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건욱이 고개를 기울였다. 점차 눈꺼풀 사이로 깊은 눈동자가 숨어들어 가며 입술이 맞물렸다.
아, 하는 탄성이 터졌다. 고작 입술만 닿았을 뿐인데 열이 올랐다. 가볍게 입술을 물고 빠는 환락에 정신이 혼미해지는 기분이었다.
“건욱 씨…….”
이건 너무 급한 건 같은데.
그와 이미 사랑을 나누었지만 그 이후 많은 시간을 갖지는 못했다. 있을 곳이 없다며 찾아온 그의 말에 이런 시간을 기대했던 것은도 사실이지만 다른 시간을 나누고 싶었다.
컵라면이라도 저녁을 먹으며 그간의 일들을 이야기하고 싶었고, 일을 그만둔 것이 진심인지 그의 마음을 알고 싶었고, 그가 괜찮은지 듣고 싶었다.
그런데 이렇게 다짜고짜 키스부터 하는 건 예상에 없었던 일인데…….
이성적인 생각들은 뒤섞이는 숨결 하나에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서흔은 그에게 매달리듯 어깨를 껴안았다. 그녀가 적극적으로 키스에 응하자 그의 목울대가 꿈틀거렸다.
“도발하는 거야?”
쌕쌕 내쉬는 숨이 그의 흥분을 고조시켰다.
“감당할 자신 없으면 그만 자극해요.”
일부러 그를 도발한 게 아니었다. 그저 제 감정에 충실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크게 뒤덮는 그를 느끼며 그녀는 그것조차도 제 실수였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아앗!”
그가 번쩍 그녀를 들어 침대로 옮겼다. 쓰러지듯 누운 두 사람의 몸이 그대로 겹쳐졌다.
잔뜩 긴장해 깊은 호흡을 내뱉는 서흔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가 곧은 손가락으로 하얀 살결을 훑었다.
고작 손짓 하나에 핏줄이 바짝 섰다. 그의 손가락이 여린 선을 따라 배회하자 아찔한 감각에 현기증이 났다.
“왜 이렇게 예뻐요.”
손끝이 떠난 자리에 입술을 붙이며 그가 속삭였다. 그의 입술이 집요해질수록 서흔의 눈이 느릿하게 감겼다.
갈수록 그에게 잠겨 드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빠지지 않고선 배길 수 없는 완벽한 합과 같은 느낌.
서흔이 몸을 살짝 일으켜 그의 얼굴을 붙잡고 입을 맞췄다. 놀란 입술 안으로 수줍은 혀를 밀어 넣자 억눌린 신음이 넘어왔다.
“자극하지 말라고 했는데.”
낮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위험하게 울렸다. 부드럽던 숨소리가 한층 거칠어지더니 그녀의 양 발목을 붙잡아 그에게로 끌어당겼다. 저절로 벌어지는 틈 사이로 자리 잡은 그가 입을 열었다.
“감당할 자신 있는 거죠?”
그녀를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이 짙게 빛났다. 결박을 당한 것처럼 서흔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뜨겁게 안을 가득 메우는 건욱에, 한계까지 달아오르는 열기를 느끼며 서흔은 뜨거운 숨을 토해 냈다.
밤의 시작이었다.
* * *
‘몇 시지.’
어디선가 진동이 울렸다. 끈질기게 울리는 진동을 무시하고 싶었지만 이제는 그녀의 머리까지 윙윙 울려댔다.
자고 싶다. 어떻게든 저 알람을 꺼 버려야겠다. 서흔은 휴대폰을 두는 협탁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손끝에 닿은 건 휴대폰이 아닌 단단한 피부였다.
서흔은 뜨이지 않는 눈꺼풀을 억지로 힘주어 들어 올렸다.
“잘 잤어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으며 건욱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벌써 일어나 있었어요?”
“응.”
“더 자지 않고요.”
서흔의 눈이 느릿하게 깜박거린다.
“졸려요?”
“응. 졸려요.”
“왜? 잠 많이 못 잤어요?”
누구 때문에 잠을 못 잔 건데.
모른 척 시치미 떼며 묻는 건욱에 서흔이 눈을 흘겼다.
“건욱 씨는 푹 잤어요?”
“아니. 못 잤어요. 침대는 좁지, 당신은 몸을 바르작거리지. 도통 잠을 잘 수가 없더라.”
그건 신종 고문이나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넓은 침대라면 그녀와 멀찍이 떨어질 수 있었을까.
그에게 감겨 오는 여린 몸 때문에 사그라지지 않는 열기를 잠재우느라 그는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시피 했다.
“눈이 많이 부었네요.”
“어제 라면을 늦게 먹어서 그런 거잖아요.”
어젯밤 끝없이 그녀를 탐하며 놓지 않는 건욱 때문에 라면을 먹기 위해 앉은 건 자정이 넘어서였다.
허기진 배를 채우고자 컵라면 하나씩을 먹고 아쉬운 마음에 맥주도 조금 마셨다.
소화시킬 겸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은 진한 사랑을 나누고 나서야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당신 때문에.”
“나 때문이라니, 유서흔 때문이지. 날 자극한 건 당신이었잖아요.”
건욱이 그녀의 입술에 엄지를 대곤 부드럽게 지분거렸다.
“이 입술이 문제야.”
그녀의 턱을 잡고 입술을 맞추는 그에게 뾰로통했던 마음이 스르륵 자취를 감췄다.
“……겨우 입술만요?”
서흔의 말에 갑자기 건욱이 그녀 위에 올라가 그녀의 몸을 덮고 있던 시트를 쑥 끌어내렸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몸이 그대로 드러나자 서흔이 “꺄악!”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부끄러운 나머지 질렀던 비명은 이내 야릇한 교성으로 바뀌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니, 여기도.”
건욱은 봉긋하게 솟아오른 살결에 고개를 내렸다. 그를 완전히 홀린 듯이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드는 그녀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 건지 알려 줄 작정이었다. 건욱은 정성스레 입술을 놀렸다.
“그, 그만해요.”
“싫은데.”
“나 이제 일어나야 해요. 꽃 시장 가려면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단 말이에요.”
“당신 오늘 쉬는 날이잖아.”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요?”
“달력에 써 있던데. 쉬는 날이라고.”
건욱은 테이블 위에 놓인 달력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래도, 아침부터 이건 너무.”
“싫다는 소리입니까?”
딱딱해진 건욱의 말투에 서흔이 흠칫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무감한 얼굴은 상처받았다는 뜻일까. 서흔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아니, 나는 싫다는 게 아니라.”
“그럼 좋다는 건가.”
“…….”
“여전히 싫다는 소리군요.”
“아, 좋아요! 좋아서 미칠 것 같아! 제발 더 해 줬으면 싶을 정도로 좋다고요!”
고도의 심리전에 휩쓸린 서흔은 잔뜩 붉어진 얼굴로 결국 항복을 선언하며 큰소리로 외쳤다.
“다행이네, 나도 좋거든. 아래는 더 좋고.”
씩 웃은 건욱이 다리 사이로 고개를 내리려 하자 화들짝 놀란 서흔이 그를 붙잡았다.
“아, 거기는……!”
“좋다고?”
건욱이 얄밉게도 정곡을 콕 찔러 물었다.
“정말 이럴 거예요?”
이제는 터질 것처럼 새빨개진 서흔이 쌕쌕 숨을 내쉬었다.
“답은 둘 중 하나입니다. 좋아요? 싫어요?”
“건욱 씨, 정말 너무한 거 알아요?”
건욱을 힘주어 붙잡고 있던 서흔의 팔에서 힘이 스르륵 풀렸다. 도저히 이겨 낼 도리가 없었다.
“부끄러워하지 말아요. 우리가 나쁜 짓 하는 것도 아닌데.”
“알아요, 아는데.”
부끄러워 미칠 것 같기도 하고 더 해 달라 보채고 싶기도 한 이율배반적인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그냥 나한테 맡겨요. 당신은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그냥 느끼기만 해.”
건욱의 손이 은밀한 곳을 스쳤다. 처음엔 움찔 놀랐지만 점차 스르륵 피어오르는 열기에 저절로 신음이 나왔다.
노골적인 신음이 입 안에서 터져 나왔다. 아찔한 쾌락이 그녀의 몸을 잠식하자 서흔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건욱이 다물린 입술을 혀로 핥았다. 점차 서로를 갖고 싶다는 열망이 두 사람을 뒤덮었다.
서로밖에 보이지 않는 시간이었다.
* * *
“오랜만에 뵙습니다.”
도 실장이 꾸벅 인사를 했다. 도 실장은 건욱의 연락에 기다렸다는 듯이 전화를 하자마자 서흔의 집으로 차를 대기시켰다.
“아직 안 잘렸군요.”
건욱이 여전히 깍듯한 도 실장에게 농담을 건네며 차에 올라탔다.
“본부장님도 아직 퇴직 처리 안 됐습니다.”
“그럼, 나 무단결근입니까?”
예상했던 결과에 건욱은 어깨를 으쓱였다. 차 회장의 고집상 절대 그의 사표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건욱이 제 발로 기어들어 와 그의 앞에 바짝 엎드려 빌 것이라 예상할 터였다.
그 정도로 손자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네. 휴가, 연가 모조리 강제 반납된 상태입니다.”
“강제인지, 자의인지 결과는 두고 봐야 알죠.”
“본사로 모실까요?”
“그 전에 한남동에 먼저 들리죠.”
한남동은 차주형의 집이 있는 곳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건욱을 태운 차가 얼마 지나지 않아 한남동에 멈춰 섰다.
여기까지 오는 데 10년이 걸렸다. 참 오래도 걸렸다 생각하며 그는 벨을 누르고 높다란 담장을 올려다보았다.
노란 개나리가 담장 아래로 길게 팔을 드리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