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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약혼녀가 아니야 (62)화 (62/74)

62화

“좋은 사람이네.”

“응. 좋은 사람이야.”

서흔은 입을 다물었다. 지란은 궁금한 게 더 많았지만 묻지 않았다.

지란이 어렸던 시절, 제대로 배우지 못했던 사랑으로 그녀와 함께 피해를 고스란히 보고 있던 서흔이었다.

그런 딸이 이제는 스스로 일어서 혼자 사랑을 배우고 있으니 엄마로서 그녀는 지켜보아야 했다.

“다행이다.”

그게 지란이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다.

* * *

읍내에 다녀오며 건욱은 도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대표님.

“부탁한 건 어떻게 됐습니까?”

건욱은 다시 대표 자리에 복귀하면서 가장 먼저 유지란의 거처와 정수민에 대한 조사를 부탁했다.

-정수민에 대한 조사는 마쳤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커리어에 많은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요?”

-학창 시절 학폭 문제부터 피아니스트로 데뷔 후 커리어도 국내에 알려진 것과는 다릅니다. 어떻게 할까요? 바로 터트리고 정리할까요?

“아니요. 하나씩, 하나씩 하죠.”

수민은 서흔을 놀이 삼아 몰아댔다. 건욱은 수민에게 조금씩 숨통을 조이는 게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알려 줄 생각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통화를 끊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건욱은 고기를 잔뜩 들고 마당으로 향했다. 언제 챙겨 왔는지 그릴까지 차에서 꺼내 와 직접 바비큐를 하기 시작했다.

지란은 직접 밭에서 기른 야채들을 손질하기 시작했고 서흔은 건욱의 옆에 섰다.

바비큐 하는 걸 도와주려는 뜻이었지만 건욱은 그녀가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라며 손도 못 대게 했다.

“요리하는 거 처음 봐요.”

“못할 줄 알았어요?”

“네. 편의점으로 차린 식사 기억 안 나요?”

“맞아요. 못해요.”

용산댁은 건강함과 맛, 시각적 아름다움까지 동시에 만족시키는 요리를 해 주곤 했다.

그런 전문가 앞에서 그가 요리할 일이라곤 컵라면에 물 끓이는 요행밖엔 없었을 터였다.

“유학 시절 자주 해 먹었던 요리 2탄이에요. 1탄은 토스트, 2탄은 바비큐.”

“그래요? 유학 시절 재미있게 지냈나 봐요?”

“유학을 재미로 하나.”

“그래도 재미 하나쯤은 있겠죠. 금발 머리 여자랑 연애도 하고, 뭐 썸도 타 보고.”

“유도신문이에요?”

건욱이 뜨거운 불 앞에서 서 있느라 땀 맺힌 이마를 쓰윽 닦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넘어오지도 않을 거면서.”

“연애할 시간 없었어요. 할아버지가 요구하는 학점과 학위 따자마자 바로 들어와야 했으니까.”

피식 웃으며 건욱이 말했다.

“그런 사람들이 더 화려하게 연애하더라.”

“지금 존재하지도 않은 대상을 질투하는 겁니까?”

“누가 질투를 했다고 그래요? 엄마 도와주고 올게요. 여기선 내가 할 일이 없네.”

서흔이 괜히 툴툴거리며 부엌으로 향했다.

“얼추 준비 다 되었으니까 나오시라고 해요.”

“알았어요.”

서흔이 건욱의 말을 전달하기도 전 지란이 농약 한 번 뿌리지 않고 키운 야채를 가지고 나왔다.

대청마루 위에 작은 상 하나가 펼쳐졌다. 그 위에 막 지은 밥과 옆집에서 얻어 온 직접 쑨 된장과 고추장, 지란이 직접 담근 아삭한 김치가 놓이자 푸짐한 한 상이 되었다.

세 사람은 만찬을 즐기기 시작했다. 이른 저녁의 즐거운 바비큐 파티는 한밤중이 되어서야 마무리가 되었다.

“손님 치를지 몰라서 미리 준비하지 못해 잠자리가 어떨지 모르겠네요. 조금 불편하더라도 이해해 줘요.”

건욱에게 기꺼이 한 방을 내준 지란이 미안한 듯 말하자 그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어머님. 제가 먼저 연락드리고 오는 것이 예의인데 미처 못 드렸어요. 죄송합니다.”

“에휴, 아니 아니에요. 덕분에 서흔이와 오해도 풀고 내가 고마워해야죠.”

“사실 그 이유로 연락을 먼저 드리지 못했습니다. 문전박대를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두 사람을 만나게 해 주고 싶었거든요.”

“고마워요.”

서흔도, 지란도 섣불리 서로를 만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건욱의 마음 씀씀이가 세심했다.

이제 인사 후 방을 나가면 되는데, 지란은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서흔이 잠시 뒷정리를 하겠다고 자리를 비운 지금이 아니면 건욱과 따로 말할 시간은 없을 것 같았다.

건욱을 바라보던 지란이 망설이다가 이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차건욱 씨, 궁금한 게 있어요.”

“네, 편히 말씀하십시오.”

“우리 서흔이랑 정확히 어떤 사이인지 알고 싶어요.”

서흔은 아니라 하며 거리를 두지만 지란의 생각은 달랐다.

서흔과 지란의 사정까지 아는 상태에서 모녀를 화해시키고자 무작정 온 남자의 속뜻을 한 번은 확인하고 싶었다.

“진지하게 서흔이와 교제 중입니다. 실은 어머니를 뵙고 허락을 받고자 이렇게 오게 된 것도 있습니다.”

“……무슨 허락이요?”

“서흔이와 결혼하고 싶습니다.”

“결혼을요?”

지란의 눈동자가 큼지막해졌다.

건욱이 믿음직해 보이고 서흔을 꽤 살뜰히 챙기는 모습은 보기 좋았지만 결혼은 너무 이른 것이 아닌가 싶었다.

“네.”

“……서흔이도 같은 마음인 건가요?”

지란의 생각이 어떠하든, 결혼에 대한 선택은 당사자인 두 사람의 몫이었다.

“아직 프러포즈는 안 했습니다.”

건욱이 난처한 듯 웃었다.

“그러면 왜 나한테 먼저 말을 꺼낸 건가요?”

“어머니께 먼저 결혼 허락을 받고 싶었습니다. 서흔이의 어머니니까요.”

지란은 건욱을 잠잠히 바라보았다.

오랜 시간 봐 온 사람은 아니지만 건욱의 마음만큼은 진심으로 느껴졌다.

자신을 굳이 찾아내 영영 인연을 끊을지도 몰랐던 모녀를 화해를 시켜 가며 결혼 허락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그 수고스러움을 마다하지 않은 건욱의 마음은 오로지 서흔을 위한 것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이런 건욱이라면 아직까지도 마음에 두르고 있는 서흔의 벽마저도 금세 허물 수 있지 않을까.

“결혼은 두 사람이 하는 것이니 내 승낙이 먼저인 것 같진 않아요. 서흔이와 진지한 대화를 해 보는 게 좋겠어요. 두 사람이 내린 결정을 난 존중할 거고요.”

생각을 마친 지란이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어머님.”

“그럼 쉬어요.”

“네, 쉬십시오.”

건욱이 깍듯이 인사를 하자 지란은 방을 나갔다.

그날 밤.

서흔은 지란과 도란도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된 이야기는 아저씨와의 추억이었다. 짧은 시간 함께한 아저씨였지만 지란과 서흔은 그녀들의 곁에 함께 있었던 아저씨와의 추억이 너무나도 많았다.

“하암. 안 피곤해? 얼른 자야지.”

“응. 잘 거야. 엄마 얼른 주무셔.”

지란은 피곤했는지 금세 잠들었다. 이상하게 서흔은 잠이 오지 않았다.

피곤하긴 했지만 잠자리도 낯설고 건넛방에 있을 건욱이 신경 쓰였다.

‘잘 자고 있나.’

자신조차도 침대가 아닌 그냥 바닥에 요를 깔고 누워 자는 것이 편하진 않았기에 단단한 근육을 가진 건욱은 얼마나 더 불편할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며칠 밤 바닥에서 잔다고 하늘이 무너지는 일은 없다지만 그녀를 위해 기꺼이 이곳에서 머물 건욱이 마음 쓰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불편한 마음에 여전히 뜬눈으로 있을 때 휴대폰 화면에 갑자기 불이 들어왔다. 서흔이 부리나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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