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그간 잠시나마 잊고 있었던 임진수의 만행이 떠올랐다.
말없이 사라져 버렸던 엄마와 남은 1억이라는 커다란 빚. 차민협과의 약혼과 교통사고, 그리고 건욱.
끝이 해피엔딩이라고 해서 그 과정까지 행복했던 것으로 미화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엄마가 할 말이 없네.”
지란이 고개를 푹 숙였다. 딸에게 면목이 없어 하는 모습에 서흔은 더욱 화가 났다.
“대체 1억이나 되는 돈을 왜 빌렸어! 어디 쓰려고? 그러곤 말도 없이, 설명도 없이 강원도로 도망 온 거야? 엄마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가 없어?”
“…….”
“그래도 지금까지는 나 엄마 이해했어. 엄마가 힘들게 날 키웠으니까, 다들 날 버리라고 해도 버리지 않고 사랑으로 키워 줬으니까. 100만 원, 200만 원, 까짓거 갚아 줄 수 있었어.”
지란이 자신을 키웠던 세월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하면 견딜 수 있었다.
“솔직히 힘들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가 갚을 수 있는 돈이니까 괜찮았어. 엄마, 그런데 1억은 아니야.”
서흔의 감정이 격해졌다.
“엄마, 1억은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돈이 아니야.”
차원이 다른 금액이었다. 결국은 차민협의 계약 약혼을 받아들여야 할 만큼 그녀를 벼랑 끝에 몰았던 돈이었다.
“서흔아, 미안해. 엄마가 정말 미안해.”
지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대체 왜 그랬어? 왜 그렇게 큰돈이 필요했어?”
“……사실은 엄마가 사기를 당했어.”
“뭐?!”
“처음에 진수한테 빌리고 나서 너한테 혹시 진수한테 연락 없냐고 전화를 했을 땐 사기인지 몰랐어.”
그때만 해도 지란은 반드시 그녀가 갚을 생각이었다. 혹시나 진수가 서흔에게 얼토당토않는 짐을 떠넘길까 봐 노심초사하긴 했지만 자신이 금방 돈을 갚을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이 있었다.
“무슨 사기? 대체 왜!”
“아저씨 기억나지? 그 사람 가족들이 찾아왔었어.”
지란은 그동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교통사고 후 아저씨는 강원도 선산에 묻혔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곳이 아저씨 소유의 산이 아니었고 아저씨의 묘지를 이장해야 하는 일이 생겨 버렸다는 것이다.
“이장해야 한다는 소식에 마음에 괜히 무너지더라. 안 그래도 한 많은 인생 살다가 간 사람인데 마지막 자리까지 파내야 하나 싶어서.”
가족들은 처음부터 그 땅을 사고 싶지만 돈이 모자라다는 뜻을 은연중에 내비쳤고 지란은 돈을 어떻게든 구해서 그의 마지막 자리를 지켜 주고 싶었다.
“돈을 송금하고 당연히 등기가 이전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나한테 보여준 등기부등본은 가짜였어.”
가족이라는 사람들도 한순간에 연락이 끊겼고 그녀는 가짜 등기부등본만 든 채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그랬으면 나한테 이야기를 했어야지!”
“창피하더라. 돈은 돈대로 날리고, 땅은 그대로 남의 소유고, 묘지는 언제 이장해 가라 할지 모르는 상태고.”
계속 그 가족들을 찾고, 자신에게 사기를 친 부동산 중개업자를 찾아 헤맸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저씨 있는 곳에서 지내는 거였어. 혹시나 갑자기 이장하라고 하면 사정이라도 해 볼까 싶어서.”
“엄마.”
“너한테는 차마 미안해서 연락 못 했어. 사리 분별 못 하고 사기당한 것도 창피했고, 무작정 눈먼 사람처럼 1억을 빌렸던 것도 그랬고.”
지란이 눈물이 그렁그렁 들어찬 눈동자를 손수건으로 톡톡 찍었다.
“어떻게든 돈 1억 모아 갚아야 한다는 생각만 했어.”
“엄마 잘한 거 하나도 없어. 뭘 울어.”
서흔은 답답한 숨을 내쉬었다.
“미안해, 서흔아.”
지란은 계속 눈물을 흘렸다.
“나한테 아저씨 묘지 이장하는 거라도 말했어야지. 아저씨는 엄마한테만 소중했던 게 아니라 나한테도 소중한 사람이었어.”
생물학적인 아버지는 아니었지만 서흔에겐 아버지라 칭할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나와 상의를 했으면, 그랬으면, 어떻게든 다른 방법을 마련할 수도 있었잖아.”
“너한테 부담 주고 싶지 않았어. 꽃집 오픈하면서 대출 많았잖아.”
“그런 사람이 연대 보증인에 내 이름을 썼어?”
유일하게 믿었던 엄마가 그런 일까지 했다는 것에 화가 났고 배신감마저 들었다.
“연대 보증인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눈물로 얼룩진 지란의 눈동자가 커졌다.
“진수가 연대 보증인 란에 네 이름을 넣어 놨어?! 난 진수한테 돈 빌리면서 네 이름 입도 뻥끗 안 했어. 계약서 쓸 때도 그런 것 적은 적 없었고!”
임 씨한테는 돈을 빌릴 수 없었던 지란이 고민하던 찰나에 진수가 다가왔다. 아는 사이이니 급전을 빌려 주겠다는 말이었다.
단기로 갚을 수 없기에 1년 뒤부터 임 씨가 제시한 금리보다 높은 금리로 원리금을 다달이 갚기로 한 뒤 돈을 빌렸다.
“그럼 나한테 진수한테 연락 온 것 없냐는 전화는 왜 했어?”
“내가 그때 첫 할부 원리금을 못 갚았어. 그래도 네가 내 자식인 거 뻔히 아는데 와서 깽판이라도 칠까 봐 걱정돼서 했던 거야.”
“연대 보증인 란에 내 도장 있었는데. 나한테 돈 변제해 줄 테니까 결혼하자고 협박했단 말이야.”
서흔이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저 때맞춰 우연히 그렇게 된 거라고 생각했는데 엄마의 말은 완전히 반대였다.
“엄마는 네 도장 손댄 적 없어.”
그것도 그럴 것이 서흔은 독립해서 혼자 살고 있었다. 그녀의 집에 엄마가 몰래 들어와 도장을 훔쳐 가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도장을 도용한 건가. 임 씨 아저씨와의 채무 관계에서 찍었던 도장을 가지고 진수가 가짜 도장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컸다.
도장을 자세히 살펴봤어야 했는데.
“모녀가 각기 사기를 당한 셈이네.”
서흔은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임진수는 지란이 급전이 필요하다는 소식을 듣고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이다.
그러고는 서흔과 결혼을 하기 위해 문서 위조를 해 그녀를 속였다.
서흔이 그와 결혼하지 않겠다고 버티자 <플로라유>에 찾아와 기물 파손도 서슴지 않았다.
그 모든 게 처음부터 끝까지 임진수의 머리에서 나온 사기 행각이라는 걸 알게 된 지금, 서흔은 강원도에서 돌아가면 임진수에게 사기가 얼마나 더러운 범죄 행위인지 똑똑히 알려 주겠다고 다짐했다.
“서흔아, 엄마는 네가 그런 고충을 당하는지도 몰랐어. 정말 미안해.”
지란은 임진수가 그런 일을 꾸미리라곤 상상도 못 했던 터라 정말 깜짝 놀랐다.
“엄마, 나는 솔직히 임진수가 그런 것보다도 엄마가 날 속였다는 생각이 더 힘들게 했어.”
“미안해. 엄마가 솔직히 말하지 못했지만 널 속인 건 없었어.”
“그러게, 왜 그런 생각은 못 했을까.”
두 모녀 사이를 일부러 누가 의도적으로 갈라 놓기라도 하는 것처럼 놓은 덫에 빠진 서흔은 엄마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생각지 못했다.
그저 엄마가 밉고, 또 밉고, 미웠다.
“정말 미안해, 서흔아. 철없는 엄마가 이렇게까지 널 힘들게 할지 몰랐어.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야.”
아저씨의 죽음 이후 한동안 끝없이 방황하던 지란은 다시 아저씨의 묘지 이장 사기 사건으로 예전으로 다시 돌아온 것 같았다.
“우리 엄마 완전 울보 다 됐네.”
서흔은 눈물을 흘리는 지란을 품에 안았다. 엄마가 작게 느껴졌다.
어느새 지란이 자신을 낳을 때보다 더 나이를 먹은 어른이 된 것이다.
이제는 엄마가 그녀를 보듬는 게 아니라 그녀가 엄마를 보듬을 시간이었다.
“이렇게라도 오해가 풀려 다행이야. 아니었으면 오랫동안 엄마를 원망만 했을 거야.”
처음부터 건욱이 엄마를 만나러 가자고 했다면 따라오지도 않았을 터였다.
서흔은 엄마를 찾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평생토록 엄마를 아예 보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이 모든 것들이 오해일 거라는 생각조차 못 한 채 그렇게 소중한 가족을 잃을 뻔했다.
“……아까 그 남자와는 정확히 어떤 사이야? 가볍게 만나는 사이 같진 않던데.”
어느새 눈물을 그친 지란이 물었다.
서흔은 사람에게, 그것도 이성에게 쉽게 마음을 내주지 않았다. 그런데 건욱은 달라 보였다.
지란을 함께 찾아왔을 정도로 건욱은 서흔이 겪은 일들을 다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가볍게 만나진 않지만 그렇다고 무거울 것도 없어. 연애가 그렇잖아.”
건욱이 그녀를 애초부터 작정하고 속이려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해했기에 그에 대한 마음을 인정했다.
“그래?”
“응. 엄마, 사실 나는 지금껏 연애가 어렵고 두려웠어. 겁을 먹고 있었나 봐. 남자는 꼭 나에게 의도가 있어야만 접근할 것 같고, 꼭 내 소중한 무언가를 빼앗길 것 같았거든.”
“서흔아.”
지란은 서흔의 그런 생각이 어디에서 시작됐는지 너무나도 잘 알기에 안타까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해 보니까 사랑이란 게 그런 것이 아니더라.”
어쩔 수 없이 상대방에게 이끌리는 마음은 부인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부인하면 할수록 그 크기를 키워서 그녀를 오히려 압도시키는 것이었다.
“건욱 씨가 그걸 가르쳐 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