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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약혼녀가 아니야 (59)화 (59/74)

59화

“으흐흐흑.”

화장대를 난장판으로 만든 수민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깨진 유리 조각이 발밑에 깔려 있었지만 정신이 없는 듯했다.

“나 이제 어떻게 살아. 그 결혼 하나만 보고 피아노도 다 그만뒀는데. 나 이제 어떻게 사냐고.”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이번 파혼으로 그녀는 조롱의 중심이 되었다. W그룹의 일원이 될 거라 받들던 인간들이 이제 그녀를 낙동강 오리알, 끈 떨어진 연 취급했다.

파혼 사유가 W그룹의 측에 있다는 말도 믿지 않았다. 사람들은 당연히 수민이 그녀의 잘못으로 파혼당한 것으로 생각했다.

“억울해. 분해 죽을 것 같아.”

길게 울음을 터트리는 수민에 채영이 조금씩 다가갔다.

“언니…….”

채영은 수민의 마음이 너무도 이해되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란 게 지금 딱 수민의 심정일 테지.

꽃집을 찾아갔을 때 여자를 감싸고 도는 건욱을 볼 때는 모든 자존심이 무너졌을 테고.

그녀는 수민이 안타깝기도 했고 무섭기도 했다. 조금이라도 수민의 마음을 달래 어서 이 상황을 끝내고 싶었다.

매일, 매일이 외줄 타기 같은 삶은 그만하고 싶었다.

“언니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요?”

채영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지만 수민은 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씩 울음소리가 잦아들고 있었다.

“파혼을 되돌리기는 어렵겠지만 이대로 당해 주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채영은 용기를 내며 말을 이었다.

“그 꽃집에서 보니까 언니와 본부장님이 파혼한 건 그 여자 때문인 게 분명해 보이던데요.”

“겨우 그깟 여자 때문에 내가 파혼당했다는 거야?”

여태껏 유서흔의 이름을 외치며 발악했던 걸 잊은 것처럼 수민이 발발이 날뛰었다. 채영이 벌벌 떨며 말했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그래야만 하니까요.”

“그래야만 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본부장님하고 그 여자는 금단의 사랑이잖아요.”

그 소리에 수민이 울음을 그치며 채영을 돌아보았다.

“그 여자는 차민협 상무님 약혼녀였잖아요. 그런데 얼마 전에 차민협 상무님 파혼하셨고, 혹시 그 이유가…….”

“차건욱이랑 바람이 났다?”

“그런 게 아닐까요? 그래서 말인데요. 이런 이야기 흥미로워할 기자들 꽤 많을 것 같은데……. 언니 생각은 어때요?”

수민이 채영의 이야기에 눈물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휴대폰! 휴대폰 어디 있어?”

채영은 난장판 속에서 수민의 휴대폰을 찾아 내밀었다. 수민은 휴대폰에서 익숙한 전화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기자님, 안녕하세요. 저 정수민이에요. 잘 지내셨죠? 네……. 그럼요……. 다른 게 아니라 제가 좀 재밌는 이야기를 들어서……. 그럼요. 특종감이죠. 시간은 언제가 괜찮으세요? 네…….”

언제 울었나 싶게 미소를 한껏 드리운 수민이 얼굴이 환하게 피어나기 시작했다.

* * *

“또 뵙네요.”

“네. 아직도 잘리지 않아서요.”

건욱의 인사에 도 실장이 담담히 대답했다. 몇 주째 출근하지 않는 건욱 때문에 죽을 맛이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도 실장의 자리는 잘 보전되고 있었다.

“오늘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이동하시면서 이야기하시겠습니까?”

“이유부터 들읍시다.”

“차에 가서 이야기하시죠.”

“이렇게 차로 가자는 걸로 보니 차 회장님이 부르셨나 보네요.”

“네. 본부장님 꼭 모셔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군요. 도 실장, 조심히 돌아가요.”

건욱이 무감하게 대답하곤 전혀 관심도 없다는 듯이 바로 방향을 틀어 빌라로 향했다.

“오실 때까지 <플로라유>에 가서 죽치고 앉아 있을 테니 그럼, 그쪽으로 오십시오.”

“협박입니까?”

걸음을 멈춘 건욱이 인상을 쓰며 도 실장을 노려보았다.

“사정하는 겁니다.”

“사정을 이렇게 뻣뻣하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까.”

“그럼 여기서 본부장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눈물이라도 흘릴까요? 이곳에서 사시는 것 같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건욱의 집이 아닌, 서흔의 집에 얹혀사는 주제에 건욱에 대한 애먼 소문이라도 나면 서흔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꼴이었다.

“상사를 협박하는 비서는 이 세상에 도 실장밖에 없을 겁니다.”

건욱은 할 수 없이 틀어 차에 올라탔다.

“협박이라뇨, 사정이었습니다. 본부장님이 제 딱한 마음에 감복해 차를 올라타신 거고요.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도 실장에 건욱은 헛웃음을 짓곤 편히 기대앉았다.

목적지는 W전자 본사였다. 도착한 건욱은 곧바로 회장실로 올라갔다. 몇 달 전 민협의 사고로 이곳을 찾은 것이 까마득히 옛일처럼 느껴졌다.

건욱이 도착하자 최 실장이 회장실에 노크를 했다. 그가 들어가고 최 실장이 따라 들어와 회장 뒤쪽에 자리 잡았다.

“할애비한테 잘 지냈냐는 인사 한마디 없구나. 이 괘씸한 놈.”

“잘 지내셨습니까?”

엎드려 받는 인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차 회장이 최 실장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최 실장이 건욱에게 기사 자료를 내밀었다.

“정수민 씨 측에서 언론에 제보한 자료입니다. 회장님의 지시로 기사는 나가지 않게 모두 처리해 두었습니다.”

그 기사에는 건욱과 서흔, 민협의 이야기가 엮여 있었다.

“이런 것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서 뭘 하겠다고!”

“수고스러운 일을 하셨네요. 별 상관없는 일에.”

“뭐라꼬? 와 상관이 없노? 니가 W그룹의 얼굴인데.”

차 회장이 아직도 욕심을 내려놓지 못한 얼굴로 건욱을 다그쳤다. 하지만 건욱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

“제가 왜 얼굴입니까. 이제 저는 W그룹과 상관없는 사람인데.”

“차건욱!”

차 회장이 노기 어린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그 여자를 인정할 수는 없지만 이리 기사도 막아 줬다. 시간도 이만큼 충분히 줬으면 알아서 머리 숙이고 들어왔어야 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뻣뻣하게 구는 건욱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니는 차주태의 아들이고, 이 차일도의 손자인데 왜 상관이 없노. 반항도 여기까지데이.”

차 회장은 더 이상은 봐줄 수 없다는 듯이 강경하게 밀고 나갔다. 차씨 집안의 장손이 어떤 의미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건욱이었다.

“돌아오면 제게 무얼 주실 겁니까?”

그러면 그렇지. 미끼를 무는 건욱에 차 회장이 만족스러운 미소로 탁자를 쾅! 내려쳤다.

“말해 무엇 하노! 이게 다 니 건기라! 이 모든 걸 니 발밑에 두는 기라!”

“서흔이도 인정해 주시는 건가요?”

차 회장이 미소를 지우며 대답했다.

“그래. 어디 만나 봐라. 사람의 인연이란 게 잠깐의 만남으로 어찌 아노. 만나보고 추후 일은 그때 다시 얘기하재이.”

한발 물러서는 듯했지만 결국은 인정하지 않겠다는 능구렁이 같은 차 회장의 마음이 너무도 투명하게 읽혀 건욱은 피식 웃어 버렸다.

“좋습니다. 호텔 대표직은 복귀하겠습니다.”

“대표직은 복귀하겠다니? 뭔 뜻이고?”

“W호텔은 아버지의 피땀이 녹아 든 곳이고 제가 책임졌던 곳이니 끝까지 책임지고 싶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W전자는 아닙니다. 경영권은 전문 경영인에게 넘기세요. 그게 W전자를 위한 길입니다.”

차 회장이 팔걸이를 쾅! 내리쳤다.

“미친 소리. 내가 이리 살아 있고, 니가 이리 버티고 있는데. 미쳤다고 남의 손에 우리 회사를 쥐여 주노. 그리 못하지. 내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한 그리 못한다.”

역시 차 회장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무엇이 이 모든 일들을 여기까지 치닫게 했는지 그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제 의견은 말씀드렸으니 결정은 회장님께서 하시는 거죠.”

건욱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전 돌아가 보겠습니다.”

건욱이 고개를 꾸벅 숙이자 차 회장이 벌떡 일어나 건욱의 멱살을 잡았다.

팔십이 넘어가는 차 회장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멱살을 쥐고 흔들었지만 건욱은 가만히 있었다.

“니 대체 와 이라노. 와 그라는지 이유나 들어 보자. 대체 와 그라는데?”

“할아버지가 불쌍해서요.”

“뭐라고?”

“대체 이 회사가 뭐라고, 이 회사 따위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하세요. 아버지도, 작은아버지도, 할아버지 자식들 모두 이 회사 하나 때문에 잃으셨어요. 그런데도 아직도 이깟 회사가 중요하세요?”

멱살을 잡은 손이 덜덜 떨렸다.

“아버지가 왜 돌아가셨는지, 작은아버지가 왜 그런 짓까지 벌였는지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그게, 그게 무슨 말이가.”

차 회장의 손이 힘없이 툭 떨어져 나갔다. 갈 길을 잃은 눈동자가 흔들렸지만 건욱은 물러서지 않았다.

“저는 이따위 회사 필요 없습니다.”

차 회장이 넋을 잃은 표정으로 그대로 주저앉았다.

“회장님!”

최 실장이 차 회장을 부축하기 위해 달려갔지만 건욱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회장실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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