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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약혼녀가 아니야 (60)화 (60/74)

60화

“강원도에는 무슨 일이에요?”

차에 올라탄 서흔이 안전벨트를 매며 물었다.

“바람 쐬러 가고 싶어서요.”

“이렇게 갑자기요?”

예정에 없던 강원도 방문이었다. 갑작스러운 건욱의 연락에 서흔은 처음엔 난색을 표했지만 다경이 그녀에게 다녀오라 부추겼다.

“응. 갑자기 가는 것도 좋지 않습니까.”

건욱은 무척 홀가분한 표정으로 운전대를 잡고 있었지만 그녀는 내심 걱정이 되었다.

“W호텔 대표직 다시 맡은 지 얼마 안 되었잖아요. 많이 바쁘지 않아요?”

그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그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런 와중에도 그녀를 만나기 위해 늦은 밤에서 새벽에는 꼭 짬을 냈다.

“바쁘긴 한데, 잠깐 여유를 낼 순 있어요.”

“정말 여유 낸 거 맞아요? 돌아가면 일이 더 쌓여 있는 거 아니에요?”

지금의 새벽 퇴근이 강원도에 다녀온 순간, 철야로 바뀔지 모른다는 걱정이었다.

“글쎄. 도 실장의 능력을 한번 시험해 보지, 뭐.”

건욱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서흔을 보며 미소 지었다.

“내 걱정은 하지 말고요. 우리는 그저 편히 쉬다 옵시다. 알았죠?”

“알았어요.”

서흔의 걱정을 덜어내는 건욱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행은 좋아해요? 많이 다녀봤어요?”

“아뇨. 처음이에요.”

아저씨가 돌아가신 이후, 엄마는 경제적으로 가정을 지탱하기 힘들어졌다.

서흔은 없는 형편에 대학을 다녔다. 제 스스로 학비를 벌어야 했기에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며 대학 시절을 보냈다.

꽃집을 차리기 위해 대출을 받은 이후로는 운영을 하며 대출금을 갚기 바빴다. 여유를 부려 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무척 설레요. 나 지금 거의 놀이공원 처음 가는 어린아이 같은 기분이에요.”

처음 차에 타선 건욱에 대한 온갖 걱정으로 얼굴이 먹구름이더니 지금은 표정 자체가 완전히 달랐다.

몽실몽실 구름 위에 떠 있는 것처럼 기대와 설렘이 공존하는 서흔의 표정에 건욱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강원도에 롤러코스터나 바이킹이 있진 않을 텐데. 실망하는 거 아닙니까.”

“내가 놀이공원에서 하고 싶었던 건 피크닉 매트에 앉아서 김밥 먹는 거였어요. 롤러코스터 이런 건 무서워서 못 타요.”

“그건 강원도에서도 할 수 있겠네요.”

“정말요? 할 수 있어요?”

“못 할 건 뭐야?”

건욱이 손을 뻗자 그녀가 손을 포갰다.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는 차 뒤로 복잡한 도심이 점차 멀어지고 있었다.

춘천에 들러 점심을 먹고 난 후로도 차는 한참 달렸다.

“우리, 숙소로 가고 있는 거 맞아요?”

“맞아요.”

“W호텔 강원 지점은 벌써 지나왔어요.”

“꼭 W호텔에 머무르란 법은 없잖아요.”

“그렇긴 한데, 당신 W호텔 대표잖아요. W호텔 대표가 다른 곳에서 지내는 건 좀 그렇지 않아요?”

서흔이 눈동자를 또르르 굴렸다. 건욱이 W호텔에 머물지 않으면 분명 잡음이 날 것이 분명했다.

“아니, 괜찮아요.”

“너무 자신하는 거 아니에요?”

“도착하면 알게 될 거예요.”

건욱은 그저 웃기만 하면서 속력을 높였다. 그렇게 점차 도심에서 멀어져갔다.

주변에 녹음이 지는 풍경이 연속이더니 이제는 비포장도로를 달렸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언제 지어진 지도 모르는, 기와집 형태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오래된 시골집이었다.

“여기가 우리 숙소예요?”

“응. 맞아요. 내려요.”

두 사람은 차에서 내렸다. 비포장도로를 달렸던 터라 검정 세단에 뽀얀 흙먼지가 내려앉아 있었다.

건욱이 거침없이 집으로 다가갔다. 서흔은 건욱의 뒤를 따라 엉거주춤 발걸음을 옮겼다.

오래된 집이긴 하지만 꾸준히 관리가 되고 있는지 작은 대청마루가 반질반질했다. 신발을 놓는 섬돌마저도 흙먼지가 많지 않고 깨끗했다.

슬쩍 보이는 가구들도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것이 이곳의 주인은 무척 부지런한 사람 같았다.

“여기가 우리 숙소예요?”

“응. 어때?”

“글쎄요.”

“별로예요?”

“아니, 좀 의외라서요. 당신은 현대식으로 지어진 집을 선호할 것 같았거든요.”

워낙에 으리으리한 궁전 같은 집에서 살던 건욱 아니었던가.

아무리 관리가 잘 되었다고 해도 시골집이 취향일 것 같진 않아 보였다.

“그런데 이 집을 통째로 빌린 거예요?”

“아니. 어디 묵어야 할지 주인분께 여쭤봐야 할 것 같은데. 혹시 내쫓진 않겠죠?”

“응? 내쫓기다뇨? 예약한 거 아니에요?”

“예약은 못 했어요.”

“네? 예약을 안 했다고요?”

깜짝 놀라 동그래진 서흔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건욱은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그게.”

“누구……세요?”

갑자기 이야기를 나누던 건욱과 서흔의 뒤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서흔이 휙 몸을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쳐다보았다.

“……엄마?”

“서…… 서흔아!”

햇빛을 가리는 천이 목까지 드리워진 바가지 모자를 쓴 지란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정말 엄마야?”

서흔의 눈동자도 떨렸다. 몇 달 동안 아예 인연이 끊긴 것처럼 연락조차 되지 않던 엄마였다.

“…….”

“이게 뭐야?”

서흔은 지란의 차림새를 눈으로 훑었다.

화려한 꽃무늬가 수놓인 냉장고 티셔츠에 몸빼 바지를 입고 무릎까지 올라오는 장화와 밭일 전용 방석 의자까지 엉덩이에 걸친 지란은 낯선 사람처럼 생경했다.

“일을 좀 하고 오느라.”

지란이 송골송골 땀이 맺힌 이마를 손등으로 쓱 훑었다. 방금 전까지 밭일을 한 터라 땀이 나긴 했지만 실은 서흔을 만나 당황한 마음이 더 컸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지란의 물음에 서흔의 안색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왜 내가 못 올 데라도 왔어?”

“아니, 엄마 말은.”

무언가 튕겨져 나가는 대화에 서흔의 옆에 서 있던 건욱이 나섰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차건욱이라고 합니다.”

건욱이 지란에게 꾸벅 인사를 하자 지란이 어설프게 같이 맞인사를 했다.

“아, 예. 그런데 누구시죠?”

지란이 한 폭의 그림처럼 완벽하게 어울리는 서흔과 건욱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지금 서흔 씨와 만나고 있습니다. 어머님께 인사를 드리고자 같이 왔습니다.”

“아. 그래요. 아, 내 정신 좀 봐. 손님이 오셨는데 이렇게 세워만 뒀네요.”

지란은 건욱의 인사를 받고 나서야 세 사람이 마당에 선 채로 이야기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잠시만 기다려요. 차라도 내올게요.”

“어머니, 차는 괜찮습니다만 혹시 시간이 되시면 저녁을 제가 대접하고 싶은데 어떠십니까.”

“……저녁이요? 나야 시간은 괜찮은데.”

지란이 힐끗 서흔의 눈치를 보았다. 서흔만 괜찮다면 얼마든지 같이 저녁을 먹고 싶다는 마음이 물씬 풍겨 나오는 눈치였다.

“바쁘신 분들인데 서울로 돌아가셔야 하지 않아요?”

“며칠 강원도에 머물 예정입니다. 시간은 넉넉합니다.”

“아, 그래요?”

“읍내에 잠시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같이 가요, 건욱 씨.”

“아니야. 당신은 어머니 오랜만에 만났는데 천천히 회포 풀고 있어요.”

건욱이 강원도에 갑자기 시간을 내서 오자고 한 것은 그녀에게 이렇게 엄마와 만나게 해주고 싶어서일 터였다.

서흔은 그의 마음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아 고마우면서도 갑작스럽게 마주친 엄마에 당황스러웠다.

“금방 다녀올게요.”

“응. 조심히 다녀와요.”

서흔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건욱이 세단을 타고 집을 빠져나가자 지란이 입을 열었다.

“우선 씻고 올 테니 앉아 쉬고 있어.”

온몸이 흙투성이인 지란이 샤워를 하러 안쪽으로 들어갔다. 서흔은 옅은 한숨을 쉬고는 대청마루에 기대앉았다.

5월의 강원도는 아직도 서늘했다. 서흔은 얇은 카디건을 조금 더 여미며 몸을 감싸 안았다.

눈앞에 커다란 산이 보였다. 그 아래 펼쳐진 밭과 논이 쭉 이어져 있었다.

몇 가구가 살지 않는 동네는 조용했다. 조용한 가운데 멍하니 산을 바라보고 앉아 있으니 잡생각도 사라지고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보리차 마실래?”

어느새 말끔히 씻고 나온 지란이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너 보리차 좋아하잖아.”

“보리차는 왜 끓였어? 누가 좋아한다고.”

서흔이 어릴 적 지란은 보리차를 자주 끓여 주었다.

목감기를 자주 걸리곤 했던 서흔에게 미지근한 보리차를 끓여 주곤 했는데, 그 영향인지 감기에 걸리지 않더라도 서흔은 보리차를 찾는 일이 잦았다.

“너 생각나서 끓였지.”

“언제 와서 먹는다고.”

“지금 먹잖아.”

지란이 내온 보리차를 꿀꺽 마시는 서흔을 보며 지란이 웃었다.

서흔은 물컵을 내려놓았다. 지란의 웃는 얼굴에 그녀는 인상을 쓰며 고개를 휙 돌렸다.

“엄마는 정말 싫어. 정말 싫고 짜증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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