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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약혼녀가 아니야 (56)화 (56/74)

56화

“네가 여기 무슨 일이냐.”

주형의 쇠 긁는 듯한 거친 목소리 사이로 술 냄새가 진동했다. 그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얼굴에는 한동안 면도하지 않았는지 턱수염이 무성했고 옷차림새도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아직 오전 시간인데도 그는 거실 소파에 앉아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건욱이 소파에 마주 앉자 주형이 불편한 심기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미리 연락을 해서 양해를 구하지는 못할망정, 다짜고짜 들이닥쳐서는. 그 나이 먹도록 예의도 모르고. 넌 아직도 부모 없는 티를 이렇게 내야겠냐. 돌아가신 네 아버지가 얼마나 가슴을 치겠어.”

문전박대를 하고도 남았지만 할 얘기가 있다는 건욱의 말에 우선 들어 보자 생각하며 꾹 참고 있는 상태였다.

“있으나 마나 한 부모보다야 아예 없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뭐야?!”

주형이 버럭 화를 내려던 찰나, 안양댁이 트레이를 들고 거실로 나왔다.

두 사람 앞에 찻잔을 내려 두었다. 주형은 부글부글 끓는 심정을 억지로 억눌렀다.

안양댁이 사라지자 건욱이 여유롭게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다.

“작은어머님은 안 보이십니다.”

혜림은 아직 큰 차도를 보이지 않는 민협의 병간호에 매달려 있었다. 주형이 해임된 이후 집 안에 처박혀 있자 더욱 민협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주형은 건욱의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찾아온 이유를 물었다.

“할 이야기가 뭐야.”

“재밌는 사진을 보내셨던데 즐거우셨어요?”

할 말이 있으면 하고 바로 꺼지라는 뜻이 노골적으로 느껴지는 말투에 건욱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덕분에 저는 퇴사했습니다. 이만하면 만족스러운 결과가 되셨나요?”

“퇴사를 했다고?”

단번에 주형이 표정이 밝아졌다.

“네. 덕분에요. 그래서 말인데 궁금한 것 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주형이 소주를 들이켜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정화에게 무슨 짓을 하셨길래 교통사고의 가해자가 저로 둔갑한 겁니까.”

건욱은 주형이 민협의 교통사고의 주범으로 그를 몰아세운 것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주형과 이정화의 대화 녹음본으로 그의 억울한 누명은 벗었다지만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 새끼가!!”

하지만 여기까진 허용 범위가 아니었는지 주형이 벌떡 일어나 삿대질을 했다.

아직도 차 회장 앞에서 망신당한 생각만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다.

그 일로 그는 그가 평생을 바쳐 일궜던 W전자에서 쫓겨났다.

“네가 그 여자를 어떻게 구워삶았길래 내 뒤통수를 쳤는지 모르겠지만!”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주형의 목에 핏대가 선명히 섰다.

“난 네가 진범임을 알고 있어!”

“하하.”

건욱이 낮게 웃었다.

정말로 그를 진범으로 생각하는 건지, 알코올에 전 뇌가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지 못하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어이가 없는 게 사실이었다.

“만약 제가 그랬다면, 민협이가 지금 살아 있겠습니까.”

그는 그렇게 허술한 사람이 아니다. 그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주형 아니던가.

“오냐, 이게 너의 진심이지? 민협이 죽기를 바랐던 거지? 이러고도 네가 한 짓이 아니라는 거야!”

주형이 부들부들 떨었다.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너는 가만두지 않을 거야. 내가 반드시 너를,”

“왜, 저도 죽이시려고요? 우리 아버지처럼?”

“!!!”

갑자기 주형이 숨이 막힌 것처럼 모든 몸짓을 멈췄다. 눈빛이 바람 앞에 등불처럼 흔들렸다.

그럴 리가 없는데.

고작 10살도 채 되지 않았던 건욱이 그날의 진실을 알 리가 없는데.

주형의 등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완전히 텅 비어 버린 뇌리에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놀라셨나 봅니다. 제가 알고 있어서. 아버지 죽음의 진실을.”

냉랭해진 건욱의 눈빛이 주형을 꿰뚫어 보듯이 파고들었다.

어머니와 이혼 후, 아버지는 갈수록 우울감이 심해졌다. 급기야는 회사 일도 손을 떼고 쉬어야 할 만큼 좋지 않았다.

차 회장은 첫째 아들에 대한 지독한 집착을 보였지만 주태는 그것마저도 모른 척하며 오로지 제 감정에 빠져들었다.

주형은 감언이설로 그런 아버지를 꼬드기며 그에게 다가왔다. 겉으로는 형을 돌보는 척하며 주형은 주태의 우울증 약을 아무 효과가 없는 약으로 바꿔치기했다.

주태는 그 모든 사실을 일기장에 적어 두었다. 제 스스로 삶을 놓기가 두려웠던 주태에게 주형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의 덫을 놓았다. 주태는 그 덫에 빠져들었다.

“아버지가 드시던 약을 바꿔치기했더군요. 아버지도 그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난 아니다. 네 아버지가 잘못 안 거야!”

그러다 또 무슨 정신인지 주형이 횡설수설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건욱아, 내가 네 작은아버지야! 너를 아들처럼 키운 사람이 나잖아. 내가 그럴 사람이 아니잖아.”

단 한 번도 조카에 대한 애정을 가진 적도, 보인 적도 없는 주형이었고 건욱 또한 바라지 않았다.

그럼에도 주형은 과거마저도 말 한마디로 바꿀 수 있다고 착각이라도 하는 건지 제멋대로 과거를 지어냈다.

술 때문인지 제대로 사고하지 못하는 주형의 말은 더 이상 들어 주기가 어려웠다.

“민협의 외가의 도움을 받아 주식을 매매하고 있는 거 알고 있습니다.”

해임된 이후 주형은 혜림의 도움을 받아 다시 재기를 꿈꾸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실마저 건욱에게 들켜 버리자 주형의 얼굴이 다시 악귀처럼 구겨졌다.

“W그룹에서 손 떼십시오. 그러면 숙부님도, 차민협도. 섭섭지 않게 챙겨 드리겠습니다.”

W그룹의 어떠한 것도 욕심내지 말고 후계 자리에서 완전히 나가라는 뜻이었다.

“그러면 회장님께는 영원한 비밀이 될 겁니다. 아버지의 죽음의 진실은.”

“차건욱!”

분노로 쩌렁쩌렁 울리는 주형의 목소리를 여상히 들으며 건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건 제가 작은아버지께 베푸는 마지막 관용입니다.”

건욱은 그대로 주형의 집을 나갔다.

* * *

건욱과의 생활은 생각보다 즐거웠다. 같이 하루를 시작하고 밤을 마무리하는 것이 좋았다.

오늘은 며칠 만에 갖는 휴일이었다. 집에만 있으면 정말 하루 종일 침대에서 못 나올 것 같은 예감에 서흔은 건욱과 함께 아침 일찍 문을 여는 브런치 카페에 왔다.

“진짜 커피 한 잔 가지고 돼요? 그래도 집에선 뭐라도 먹었잖아요.”

서흔은 간단한 토스트와 과일이 듬뿍 담긴 요거트를 시켰지만, 건욱은 커피 한 잔만 마시고 있었다.

“그때야 밥을 안 먹으면 잔소리가 심해서. 보통은 아무것도 안 먹어요.”

“그렇구나. 난 아침 꼭 챙겨 먹는데.”

“왜?”

“그냥. 어릴 적부터 엄마가 아침을 차려 줘서? 먹다 보니 계속 먹었고 그러다 보니 습관 됐고, 이제는 당연히 먹는 거고.”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나 보네.”

“아, 미안해요.”

“뭐가 미안합니까?”

서흔은 기사를 통해 그가 어린 시절 부모님이 이혼한 사실을 알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내가 어릴 적에 우리 부모님이 이혼한 사실을 당신이 미안해할 건 아닌 것 같은데.”

“몇 살에 이혼하신 거예요?”

“세 살인가.”

“어머니, 기억나요?”

“아니. 할아버지가 어머니 사진은 모두 없애 버렸거든.”

차 회장은 어머니의 존재 자체를 아예 지워 버렸다. 그저 어머니가 평범한 집의 딸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그토록 증오할 수 있나 싶을 정도였다.

“……만나고 싶지 않아요?”

“별로.”

어릴 때야 자신을 두고 가 버린 엄마가 원망스럽기도 하고 다시 만나고 싶기도 했다.

그런 마음도 아버지의 일기장을 다 읽고 난 뒤에는 사라졌다.

뜨거운 사랑으로도 고된 시집살이를 극복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아이마저도 버리고 싶어 할 정도로 우울증이 심했고, 결국 아버지가 먼저 이혼을 선택했다. 더 이상 어머니의 삶을 망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가 원망스럽겠네요.”

원망일까. 증오일까.

한 단어로 표현하기엔 복합적인 감정이다. 아직도 그에게 차 회장은 풀지 못한 난해한 문제였다.

“과거 이야긴 그만하죠. 오늘 뭐 할까? 쉴 때 보통 뭘 합니까.”

건욱이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물었다.

“보통은 친구 만나서 수다 떨거나, 쇼핑하거나, 영화 보거나. 그냥 그런 거 해요. 당신은 쉴 때 뭐 해요?”

“……음. 글쎄. 뭘 했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딱히 쉬었던 날이 없었네요.”

“아.”

“오늘은 당신이 하고 싶은 일 합시다. 나도 좀 배워야겠어. 쉬는 날에 해야 하는 일들.”

“그럼, 오늘 쇼핑 할래요?”

“아니. 쇼핑은 내 취향이 아니에요. 계산하는 거라면 모를까.”

“어, 그거 내 취향인데, 계산만 좀 해 줘 봐요.”

“안타깝게도 이제 잘린 몸이라. 아껴야 하지 않을까?”

“아, 인정! 그럼 우리 대화할까요? 이렇게 둘이 서로 마주 보고 앉아서 대화하는 거 어때요?”

“그런 대화 말고 다른 대화 합시다.”

“무슨 대화요?”

“몸의 대화?”

천연덕스러운 건욱의 말에 서흔이 얼굴을 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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