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아침은 오픈 준비로 늘 분주했다. 매장을 환기시키고, 청소를 하고, 화분을 다시 진열하고, 물을 주며 살핀 후 팻말을 내 걸었다.
문에 달린 풍경이 경쾌한 소리를 냈다. 오픈하자마자 들어오는 손님에 서흔은 반갑게 인사를 했다.
“어서 오……. 당신이 여긴 웬일이에요?”
그녀는 갑자기 한창 일할 시간에 <플로라유>에 나타난 건욱에 의아한 눈동자로 그를 보았다.
“반갑다는 소리죠?”
매번 닫힌 문 앞에서 돌아서곤 했던 <플로라유>에 처음 들어온 건욱은 작은 매장 안을 정성스럽게 둘러보았다.
그녀가 서 있는 곳부터 한편에 마련된 작은 화원과 그녀가 소소하게 꾸며 둔 인테리어까지.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지나가다 들른 거예요?”
“아니.”
“그럼요?”
“나 잘렸습니다.”
단번에 뜻이 이해되지 않아 서흔이 눈을 느릿하게 끔벅였다.
“잘리다니요? 내가 아는 그 일반적인 의미의 잘린다는 그거 맞아요? 그러니까 회사에서 나가라고 했다고요? 당신을요? 대체 누가요? 설마…… 회장님이 잘랐어요?”
“응.”
“거짓말.”
“뭐가 또 거짓말이야.”
건욱이 태평하게 웃었지만 서흔은 오히려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건욱과 차 회장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혹 자기 때문은 아닐까 걱정도 되었다.
“지금 웃음이 나와요? 무슨 일인데요?”
“정수민과 결혼하라고 하시길래 안 한다고 했습니다.”
“!”
“그리고 나가라고도 하실 것 같길래 먼저 선수 치고 나왔어요. 어때, 나 잘했죠?”
건욱이 매끈한 미소를 지었다.
정수민.
두 사람의 마음과 마음이 이어졌다고 해도 그들 사이를 가로막는 것들은 꽤 많았다.
처음부터 그녀에게 반감만 보였던 차 회장과 그의 약혼녀, 정수민.
애써 모른 척하고 있었지만 서흔은 내심 차 회장과 정수민이 신경 쓰였다. 차 회장의 반대는 차치하더라도 정수민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상대였다.
그런데 건욱이 그녀가 먼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알아서 정리를 해 줬다. 정수민과 파혼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을지라도 서흔은 그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차 회장님 화 많이 나셨겠네요.”
“그렇겠지?”
서흔이 눈을 가늘게 떴다.
“당신, 되게 태평해 보이는 거 알아요?”
엄청난 폭탄을 하나도 아닌 두 개나 터트리고 나온 건욱에 차 회장이 얼마나 광포하게 날뛰었을지 충분히 상상됐다.
그런데 눈앞에 서 있는 남자는 무척 홀가분해 보였다. 그런 건욱의 모습이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되었다.
“그럼 어떻게 할까. 내 결혼 하나도 내 마음대로 못 하면서, 회장님 눈치만 보면서 바짝 엎드려서 살까요?”
“건욱 씨가 그러는 건 상상이 안 돼요.”
“난 그런 놈이 아니니까.”
“이제 W그룹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모르긴 몰라도 정운그룹과의 혼사는 비즈니스적 협업과도 연관이 있을 터였다.
“글쎄.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잘 굴러가겠지. 명색이 대한민국 최고 기업이잖아요. 능력자들도 많고요.”
“정말 남 말 하듯이 하네요.”
“말했잖아, 나 퇴사자예요. 회사 나오는 순간부터 회사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는 게 퇴사자의 기본입니다.”
정말 행복한 듯이 말하는 건욱에 서흔은 같이 웃어 버렸다. 제 사업체 걱정만으로도 태산과도 같은 짐이 있는데 무슨 W그룹 걱정까지 하나 싶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가 남았는데.”
스윽 건욱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왜 그래요, 무섭게.”
“내가 잘리는 바람에 지낼 곳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유서흔 씨한테 당분간 신세 좀 져야겠어요.”
“지낼 곳이 없다고요?”
“응.”
“집 없어요?”
“없어요.”
건욱이 당당히 고개를 끄덕이자 서흔이 오히려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회장님 댁은?”
“들어가고 싶겠습니까.”
“호텔은요?”
“그건 대표 전용 숙식 제공이었어요.”
“그럼 진짜 지낼 곳이 없어요?”
건욱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당신이 도와주지 않으면 노숙해야 할 판입니다.”
“천만 원이 넘는 슈트를 입고 다니는 사람이 노숙한다는 말을 나보고 믿으라고요?”
“그래서 안 됩니까.”
지낼 곳이야 어떻게든 구할 수 없을까.
아무리 사표를 던졌다고 한들 그의 피에 새겨진 차일도 회장의 손자라는 사실이, W그룹의 후계였다는 사실이 어디로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서흔을 찾아왔다.
“나 퇴사하자마자 여기로 달려왔는데.”
퇴사로 생긴 인생 최초의 여유로운 순간에 그가 같이 있고 싶은 사람은 단 한 사람, 유서흔뿐이었다.
“우리 집 작아요.”
서흔의 집은 그녀가 교통사고 후 차민협의 약혼녀로서 한동안 지냈던 차 회장 별채의 다이닝 룸보다도 작았다.
“알잖아요.”
“알지. 현관문 앞이 바로 주방이고 그 뒤로 거실 겸 침실이라는 거.”
지난번, 그가 그녀를 집에 찾아왔을 때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집이 꽉 찼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서 더 마음에 들어요. 당신이랑 둘이 딱 붙어 있을 수밖에 없을 테니까.”
“알았어요. ……하룻밤만 재워 줄게요.”
아무렇지도 않게 달달한 말을 늘어놓는 건욱에 서흔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 * *
“누가 보면 백수인 줄 알겠어요.”
<플로라유>가 문을 닫을 때까지 건욱은 자리를 한 번도 뜨지 않고 줄곧 매장에 머물렀다.
“백수 맞는데.”
“항상 바빴던 사람은 갑자기 여유가 생기면 어쩔 줄 몰라 한다던데. 차건욱 씨는 아닌가 봐요?”
건욱은 평생 이 시간만을 기다려 온 사람 같았다. 가만히 앉아서 탁자 위에 팔을 걸쳐 턱을 괴곤 그녀만 바라보는 모습이 진정 행복해 보였다.
“체질에 맞는 것 같아요. 그냥 평생 놀고먹을까?”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양새마저도 건욱은 완전 백수 체질이었다. 서흔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물었다.
“저녁은 뭐 먹을래요?”
“먹고 싶은 거 말하면 사 주는 겁니까?”
“네, 건욱 씨는 백수잖아요. 그래도 직업이 있는 내가 살게요.”
“그럼 잠깐 귀 좀.”
서흔이 귀를 기울이듯 가까이 귀를 대자 그가 손바닥으로 말소리가 새어 나가는 것을 방지하며 속삭였다.
“당신.”
귓가에 닿은 숨결에 소름이 쫙 돋았다. 그의 말뜻을 단번에 알아들은 서흔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내가 먹고 싶은 건 당신이에요.”
“난 음식이 아니에요.”
서흔이 화들짝 건욱에게서 떨어지며 손부채질을 했다. 민망함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먹고 싶은 걸 말하라고 한 사람은 당신이잖아요.”
“난 일반적인 음식을 말한 거예요. 아, 됐어요. 그냥 내가 먹고 싶은 거 먹을 거야.”
서흔이 먼저 편의점을 향해 발걸음을 서둘렀다. 콩콩거리며 걷는 뒷모습에 흐뭇한 눈길을 거두지 못한 건욱은 그녀를 따라 걸었다.
“먹고 싶은 게 컵라면입니까.”
서흔이 아무 생각 없이 눈에 보이는 컵라면 두 개를 장바구니 넣을 때 건욱이 옆에 섰다.
“네. 별로예요?”
“아니, 내 주메뉴는 따로 정해져 있으니까. 애피타이저가 무엇이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자꾸 왜 이래요?”
서흔은 혹시 누군가 들었을까 싶어 주변을 재빠르게 살피면서 그의 팔을 찰싹 때렸다.
“이렇게 공개적인 장소에서 그런 얘기를 왜 자꾸 해요?”
“그럼 은밀한 장소에서는 해도 괜찮다는 말이네요?”
“아, 그게 아니잖아요.”
느물거리며 말하는 건욱에 서흔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건욱은 피식 웃으며 그녀의 장바구니를 쉽게 받아 갔다.
“계산해 주세요.”
그러곤 백수 주제에 당당히 블랙 카드를 내밀어 결제를 했다.
편의점 로고가 그려진 하얀색 봉투를 손에 든 건욱이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그녀가 강한 자석에 이끌리듯 그에게 다가가자 그가 손을 마주 잡았다.
편의점에서 그녀의 집까지는 걸어서 금방이었다. 문을 열고 그와 함께 작은 집 안에 들어서자 금세 긴장감이 넘실넘실 차올랐다.
서흔은 괜히 혼자 어색한 기분에 곧장 주방으로 갔다. 상부장에 넣어둔 전기 포트를 꺼냈다.
“물 먼저 올려놓을 테니 잠깐 앉아 있……!”
순식간에 몸이 허공에 들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그와 마주 본 채로 그녀는 주방 테이블 위에 앉혀졌다.
“건욱 씨.”
그녀의 벌어진 다리 사이에 우뚝 선 건욱의 양 팔로 테이블을 짚었다. 강렬한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
“라면은 나중에.”
한층 낮아진 목소리에 몸이 바짝 긴장되었다. 서흔의 눈동자가 떨렸다.