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약혼녀가 아니야 (58)화 (58/74)

58화

“뭘 그렇게 빤히 봐요? 출근 준비하는 사람 처음 봐요?”

“응. 처음 봐.”

여전히 침대에 누워 있던 건욱이 엎드린 채로 교차한 팔에 얼굴을 걸친 채 그녀를 진득하게 바라보았다.

“뭘 또 처음 본다고 해요.”

아직은 느른한 봄의 한가운데인데도 한여름의 열기를 품은 것처럼 서흔의 볼이 후끈거렸다.

건욱은 항상 그랬다. 말 한마디 없이도, 단지 시선만으로도 그녀를 긴장시켰다.

“왜 부끄러워해요?”

“아, 몰라요.”

“뭔데?”

“아무튼 나 빨리 나가야 해요. 오늘은 아주 아주 많이 늦었단 말이에요.”

서흔이 늦은 이유인 건욱을 노려보았다. 그는 그저 어깨를 으쓱거렸다.

오늘은 꽃 시장에 가야 하기 때문에 새벽부터 나가야 했다. 그러나 알람 소리를 듣고 일어난 서흔은 건욱에게 붙잡혀 1시간이나 더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다.

“왜 자꾸 늦었다는 거예요? 오픈 시간 되려면 아직 멀었는데.”

“오늘 꽃 시장 간다고 말 안 했어요?”

“말 안 했어요.”

“오늘은 꽃 시장 가려고요. 차 회장님댁에서 지내느라 간 지 오래됐어요. 여기 와서도 팔 때문에 다경이가 다녀오고. 오늘은 오랜만에 내가 가요. 그래서 너무 기대돼.”

“꽃 시장은 어떻게 가요? 당신 차 없잖아.”

“항상 꽃 시장 갈 때는 다경이 차 빌려요.”

서흔이 싱긋 웃으며 다경의 차 키를 손에 들고 흔들었다.

“기다려 봐요. 나랑 같이 가.”

게으른 백수 남친의 모습 그대로 누워 있던 건욱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트라도 두르면 안 돼요?”

태곳적 모습 그대로 거리낌 없이 움직이는 그에 서흔은 화들짝 놀라 몸을 뒤로 돌렸다.

“이미 다 봐 놓고선 고개는 왜 돌려요?”

그 모습에 피식 웃은 건욱이 샤워를 하러 욕실로 들어갔다. 서흔이 그의 등 뒤에 외쳤다.

“나 혼자 갔다 올 수 있어요.”

“알아요. 그래도 기다려요.”

문이 닫히고 물을 트는 소리가 들렸다.

20여 분 정도를 더 기다려서야 서흔은 건욱과 함께 꽃 시장에 갈 수 있었다.

꽃 시장은 새벽부터 무척 북적였다. 평소보다 늦게 나와 살 만한 꽃들이 모두 팔렸을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 정도는 아니었다.

서흔은 건욱과 나와서 그런지 나들이 나온 것처럼 마음이 들떴다.

“오랜만이요. 서흔 씨.”

“안녕하셨어요?”

“몸은 좀 어때요? 교통사고 났었다며.”

“네. 덕분에 지금은 괜찮아요.”

한동안의 공백에 거래처 사장님들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다. 교통사고로 걱정 많이 했다며 생각지도 못한 할인도 받았다.

“생각보다 꽃이 무겁죠?”

처음 그녀가 생각했던 목록보다도 몇 가지 더 샀더니 트렁크와 뒷좌석이 가득 찼다.

“별로.”

하긴 단단한 근육으로만 이루어진 것 같은 몸을 가진 건욱에겐 그다지 무겁지 않을 지도 몰랐다.

“다행이네요.”

싱긋 웃는 서흔을 보며 건욱이 말했다.

“차에서 좀 기다려요.”

“어디 다녀오게요?”

“금방 올게요.”

건욱이 꽃 정리를 마치고 몸을 돌렸다. 서흔은 조수석에 앉아 기다렸다.

어디 간 걸까. 건욱은 꽃 시장에 처음 온 거라 특별히 들를 곳이 없을 텐데 의아했다.

그렇게 기다리기를 10분. 건욱이 품 안에 작은 꽃다발을 든 채로 돌아왔다.

“받아요.”

서흔은 생소한 눈빛으로 그가 건네는 꽃다발을 받았다.

“이거 사러 갔다 온 거예요?”

“꽃집 사장님에게 꽃다발은 너무 상투적인가요?”

“아니요. 나 꽃다발 처음 받아 봐요.”

꽃집을 운영해서 그런지 그녀에게 꽃다발을 건네는 이는 없었다. 차민협조차도 꽃다발을 제외한 다른 것들만 그녀에게 안기지 않았던가.

꽃에 파묻혀 살기에 꽃다발이 오히려 귀해졌다. 그녀는 무척 감동한 눈빛으로 건욱을 바라보았다.

“고마워요, 건욱 씨.”

서흔은 흠뻑 꽃향기를 맡았다. 살짝 물기를 머금은 꽃이 절정의 사랑처럼 생기 가득했다.

그러나 생화라면 머지않아 시들어 버리는 것이 자연의 섭리였다.

그의 마음이 담긴 꽃이 시들어 버린다는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졸리는 기분이었다. 그것만큼은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서흔은 꽃을 프리저브드 플라워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에도 같이 올까요?”

“다음에 또 올 거예요?”

“못 올 것도 없지.”

서흔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꽃 시장 투어는 확실히 수월했다.

처음엔 운전까지 도맡아 하는 건욱에게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데, 다음번에는 자신이 먼저 그에게 가자고 조를지 몰랐다. 하지만.

“같이 꽃 시장에 오는 것도 좋긴 한데요.”

말을 떼는 서흔에게 건욱이 힐끗 시선을 던졌다.

“당신 정말 잘린 거 맞아요?”

그가 그녀의 집에 머무른 지 이 주가 넘어가고 있었다.

소꿉놀이 연애하는 것 같은 생활이 즐겁긴 했지만 그렇다고 마냥 백수 남친으로 남겨 두기엔 그는 너무 아까운 사람이었다.

“사표 수리 안 되었을 것 같은데.”

“백수라서 싫어요?”

서흔의 말뜻을 모를 리 없으면서도 건욱은 일부러 뚱딴지같은 소리로 말을 돌렸다.

“그럼요. 백수를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백수지만 돈은 많으면? 그래도 싫어?”

“진지하게 돈 많다 자랑하지 말아 줄래요? 나 그렇게 돈에 흔들리는 여자 되고 싶지 않은데.”

서흔은 농담을 섞었다. 그가 웃는 걸 보니 좀 더 말을 꺼내도 될 것 같았다.

“그래도 일은 해야죠. 특히 당신 같은 고급 인력이 일하지 않는 건 국가적 낭비라고요.”

“내가 다시 W그룹에 들어가길 원하는 겁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아니요.”

서흔의 의외의 대답에 건욱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당신보고 W그룹으로 다시 돌아가라고 말할 줄 알았어요? 왜요?”

“조금만 더 참으면 W그룹이 내 손에 떨어질 테니까?”

차 회장도, 그의 주변 인물 모두가 W그룹의 주인이 될 날을 생각하며 참고 견디라 했다.

“건욱 씨는 그걸 원해요?”

그런데 서흔은 당연하게도 그녀의 뜻을 설파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고 싶은 것을 물었다.

“…….”

이제껏 살면서 그가 해야 할 일을 말하는 사람은 많았어도 그의 마음에 귀 기울이는 이는 없었다는 걸 그녀는 알까.

“당신이 원한다면 W그룹으로 돌아가도 돼요.”

“표정은 아닌데.”

“내가 차 회장님과 정답게 인사하며 헤어진 건 아니었잖아요. 조금 억하심정이 남아 있어서요.”

W그룹 하면 저절로 차 회장님이 떠올라 그룹에 대한 서흔의 개인적인 이미지는 좋지 않았다.

쫓겨나듯 돈을 던져 줄 때의 그 비참했던 심정은 아직도 깨끗이 지워지진 않았다.

“그건 어쨌든 내 개인적인 생각이고, 상황은 객관적으로 봐야죠. 나는 당신의 능력이 아까워요. W호텔을 이 정도로 성장시킨 사람인데 지금 내 옆에만 붙어 있잖아요.”

“그래서 난 지금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데. 당신은 아니에요?”

한 손을 뻗어 그녀의 볼을 쓰다듬는 건욱의 표정은 농담이라곤 하나도 섞이지 않은 진지함 그 자체였다.

“이 행복이 유리처럼 얇은 판 위에 위태로이 서 있는 걸 당신도 알잖아요. 나는 우리 사랑을 조금 더 단단한 지지대 위에 세우고 싶어요.”

서흔이 제 볼을 감싼 손을 맞잡았다. 건욱이 그녀를 보며 미소 지었다.

회사는 한 번 나가 볼 생각이었다. 차 회장 성격상 사표를 수리했을 것 같진 않으니 완전한 마무리를 하는 것이 한결 깔끔했다.

“알았어요. 생각해 볼게요.”

“고마워요.”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 두 사람 위로 어스름한 새벽이 걷히고 있었다.

* * *

“아아악! 다 죽여 버릴 거야! 차건욱, 유서흔 모두 싹 다 죽여 버릴 거라고!!!”

발악하는 소리가 수민의 방문 너머까지 울리고 있었다. 채영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며 안절부절 서 있었다.

이제껏 볼 꼴, 못 볼 꼴, 길길이 날뛰는 모습까지 여러 모습들을 보았지만 오늘은 정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언니 진정해요!”

채영은 손톱을 깨물었다. 하필 이모도 외출 중이라 수민을 말릴 사람이 없었다.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가 있어! 내가 이런 수모를 당하는 게 말이 돼? 고작 그런 년 때문에 나를 버리는 게 말이 되냐고! 어떻게 그따위 것들이 나를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어!”

수민이 화병을 집어 들었다. 채영은 눈을 꼭 감았다. 이어서 어딘가에 부딪히는 소리와 쨍그랑, 깨지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채영은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이 야단 중에 무슨 사달이 나도 단단히 날 것 같았다.

“아아아악!!”

수민이 화장대의 화장품을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거울에 부딪힌 화장품들이 큰 소리를 내며 깨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