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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약혼녀가 아니야 (57)화 (57/74)

57화

건욱이 서흔의 손을 잡았다.

“집으로 갈까요?”

“안 돼요…….”

“그럼 이런 오픈된 장소에서 해도 될까요, 몸의 대화?”

그의 기다란 손가락이 손을 타고 올라와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이곳이 카페 한가운데라는 것도 상관없이 건욱은 서흔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건욱 씨…….”

“마음이 좀 바뀌었으려나?”

서흔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입술은 언제나 그녀의 사고를 마비시켰다.

그 후론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떻게 집에 왔는지, 현관문을 열었는지도 생각나지 않았다.

문이 닫히자마자 서로의 입술을 물었다. 서흔의 원피스가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침대에 눕혀졌다.

건욱의 손길이, 입술이 서흔 위를 유영했다. 서흔은 건욱의 어깨를 쥐고 몸을 떨었다. 온몸이 열기에 잠식당하는 것 같았다.

“건욱 씨…….”

요즘은 하루하루가 행복했다. 그가 없는 시간을 어떻게 버텼나 싶게 보고 있어도 보고 싶고 안고 있어도 안고 싶었다.

그녀를 가득 채우는 충만한 그의 사랑에 몸이 녹아내릴 때까지 서흔은 건욱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였다.

열락 같은 시간이 지나고 늘어진 서흔을 두고 건욱이 일어났다.

“어디 가요?”

서흔은 베개에 고개를 묻은 채 물었다.

“잠시 누워 있어요.”

그 소리와 함께 서흔은 잠에 빠져들었다. 간혹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현관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도 들은 것 같기도 했다.

“서흔 씨. 일어나요. 너무 오래 자면 밤에 못 자요.”

“으음……. 조금만 더 잘래요.”

“그럴래요? 밤에 안 잘 생각이면 나야 좋지만.”

짓궂은 건욱의 말에 서흔은 억지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아니에요. 일어날 거예요.”

건욱이 서흔의 입술에 쪽― 입을 맞췄다.

“잘했어요. 밥 먹어요, 우리.”

서흔이 대충 옷을 걸치고 침대에서 내려오자 거실 탁자 위에 한 상이 차려져 있었다.

“이게 다 뭐예요?”

“편의점 만찬?”

삼각김밥과 컵라면, 떡볶이와 도시락, 어묵바와 소시지에, 음료수, 팝콘까지. 그야말로 완벽한 편의점 만찬이었다.

“요리 솜씨가 없어서. 그래도 이건 내가 직접 만든 건데 한번 먹어 봐요.”

탁자 가운데 노란 계란물을 입은 토스트가 먹음직스럽게 놓여 있었다.

“유학 시절에 이건 자주 해 먹어서 먹을 만할 거예요.”

서흔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토스트를 크게 한 입 베어 먹었다. 고소한 버터의 풍미와 폭신한 빵의 식감이 무척 좋았다.

“맛있어요!”

서흔이 엄지를 들어 올리자 건욱이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 자는 동안 이거 다 준비한 거예요?”

“응. 다른 것도 준비했어요.”

건욱이 리모컨으로 TV를 켜자 바로 OTT 화면으로 연결됐다. 차 회장 집에 있을 때 서흔이 즐겨 보던 영화 채널이 서흔의 집에서는 나오지 않았다.

도 실장에게 묻고 나서야 그게 OTT 서비스이고 가입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 그의 도움을 받아 건욱은 서흔의 집에 OTT 서비스를 설치했다.

“당신 영화 보는 거 좋아하는 것 같길래. 영화관 데이트 가면 좋겠지만 난 영화보다는 당신이랑 대화하는 게 좋으니까. 당신은 영화 보고 난 대화하고.”

건욱이 서흔의 손에 리모컨을 쥐여 주었다.

“어떤 영화 볼지 골라 봐요.”

“우리 뭐 볼까요? 액션? 드라마? 로맨스?”

“당신이 원하는 거 봐요. 나는 대화면 충분하니까.”

서흔이 고개를 끄덕이며 영화를 골랐다.

“그럼 오늘은 로맨스로 결정.”

영화가 시작됐다. 서흔은 팝콘을 먹으며 영화에 집중했다. 그녀와 다르게 건욱은 서흔에게 집중했다. 그는 서흔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는 빨아 당겼다. 서흔이 신음을 흘리며 물었다.

“뭐 하는 거예요?”

“대화.”

“이게 무슨 대화예요?”

“몸의 대화. 난 그게 더 좋더라고.”

“건욱 씨!”

“당신은 영화에 집중해요. 나는 당신한테 집중할 테니까.”

“이러는데 어떻게 집중을 해요?”

그러자 건욱이 리모컨을 들어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르고는 깊게 입을 맞춰 왔다.

“그러면 키스 한 번 하고 이어 봐요.”

이 엉큼한 남자의 시커먼 계략에 빠진 서흔은 결국 항복을 선언하며 입술을 벌렸다.

* * *

서흔과 다경은 아이디어 회의 중이었다. 다음 달은 5월 가정의 달이라 꽃다발과 꽃바구니를 미리 준비해야 했다.

“이렇게 카네이션이랑 장미를 같이 배치하고 용돈을 꽂을 수 있게 파이프 픽을 같이 배치하면 어떨까?”

서흔이 그림을 그리며 설명하고 있는데 딸랑―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어서 오세요.”

손님을 맞이하러 자리에서 일어나던 서흔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정수민이 채영과 함께 가게로 들어오고 있었다.

“여긴 무슨 일이죠?”

차가워지는 서흔의 목소리에 다경이 서흔을 흘끗 쳐다보았다.

수민은 서흔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가게를 훑어보았다. 생각보다 더 조그만 가게였다.

“무슨 일로 온 거냐고 묻잖아요.”

“꽃 사러 왔다고 하면 안 믿을 거잖아.”

“꽃 사러 온 거 아닐 테니까.”

“맞아. 잠깐 얘기 좀 해요.”

“할 얘기 없으니까 돌아가세요.”

서흔이 몸을 돌리자 수민이 옆에 있던 화분 하나를 들더니 바닥으로 툭 떨어뜨렸다. 바닥에 부딪힌 화분이 산산조각 났다.

“이제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나요? 아직 모자란가?”

“이봐요!”

화분 하나를 더 집어 드는 수민의 모습에 다경이 소리치며 다가가려 하자 서흔이 만류하며 수민에게 다가갔다.

수민이 화분을 내려놓으며 손을 털었다.

“얘기 들었지? 내가 얼마 전에 기가 막히게 파혼을 당했는데. 그게 기분 더럽게도 너 때문인 것 같아서 말이야.”

“그래서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고작 너 따위한테?”

갑자기 수민이 서흔에게 달려들어 머리채를 잡았다.

“아악!”

“감히 너 따위가!”

수민이 서흔의 머리채를 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서흔이 수민의 손을 떼어 내려 애썼지만 소리를 지르며 난동을 피우는 수민의 괴력을 당해 낼 수가 없었다.

놀란 다경이 달려 나와 만류하려 했지만 채영이 다경을 막아섰다. 다경은 채영을 뿌리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라고!!”

수민은 있는 힘껏 서흔의 머리를 잡고 흔들었다. 정말 마음 같아선 이 여자를 세상에서 없애고 싶었다.

여자를 잡고 드잡이를 하는데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수민은 더욱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악!”

서흔이 비명을 지르는데 그때 수민의 머리 위로 물이 쏟아져 내렸다. 놀란 수민이 손의 힘을 풀었다.

그제야 수민의 손아귀에서 풀려난 서흔이 옆을 돌아보니 빈 양동이를 든 다경이 옆에 서 있었다.

안쪽 작업실에서 물을 받아 온 다경이 수민에게 뿌린 것이다.

“어? 어! 언니!”

채영이 달려오며 가방 안에서 수건을 꺼내 내밀었지만 수민은 채영의 손을 내쳐 버린 후 그대로 손을 들어 올렸다.

이것들이! 이것들이!

수민이 힘껏 손을 내리치려는데 누군가 손을 뻗어 수민의 손목을 한 손으로 잡아챘다.

“경우가 없네요, 무척.”

수민의 몸이 갑자기 나타난 손의 힘에 쭈욱 끌려갔다.

“헉! 본부장님.”

채영이 낮게 소리쳤다. 수민의 손목을 잡은 이는 건욱이었다.

“놔! 놔!”

하지만 수민은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지 잡힌 손목을 빼내려고 발악했다.

“놓으라고!”

그러나 건욱은 수민의 손목을 놓지 않았다. 대신 수민을 문밖으로 끌고 나갔다.

“놔, 아파! 아프다고.”

수민의 손목이 끊어질 듯이 아려 왔다. 눈물이 핑 돌 만큼의 무자비한 힘에 그녀가 애원하듯이 소리를 질렀다. 고통으로 손목이 부서질 것만 같았다.

건욱은 일말의 감정도 없는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수민은 처음으로 건욱이 무서웠다.

“제발……. 놓으라고…….”

“본부장님, 언니 손목 부러지겠어요.”

채영이 수민과 건욱을 번갈아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건욱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울먹이며 애원하듯 말하자 그의 시선이 채영으로 떨어졌다.

“부러뜨릴까. 좋은 생각 같은데.”

무감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수민이 겁을 집어먹고 덜덜 떨었다. 힘없이 늘어진 손목에 조금만 힘을 가해 꺾으면 부러뜨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아악!”

건욱이 슬쩍 손을 비틀자 수민이 고통에 참을 수 없는 비명을 질렀다.

“겨우 이런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타인은 쉽게 밟으려 하지. 그게 정수민의 방식인가.”

“아아악!”

건욱이 손목을 팽개치듯이 놓았다. 수민이 그 힘에 휘청거렸다.

“언니!”

채영이 후다닥 달려가 수민을 껴안았다. 두려운 눈빛으로 건욱을 경계하며 수민을 보듬었다.

“다음번엔, 고작 이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건욱이 낮은 목소리로 무심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분노로 물들어 있었다.

수민을 그대로 둔 채 건욱은 몸을 돌렸다. 두 사람의 마지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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