았다.

“잠깐 갈 데가 있는데 마침 시간이 맞을 것 같아서요.”

“어디요?”

“비밀. 가 보면 알아요.”

건욱이 미소 지었다. 서흔은 궁금했지만 그가 쉽게 먼저 말해 줄 것 같지 않아 그를 천천히 따랐다.

산에서 내려온 건욱은 근처 작은 호수를 둘러싼 산책로로 향했다.

호수 주변을 둘러싼 야생 수국의 만개한 모습이 장관인 곳이었다.

“어머, 수국이네요. 너무 예뻐요. 이렇게 꽃구경하는 거 오랜만이에요. 여기는 사람도 적어서 좋네요.”

서흔은 그가 왜 그녀를 이곳에 데려왔는지 대한 궁금증은 미뤄 둔 채 풍경을 있는 그대로 즐겼다.

“동네 분들만 알음알음 아는 곳이라고 하더군.”

“이런 곳을 건욱 씨는 어떻게 알았어요?”

“어쩌다 보니.”

건욱은 그저 웃으며 그녀를 이끌며 걸었다. 서흔 역시 더 이상 묻지 않고 풍경을 충분히 느끼며 걷는 데 집중했다.

“옛날에는 잘 몰랐는데 걷는 것만으로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 같아요.”

“지금 마음이 평온해요?”

“네. 완전요.”

몇 개월 동안 그녀가 겪었던, 굴곡졌던 시간들이 희미해진다.

어쩌면 모든 일은 정해진 결말이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이제는 모든 게 평화로웠다.

“건욱 씨, 고마워요.”

“뭐가?”

“엄마한테 날 데려다준 거요. 당신 아니었으면 난 엄마를 찾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그럼 오해를 풀 일도 없이 평생 안 보는 사이가 됐을지도 모르고요.”

“난 한 번의 기회를 만들어 줬을 뿐이에요. 그 기회를 어떻게 활용하느냐는 당사자에게 달린 것이고.”

건욱의 덕인데도, 건욱은 오히려 서흔과 지란 덕이라 말했다.

“그 기회를 만들어 준 게 신의 한 수였잖아요. 왜 그랬어요?”

단 한 번도 서흔이 엄마 이야기를 꺼낸 적은 없었다. 건욱은 서흔과 지란 사이의 불편한 일들을 알면서도 굳이 묻거나 따지지 않았다.

상관하지 않는다 생각했는데 오히려 건욱은 실마리를 찾고 있었던 것이라는 생각이 이제야 들었다.

“부모님이잖아.”

건욱이 여상히 말했다.

“아버지의 부재에 대해 당신이 줄곧 느꼈을 그 감정을 아니까. 어머니는 당신 곁을 지키길 바랐어요.”

“건욱 씨…….”

서흔의 마음이 울컥했다. 그는 어릴 적부터 부모의 부재 속에서 할아버지와 숙부의 냉대를 겪으며 자라야 했다.

그런 그가, 스스로의 고통에 무감하면서도 그녀만큼은 그처럼 외롭지 않도록 해 주려 했다는 것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이 넘쳐흘렀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서흔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커다란 마음을 가진 건욱에게 어떤 보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가끔 강원도에 놀러 옵시다.”

처음 지란은 갑자기 나타난 서흔과 건욱을 보고 많이 놀란 눈치였지만 그 시간도 오래 가지 않았다.

지란은 지금 이 순간을 행복해하고 있었다.

“놀러 오는 건 좋은데, 이번처럼 너무 일이 몰아칠 때는 피해요. 강원도 가까운데 언제든지 올 수 있잖아.”

“별걱정을 다 하지.”

건욱이 웃었다.

“그런데 건욱 씨, 우리 여기 정말 그냥 산책하러 온 거예요?”

무슨 일이 있는 듯 조금 긴장한 것 같은 건욱이 신경 쓰여 서흔이 먼저 물었다.

“궁금해요?”

“네, 당연히 궁금하죠.”

“조금만 더 걸어가면 이제 알게 돼요.”

건욱은 비밀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와 발걸음을 재촉했다.

호수 주변을 거의 다 돌았지만, 별다른 이야기가 없었다.

건욱을 따라 걷기만 하던 서흔은 갑자기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게 다 뭐예요?”

다양한 꽃으로 둘러싸인 꽃밭 한가운데 커다란 회화나무가 눈에 띄었다.

A하우스를 꾸미다가 사다리에 떨어져 건욱에게 안겼던 그날 꾸몄던 모습 그대로였다.

“뭘 것 같아?”

서흔은 대답할 생각도 못 하고 그저 홀린 듯이 회화나무로 걸어갔다.

그녀의 머리를 크게 뛰어넘는 회화나무에 걸린 장식들이 그들을 다시 겨울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아니, 그들이 완전히 처음 만났던 십 대 시절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강원도에 회화나무가 있는 곳을 찾느라 고생했는데 그 보람이 있네요.”

완전히 혼을 빼앗긴 것처럼 감격한 서흔을 보며 건욱이 기분 좋게 입을 열었다.

서흔이 회화나무 아래 나란히 선 건욱을 올려다보았다.

“왜 이걸, 이렇게.”

서흔이 이 얼떨떨한 상황을 어찌해야 할지 모를 때, 건욱이 한쪽 무릎을 꿇어앉았다.

품 안에서 꺼낸 작은 벨벳 상자 안에는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있었다.

“유서흔, 다시 한번 내 품 안으로 떨어져 줄 수 있을까? 영원히.”

서흔의 눈동자가 큼지막하게 떠졌다. 믿을 수 없는 그의 말에 서흔이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녀의 눈동자에 울컥 눈물이 맺혔다.

“네, 좋아요. 좋아요, 당신이랑 영원히 함께할게요.”

행복한 눈물로 범벅이 된 서흔이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이제 당신은 내 진짜 약혼녀에요.”

서흔이 떨리는 손을 내밀자 그가 반지를 꺼내 손에 끼워 주었다. 약지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반지를 본 건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랑해요.”

“나도 사랑해.”

서흔이 그의 품으로 와락 뛰어들었다. 건욱이 번쩍 그녀를 안아 들었다.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잔잔한 바람에 나뭇가지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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